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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재 ‘존재의 이유’ 시험에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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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불위 권력으로 부작용… 변화 요구 목소리 커져

10월29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야당의원과 시민단체 회원들이 헌재의 미디어법 판결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연합뉴스>

10월29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야당의원과 시민단체 회원들이 헌재의 미디어법 판결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연합뉴스>

"헌법재판소는 지난 20년 동안 대한민국에서 진행된 정치적 민주화의 제도적 상징이다. 거듭되는 대통령정치의 실패와 의회정치의 무능에 비해 지난 20년 동안 헌법재판소는 정치적 민주화의 메인 스테이지가 되어 왔다. 독재시대의 각종 법령에 대한 과거 청산, 대의 과정의 불평등에 대한 교정, 권위주의적인 사회적 폐습과의 절연,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에 대한 공적 승인 등에서 헌법재판소와 그 공헌도를 견줄 수 있는 국가기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국운 한동대 교수(법학부)가 ‘헌법재판소의 독립과 민주화’라는 글에서 밝힌 헌법재판소에 대한 평가다. 헌재는 대법원과 함께 최종심을 담당하는 최고사법기관으로서 헌재의 판결 하나하나가 국민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헌재는 민주화 운동의 산물이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여야 대표의 정치회담을 통해 ‘제6공화국 헌법’이 탄생했고, 국민의 기본권 보장과 자유민주주의 정치 이상의 실현을 위한 제도적 장치의 하나가 헌재 설립이다. 1988년 8월 헌법재판소법이 제정됐고, 9월 헌재가 발족했다. 헌재 재판관은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신분이 보장됐다. 정치적 중립성을 위해 재판관 9명 가운데 3명은 국회에서 선출하고 3명은 대통령, 나머지 3명은 대법원장이 임명한다.

사회 굵직굵직한 사안 판결로 결정
헌재는 설립 초기만 해도 일반인에게 별다른 관심 대상이 되지 못했다. 헌법소원, 권한쟁의심판 등 용어는 일반인에게 낯설었다. 헌재의 판결이 일상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실감할 기회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 이런 인식에 변화가 생기는 계기가 발생했다. 2004년 3월 국회에 의해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 소추를 당하고, 2004년 10월 ‘신행정수도의건설을위한특별조치법’ 위헌소송으로 헌재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됐다. 국민을 대표하는 행정부 수반이 헌재에 의해 물러날 수 있고, 입법부가 통과시킨 법안도 헌재에 의해 뒤집어질 수 있음을 실감했다.

9월24일 헌법재판소 이강국 소장(오른쪽) 등 재판관들이 야간 옥외집회를 금지하는 집시법의 위헌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대심판정으로 들어오고 있다. 현재 제4기 헌재가 활동 중이다. <경향신문>

9월24일 헌법재판소 이강국 소장(오른쪽) 등 재판관들이 야간 옥외집회를 금지하는 집시법의 위헌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대심판정으로 들어오고 있다. 현재 제4기 헌재가 활동 중이다. <경향신문>

헌재의 힘을 느낀 만큼 부작용도 함께 알게 됐다. ‘신행정수도의건설을위한특별조치법’에 대해 헌재가 ‘관습헌법’이라는 잣대를 통해 위헌 판결을 내린 것이 대표적이다. 당시 헌재는 판결 이후 “이젠 조선시대의 경국대전을 헌법으로 교체해야 한다”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임지봉 교수는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가 만든 법률이 헌법재판소가 관습헌법이라 지정한 추상적 잣대에 의해 무효화될 수 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헌재를 국회 위에 올려놓은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도 종부세 위헌 판결, 미디어법 유효 판결 등 사회적으로 굵직굵직한 사안들이 국회가 아닌 헌재 판결에 의해 결정됐다. 미디어법의 경우 법안통과 과정에는 문제가 있지만 법안은 유효하다는 결정을 내리는 모순적인 모습도 보여 줬다.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의 ‘3권 분립’에서 사법부가 입법부와 행정부를 견제가 아닌 압박을 하는 역할을 하는 모양을 취하게 된 것이다.

