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의 개인사를 넘어 한반도의 현대사로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옥중서신 1, 2

김대중, 이희호, 시대의 창 펴냄

김대중, 이희호, 시대의 창 펴냄

한승헌 변호사는 책의 재출간에 부쳐 “<옥중서신>은 편지의 형식을 빌린 신앙고백이자 나라와 세상을 진단하는 간증이며, 내일을 위한 처방”이라고 했다.

10월6일 오후 2시 국립서울현충원 김대중 전 대통령 묘역, 김 전 대통령 묘비제막식 현장. 식순의 여섯 번째는 이희호 여사의 <옥중서신 1, 2> 헌정이었다. 식이 시작될 때부터 어깨를 심하게 들썩거리며 눈물방울을 보이던 이 여사가 보자기에 싸인 책을 헌정하기 위해 일어섰다. 제단 앞에서 윤철구 비서가 책 보따리를 풀어 두 권의 책을 여사에게 건넸다. 한 권은 ‘김대중이 이희호에게’라는 부제였고, 다른 책은 ‘이희호가 김대중에게’라는 부제였다. 여사는 정중하게 1000쪽이 넘는 두 권의 책을 제단에 올렸다. 공저자 가운데 한 사람이 다른 공저자에게 바치는 헌정, 남아 있는 자가 떠나간 자에게 바치는 헌정, 평생을 동지로 동행해 온 자가 동반자에게 바치는 헌정. 이로부터 <옥중서신>은 역사가 됐다. 저자들의 일생 그대로, 개인사를 넘어 한반도 현대사가 됐다.

김 전 대통령은 생전에 <옥중서신>의 재출간을 결심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공개할 수 없었거나 미처 책에 담지 못한 여러 편지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자서전과 함께 남은 생에 대한 정리작업의 일환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하여 원고 정리를 끝내고 제작에 들어가려던 8월, 뜻밖에도 김 전 대통령은 세상과 작별을 고했다.

“못 한 개(이쑤시개 길이의 것) 끝이 연한 것 넣어주시오.(옥중서신 1, 1978년 8월31일자 비밀서신)”
“볼펜 하나 넣어주시오. 내가 잘 관리할 터이니 염려 마시오.(8월18일)”
“1. 미제 볼펜심 내일 중 넣어주시오. 2. 빤스에 허리를 넓은 고무천으로 댄 것은 넣지 말고 천을 겹쳐서 그 사이에 고무줄 넣은 것으로 바꿔주시오. 그래야 그 사이에 펜을 찔러넣을 수 있어요.(9월18일)”

1978년 ‘3·1민주구국사건’으로 진주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김 전 대통령은 지병 치료를 위해 ‘특별 감옥’인 서울대병원으로 이감됐다. 말만 병원일 뿐 햇빛이 완전 차단되고, 정보요원과 함께 24시간을 생활해야 하는 지옥 같은 곳이었다. 하루에 두 번 식사를 가져오는 이 여사에게 김 전 대통령은 비밀리에 메모를 전달했다. 필기도구를 구하지 못한 김 전 대통령은 껌 종이, 과자 포장지 등에 못으로 한 자 한 자 글씨를 눌러 썼다. 음화처럼 숨어 있던 말들이 이번 재출간을 통해 되살아났다. 서신의 복원이 아니라 역사의 복원이다. 한승헌 변호사는 책의 재출간에 부쳐 “<옥중서신>은 편지 형식을 빌린 신앙고백이자 나라와 세상을 진단하는 간증이며, 내일을 위한 처방”이라고 했다. 또한 “역사탐구이자 문명비평이며, 연구논문이기도 하고, 민족과 역사 앞에 띄우는 간절한 소망의 메시지”라고 했다. 더 이상 덧붙일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조선시대에는 ‘유배지 문화’가 있었다. 한양 땅에서 조선 팔도로 귀양살이를 떠난 사람들은 좌절을 떨치고 일어나 유배지에서 학문을 연찬하고, 제자를 가르치고, 시(詩)·서(書)·화(畵)·서한 등으로 위대한 유산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 특히 정치적 이유로 유배를 떠난 학자일수록 더욱 그러했다. 유배가 없었다면 추사의 세한도도 다산의 목민심서도 없었을지 모른다. 유배지 문화에 대응하는 ‘교도소 문화’가 있다. 지난 시절 군사쿠데타 정권은 인권을 탄압하고 민주주의의 수호자들을 끊임없이 격리시켰다. 교도소는 그래서 도서관이 됐고 화실이 됐다. 김남주의 시와 이응로 화백의 문자추상, 그리고 <옥중서신>이 다 이 덕분이라면 이 또한 역사적 아이러니인 셈이다. 끝없는 긍정의 힘으로 역사의 진보를 믿어야 하고, 아픈 역사의 반복을 저지해야 하는 것이야말로 시민의 의무이다. 마지막으로 이 여사의 편지 한 구절. “어느 누구보다 더 큰 한과 더 큰 고난, 치욕의 쓰림과 저림을 몸소 체험한 당신에게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 당신을 크게 축복해주실 것을 믿습니다.(옥중서신 2, 1982년 8월3일)”

최재천<변호사> cjc4u@naver.com

요즘 이 책바로가기

주간경향 댓글 정책에 따라
이 기사에서는 댓글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