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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은 ‘준비된 대선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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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운동 1세대 상징적 인물… 각계각층에 다양한 맨파워 구축

지난 6월 박원순 변호사(희망제작소 상임이사)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시민단체 활동에 대한 국정원 사찰 의혹을 폭로하고 있다. <김석구 기자>

지난 6월 박원순 변호사(희망제작소 상임이사)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시민단체 활동에 대한 국정원 사찰 의혹을 폭로하고 있다. <김석구 기자>

박원순 변호사(희망제작소 상임이사) 정계진출설이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박 변호사 스스로 그동안 “지난 정권 당시 청와대로부터 입각 제의를 받거나 공천을 하겠다는 제안을 수없이 들어왔다”고 밝힌 바 있다. 구체적으로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청와대 민정수석을 제안받은 적이 있었고, 한때 국정원장 후보로 하마평에 오른 적도 있다. 2007년 대선 당시 여권에서는 ‘진보개혁진영 후보’로 그의 이름이 여권 당직자들 입에 오르내렸다.

구여권뿐만이 아니었다. 박 변호사는 최근 발간된 전문 인터뷰어 지승호씨와의 대담집 <희망을 심다>를 통해 “지난 2004년 총선 당시 한나라당으로부터 공천심사위원장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비화를 공개했다. 그에 따르면 당시 총선을 앞두고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두 번 찾아와 부탁했다는 것. 박 변호사가 끝까지 거절하자 그 자리는 박세일 서울대 교수에게 돌아갔다. 박 변호사를 두고 ‘준비된 서울시장 또는 대선 후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장 제의 받아
이명박 대통령과의 인연도 남다르다. 이 대통령은 서울시장 시절 “월급을 받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박 변호사는 그 이튿날 이명박 시장을 찾아가 월급을 환경미화원과 소방대원 유가족들을 돕기 위한 아름다운재단 기금인 ‘등불기금’에 기부하길 설득했다. 당시 이 시장은 흔쾌히 동의했고, 그 후 4년 동안 시장 월급은 전액 기부됐다. 그 후에도 서울시 에코카운실 멤버로 한 달에 한 번 만나 의견을 주고받았다. 서울 숲 조성, 난지도 골프장 등 시민사회와 시 당국이 갈등할 때 이 시장과 박 변호사는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조정했다. 지난 9월17일 희망제작소 사무실에서 연 국정원 2억원 손배소에 관한 입장 발표 기자회견에서 그는 “당시 에코카운실 멤버 가운데 한 사람인 문국현 대표가 대선에 출마했고, 또 다른 멤버가 정치권을 오갔지만 나는 이 선거 과정에서 일체 중립을 지켰고, 정치 과정에 관여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낙천낙선 운동 이후 시민운동 현장을 떠나 새로운 운동의 영역을 개척하기 위해 노력했다”라고 말했다.

1995년에 서울대 우조교 성희롱 사건과 관련해 공동대책위원회에 참여한 인권변호사 시절의 박원순 변호사(가운데). <경향신문>

1995년에 서울대 우조교 성희롱 사건과 관련해 공동대책위원회에 참여한 인권변호사 시절의 박원순 변호사(가운데). <경향신문>

그가 말한 새로운 운동의 영역은 아름다운가게, 아름다운재단, 희망제작소 등이다. 특히 아름다운 가게·재단은 그동안 진보시민운동 영역 내에 머무르던 그의 인맥을 폭넓게 확장시켰다. 아름다운가게의 모태는 참여연대 대안사회팀. 당시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있던 참여연대 앞에서 알뜰시장을 1주일에 한 번 열었다. 안국동 참여연대 바로 옆의 아름다운가게 1호점을 개설하는 데는 선배 변호사 엄상익씨가 보증금 1억원을 마련해 줘 가능했다. 배삼준 가우디 대표이사 회장은 물품창고를 빌려 줬고, 박상진 덕성재단 덕양사 사장은 사무실 건물을 장기임대해 줬다. 아름다운재단을 통한 기부·기금도 줄을 이었다.