고려대 정치학과 모 교수는 “헌재가 어느 순간부터 무소불위의 권력을 보여 줬다”면서 “법 적용이 본래의 범주를 넘어서서 확대되는 것은 법치주의가 아니다. 법을 가장한 정치논리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국립서울산업대 양충모 교수(공법학)도 “이번 미디어법 판결은 헌재가 잘못한 것이다. 절차적인 정당성을 갖춰야만 법적 효력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 법이다. 그런데 헌재는 이것을 무시한 것”이라면서 “헌법 자체가 정치적인 사실 관계를 반영하고 정치를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 다만 정치적인 재판을 하기 위해서는 권위를 가져야 하지만 헌재는 국민의 대표성에 한계가 있다”고 설명했다. 임지봉 교수도 “헌재의 존재 이유는 입법부나 행정부와 같이 선거로 구성되는 다수파 기관을 통해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는 소수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데 있다”면서 “그런데 헌재는 소수자와 약자의 인권 보호에는 소극적이고 보수적인 판결로 일관하면서 오히려 그 해결을 정치권에 맡겨두는 것이 바람직한 고도의 정치적 사건들에 겁 없이 뛰어드는 왜곡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국회 결정 뒤집을 수 있는 권한 지녀
국회가 헌재를 견제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은 ▲헌법재판소의 조직, 권한, 인사에 관한 법률 제·개정권 ▲헌법재판소장 임명동의권 ▲헌법재판관 3인 선출권 ▲헌법재판관 탄핵 소추권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런 견제·통제 권한은 헌재에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다는 평가가 많다. 반면에 헌재가 지니고 있는 위헌법률심사권, 헌법소원심판권 등은 국회의 결정을 한순간에 뒤집을 수 있는 강력한 무기다.

학자들 사이에서 헌재의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심지어 헌재 폐지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우석훈 강사는 경향신문에 기고한 칼럼을 통해 “임기 6년, 그것도 연임인 9명의 헌법재판관이 사실상 헌법 위에 있고, 헌법 해석권을 독점하고 있는 상황이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역행한다는 결론을 내렸다”면서 “개헌을 하자. 그리고 구조적 오류에 빠진 헌법재판소는 폐지하자. 그러면 궁극의 판단 문제가 생길 것인데, 기본적인 판단 업무는 미국이나 일본처럼 대법원으로 보내고, 예를 들면 국민 1%의 서명을 받은 헌법 판단 사건에 관해서는 국민투표로 올리자”고 주장했다.

헌재 폐지 주장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다. 헌재의 존재가 민주주의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한국헌법학회 김승환 회장은 “헌재가 설립된 이유는 헌법질서를 수호하고, 국민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헌재를 폐지한다면 대법원은 믿을 만한 기관이냐는 의문이 생긴다”면서 “우선 헌재가 올바른 모습으로 정착할 수 있을 때까지 언론은 언론대로 전문가는 전문가대로 문제점을 지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사법위원회는 ▲대법원의 헌재재판관 지명권 제고 ▲헌법재판관 자격제한 완화 등을 주장했다. 대법원장이 헌재재판관을 지명하면서 법원 출신의 승진인사 성격을 띠고 있고, 헌재 재판관의 국민 대표성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헌법재판관 자격이 변호사 자격이 있는 15년 이상의 실무경력자에게만 부여하는 자격 요건을 완화해 ‘헌법 전문성’을 갖추고 있는 교수 등에게도 문호를 개방하는 것도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헌재의 존재 이유인 ‘소수자와 약자 보호’ 측면에서 이들의 아픔을 잘 알고 있는 인사가 재판관으로 인선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도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민변의 이병래 변호사는 ‘헌법재판소의 과거와 미래’라는 보고서를 통해 ▲정신적 자유권 보장의 중요성을 인정 ▲사회권적 기본권을 폭넓게 인정 ▲소수자 및 사회적 약자 인권보호의 관점을 견지하고 있는 헌법재판관을 인선할 수 있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영진 기자 c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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