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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밝힌 촛불, 그리고 양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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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키워드를 통해 본 21세기 첫 10년 한국인의 자화상

2009년은 21세기 첫 10년이 끝나는 해다. 그 10년 동안 우리 사회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사진은 2009년 1월 1일 서울 보신각 ‘제야의 종’ 행사에 모인 시민들. <연합뉴스>

2009년은 21세기 첫 10년이 끝나는 해다. 그 10년 동안 우리 사회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사진은 2009년 1월 1일 서울 보신각 ‘제야의 종’ 행사에 모인 시민들. <연합뉴스>

지난 1999년 12월 31일. 정보통신 업체 직원들이 ‘Y2K’(컴퓨터 시스템의 2000년 날짜 인식 오류)에 대한 우려로 정시 퇴근 시간을 한참 넘기고도 사무실에 붙들려 있던 그날 밤 서울 광화문 앞은 그 어느 해보다 화려한 송년 행사로 떠들썩했다. 한 세기의 전환점이자 새로운 천 년이 도래하는 시점이었기 때문이었다. 2009년은 그 화려했던 새 전환점의 팡파르가 울린 지 10년을 꽉 채우는 해다. 지난 10년 동안 한국 사회는 이 세기 초에 전망했던 것 이상으로 급격하게 변화했다. 세 가지 키워드를 통해 21세기 첫 10년 한국인의 자화상을 살펴봤다.

IT혁명
2000년 1월 1일자 경향신문은 ‘뉴밀레니엄 특집’이라는 이름으로 특별 섹션을 만들었다. 키워드는 ‘디지털’과 ‘인터넷’이었다. ‘시공 넘나드는 디지털 세상 활짝’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는 디지털이 불러올 21세기 일상의 변화들을 예측했다. ‘권력은 인터넷에서 나온다’는 제하의 기사는 2008년 정치인 김길동 의원의 가상의 하루를 통해 인터넷이 기존의 정치문화와 선거문화를 어떻게 바꾸어 놓을지를 전망했다. 이 기사에서는 2008년이 되면 의원들이 거수하거나 자리에서 일어날 필요 없이 전자투표 시스템으로 투표할 것이라고 전망했는데, 전자투표는 이제 옛말이 됐다. 발빠른 의원들은 이제 모바일 기기와 트위터를 통해 자신의 일상과 의정활동을 실시간으로 누리꾼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20세기 후반에 그 씨앗이 뿌려진 인터넷과 모바일 중심의 정보통신 혁명은 지난 10년 동안 만개했다. 미국의 소셜네트워킹 서비스(온라인 인맥 구축 서비스)인 마이스페이스나 가상현실 서비스 세컨드라이프도 한국 시장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다. 지난 10년 동안 한국에서는 싸이월드와 블로그,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온라인카페 등 온라인을 통한 의사소통 인프라가 강하게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에 인터넷 문화가 포털 사이트의 커뮤니티 문화를 중심으로 움직였다면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싸이월드 같은 온라인 인맥 찾기 서비스와 1인 미디어로서 블로그가 누리꾼들의 일상을 지배했다. 여기에는 휴대전화에 디지털카메라 기능이 장착되고, 디지털카메라의 사용이 보편화된 것도 한몫했다.

인터넷과 모바일은 언어생활도 크게 변화시켰다. 포털 사이트의 인터넷 댓글 기능이 활성화되고, 휴대전화 문자서비스의 편의성이 향상되면서 기존 어휘를 축약하고 이모티콘만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이른바 ‘외계어’가 등장했다. 외계어에 익숙한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 사이의 문화 격차에 착안한 방송 오락프로그램이 등장할 정도였다.

광장의 발견
지난 10년은 1987년 민주화 항쟁의 결실로 태동한 절차적 민주주의가 틀을 잡은 시기였다. 1998년 출범한 김대중 정권부터 2003년 출범한 노무현 정권에 이르는 10년 동안은 과거 군사정권 시기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이들이 대거 권력의 중심부에 진출하면서 시민적 권리가 크게 신장됐다. 시민적 권리의 신장은 시민단체의 활발한 활동으로 이어졌다. 특히 2000년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 운동은 민주화 이후 한국 시민운동의 역량이 최대로 발휘된 사건으로 꼽힌다.