1998년 참여연대 시절 박원순 변호사가 삼성전자 주주총회에 참석해 영업보고서를 들고 발언하고 있다. <경향신문>

1998년 참여연대 시절 박원순 변호사가 삼성전자 주주총회에 참석해 영업보고서를 들고 발언하고 있다. <경향신문>

경남 창녕 출신인 박 변호사는 서울로 유학, 경기고·서울대의 엘리트 코스를 밟아 한국사회의 지도층으로 무난히 편입되는 듯했다. 그러나 재수 끝에 입학한 서울대 사회대학 신입생(75학번) 시절 그는 속칭 ‘오둘둘 사건’으로 지칭되는 시위사건에 연루돼 교도소에 갔다. 그는 당시 ‘준비된 운동권’은 아니었다. 박 변호사는 최근 “연행되던 그날 오후에 이화여대 학생이랑 미팅이 예정돼 있었다”면서 “도서관에서 <타임>지를 읽고 있다가 창 밖에서 벌어지는 연행·구타 장면을 보고 뛰쳐나갔다”라고 뒷이야기를 공개했다. 그는 긴급조치 9호의 첫 희생자였다. 이때 만들어진 인연이 선배 ‘공범’인 이호웅 민주당 인천시당 상임고문(전 국회의원), 김정환 시인, 고 채광석 시인 등이다. 훗날 그가 인권변호사로 있을 당시 이들 선배 ‘공범’의 변론을 맡기도 했다.

박 변호사에게 있어 ‘오둘둘’ 사건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닥치는 어쩔 수 없는 운명’과 같은 것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나중에 “그때 교도소에 가지 않고 훈방조치됐다면 지금쯤 서울지검 공안부장이 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교도소에서 나왔지만 서울대로의 복적은 허락되지 않았다. 방황 끝에 그는 예비고사를 다시 치러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78학번)한다. 역사학에 대한 관심은 그 후 역사문제연구소의 창립멤버로 이름을 올리게 된다. 그후 법원사무관 시험에 합격, 강원도 정선에서 등기소장을 한 것도 남다른 경험이다.

삼성가와 박원순의 ‘인연’
조영래 전 변호사(1990년 12월 12일 작고)는 박 변호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거론된다. 조 전 변호사와는 ‘부천서 성고문 사건’ ‘건국대 애학투련 사건’ 등 1980년대 주요 시국사건에서 호흡을 맞췄다. 이들의 활동은 나중에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창립의 모태가 된다. 1991년 8월 조 전 변호사가 작고하기 전에 한 충고에 따라 그는 영국 유학길에 나선다. 

2000년 총선시민연대에 참여한 박원순 당시 참여연대 사무처장이 낙천낙선운동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경향신문>

2000년 총선시민연대에 참여한 박원순 당시 참여연대 사무처장이 낙천낙선운동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경향신문>

영국에 이어 미국으로 건너간 박 변호사는 미국 비정부기구(NGO) 조직들의 실태를 조사하는 한편 미국 국립자료보관소 등에서 한반도 관련 자료들을 모았다. 그가 수집한 자료는 현재 역사문제연구소 자료실에 보관돼 있다.

시민사회 단체 주변에서는 그를 ‘시민운동 1세대’로 분류한다. 최열 환경재단 상임대표는 2000년 총선시민연대 활동 때부터 고락을 함께해 왔다. 이 밖에 이학영 한국YMCA전국연맹 사무총장, 정현백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박영숙 전 한국여성재단 이사장, 양길승 녹색병원 원장, 윤준하 전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등이 시민운동 1세대로 불린다. 비록 일선에서는 물러났지만 현재 시민운동을 주도하는 2세대 그룹에 미치는 영향력 역시 무시할 수 없다. 

‘희망과대안’ 발족을 앞두고 모임을 주도한 2세대 활동가그룹이 박 변호사의 참여를 삼고초려한 이유도 시민사회에서 그가 지니는 상징성 때문이다.

참여연대를 떠난 뒤 그의 인맥 밑천엔 경기고 시절 인연도 상당히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경기고 재학 시절에 그는 ‘룸비니’라는 동아리 활동을 했다. 동아리 동기로는 홍석규 휘닉스커뮤니케이션즈 대표이사 회장, 이규용 전 환경부 장관 등이 있다. 홍석규 회장의 아버지는 홍진기 전 중앙일보 대표이사 회장이다. 홍 회장의 누나 라희씨는 이건희 삼성그룹 전 회장의 부인이다. 형 홍석현씨는 중앙일보 회장이다. 중앙일보는 아름다운가게와 함께 사회봉사캠페인인 ‘위·아·자 페스티벌’을 진행해 왔다.

막사이사이상 수상(1996년)을 전후로 해외인사들과 교류·친분도 두텁게 쌓고 있다. 박 변호사는 최근 영국 파운데이션협회에서 열린 회의에 지도위원 자격으로 다녀왔다. 연속된 일정으로 미국 존 케리 전 상원의원 초청으로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등과 함께 미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국정원의 명예훼손 소송 소식을 들었다.

지난 2005년 아름다운재단 5주년을 맞이해 사회명사 36명의 기부물품의 전시회가 열렸다. 사진은 GS칼텍스 허동수 회장이 박원순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와 매칭그랜트 캠페인 약정식을 갖는 모습. <경향신문>

지난 2005년 아름다운재단 5주년을 맞이해 사회명사 36명의 기부물품의 전시회가 열렸다. 사진은 GS칼텍스 허동수 회장이 박원순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와 매칭그랜트 캠페인 약정식을 갖는 모습. <경향신문>

그는 해외에 나갈 때마다 새로운 운동 아이디어와 구상을 가지고 들어오는 것으로 유명하다. 독일과 일본을 방문한 뒤 돌아와서 해당 지역 시민운동과 시민사회에 대한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한 주변 인사는 “국정원 외압 논란 제기 이후 심적 부담을 느낀 박 변호사가 자주 ‘차라리 해외에 나가 공부를 더 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바 있다”면서 “이번에 ‘희망과대안’ 모임에 참여하면서 적어도 지방선거가 있는 내년 6월까지는 국내에 머무르지 않겠냐”고 내다봤다.

박원순 맨 파워의 가장 큰 ‘밑천’은 참여연대 시절부터 쌓아온 평범한 시민들이다. 단체 자원봉사나 기부 등을 통해 만난 ‘장삼이사’와 다양한 인맥은 제도정치권 인사들로부터는 흔히 발견하기 힘든 그의 덕목이다. 박 변호사는 인터뷰나 강연 등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부·자선운동을 통해 ‘새롭게 눈뜬’ 기부천사의 소개에 주력한다.

사찰 논란 후 희망제작소 후원 늘어
그는 또한 자타가 공인하는 기록광이다. 참여연대 시절부터 그는 프랭클린 플래너의 애용자였다. 그는 또한 명함을 교환한 이들의 주소·연락처 등을 분야별·주제별로 따로 파일로 만들어 관리하고 있다. 희망제작소 관계자는 “박 변호사가 내부 인트라넷을 통해 수시로 갱신된 파일을 올려놓고 있어 연구원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미국에서 국정원의 거액 손배소 소식을 들은 박원순 변호사가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하고 있다. <정지윤 기자>

미국에서 국정원의 거액 손배소 소식을 들은 박원순 변호사가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하고 있다. <정지윤 기자>

최근 국정원 사찰 논란을 거치면서 기업 후원은 상당히 줄어든 반면에 평범한 ‘개인인맥’은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희망제작소의 한 관계자는 “지난 9월17일 기자회견과 보도자료를 낸 직후로 개인후원회원으로 200여 명이 새로 들어왔다”고 밝혔다.

일각의 ‘시나리오’이자 ‘희망사항’대로 ‘희망과 대안’ 이후 박 변호사는 제도정치권으로 나가게 될까. 정대화 상지대 교수는 지난 2007년에 역시 대선출마설이 돌았던 정운찬 국무총리가 출마를 단념하면서 사석에서 한 발언을 예로 들었다. 다음은 정 교수의 말이다. “사람도 회임에서 탄생까지 9개월 반이 걸리는데 지도자를 낳으려면 적어도 9년은 걸리지 않겠는가. 우리 사회에서 지명도가 있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지명도가 정치적 자원의 전부는 아니다. 비정치적 운동이 정치적 운동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기간이 필요하다. 

게다가 본인의 ‘결심’이나 의지도 중요하지 않겠는가.” ‘희망과대안’ 결성 전후로 박 변호사는 시민운동 인사들과 사석에서도 누차 “출마할 생각은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앞으로 어떤 상황이 전개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박 변호사는 지난 9월17일 국정원의 소송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은 소회를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다. “세상에는 운명이라는 것이 있나 봅니다. 저는 결단코 이런 자리에 서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제 저는 대한민국의 희망이라는 것이 결코 제 마음대로, 제 계획대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하략)” 그의 인생에서 전환점이 되었던 ‘오둘둘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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