우리 사회가 2002년, 2004년, 2008년에 목격한 광장에 모인 시민들의 집합적 열정의 분출은 이러한 절차적 민주주의의 성숙과 궤를 함께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경기 기간에 서울 시청앞 광장과 광화문 일대는 자발적으로 모인 시민들이 뿜어낸 열기로 한 달 남짓 뜨겁게 달궈졌다. 같은 해 12월 4일 광화문 네거리에는 그해 6월 미군 장갑차에 밟혀 희생된 여중생 효순·미선 양을 추모하는 시민 10만여 명이 모였다. 이때 처음 등장한 촛불시위라는 평화적 형태의 시위 방법은 이후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를 거쳐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집회를 통해 권력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직접 행동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2008년 촛불집회는 이전까지 광화문이라는 물리적 장소로만 한정돼 있던 광장 개념을 온라인으로 크게 확장했다. 2008년 촛불집회에 본격적인 시동을 건 것은 시민단체가 아니라 10대 여학생들이었다. 학생들은 휴대전화 문자메시지와 인터넷을 통해 집결했다. 뒤이어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의 대열에서도 누리꾼이 중심이 됐다. 포털 사이트 다음의 아고라는 말 그대로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과 촛불집회의 향방을 둘러싸고 격론이 벌어지는 토론의 광장이 됐다. 조직된 시민단체 중심으로 전개되던 기존의 집회문화도 2008년 촛불집회를 거치면서 크게 바뀌었다. 정돈된 대형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과거의 집회는 자발적이고 개별적으로 모인 시민들이 집단 지성을 발휘해 움직이는 시위 형태에 길을 내줬다. 광장에 나오지 못한 시민들은 현장의 누리꾼들이 전달하는 인터넷 생중계를 통해 열기에 동참했다. IT혁명은 새로운 형태의 광장문화를 견인한 추동력이었던 셈이다.

타워팰리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2006년에 출간한 <강남, 그 낯선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란 책에서 2002년 10월 완공된 타워팰리스가 한국 사회 부의 상징이자 부자와 빈자 간의 경계를 확연하게 긋는 ‘구별짓기’의 표상이라고 봤다.

지난 10년은 1997년 IMF 외환 위기 이후 한국 사회에 본격적으로 상륙한 신자유주의 질서가 정착하면서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급속도로 진행된 시기였다. 2001년에 5조원대이던 상장사 순이익은 2004년 39조원대로 폭증했지만 상위 5개 기업이 상장사 순이익의 40%를 넘게 차지했다. IMF의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비정규직 도입 요건을 완화하면서 늘어난 비정규직은 이제 우리 사회의 가장 폭발력 강한 이슈가 됐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통계에 따르면 2009년 8월 현재 우리나라 비정규직 규모는 855만여 명.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 임금 비율은 48.2%로, 정규직의 월평균 임금총액이 255만원인 데 비해 비정규직은 120만원에 불과하다. 임금 수준의 격차는 자식 세대에 대한 교육 기회의 격차로 이어졌다. 부의 격차에 따른 교육 기회 격차가 계층의 대물림 현상을 낳고 있다는 지적이 갈수록 설득력을 얻어 갔다. 부자와 빈자 사이의 벽이 갈수록 높아진 것이다.

한국 경제가 지난 10년 사이 저성장 기조로 돌아서면서 경제적 안정과 부의 축적에 대한 시민들의 욕망은 더욱 강해졌다. 부동산 불패 신화는 강력한 부동산규제 정책을 편 참여정부 시기에도 흔들림 없이 유지됐다. 2007년에는 주식형 펀드 열풍이 불어닥쳐 그해 12월 국내 전체 펀드시장 규모가 300조원을 돌파했다. 그러나 중산층이 부동산과 주식으로 자산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애쓰는 사이에 서민층은 난립하는 재개발로 삶의 터전을 잃고 변두리로 밀려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2009년 1월에 발생한 용산참사는 이런 흐름이 지속될 경우 일어날 수 있는 사회적 갈등의 폭발력을 예보하는 강력한 경고음인지도 모른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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