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개각 후폭풍

“충청인사 내세워 세종시 무산시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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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총리 후보자 ‘행정도시 건설 수정’ 발언으로 요동치는 충청 민심

정운찬 총리 후보자를 환영하는 대형 애드벌룬이 충남 공주시 금강 둔치에서 휘날리고 있다. <정혁수 기자>

정운찬 총리 후보자를 환영하는 대형 애드벌룬이 충남 공주시 금강 둔치에서 휘날리고 있다. <정혁수 기자>

정운찬 국무총리 후보자의 ‘행정도시건설 수정’ 발언으로 충청민심이 요동치고 있다. 그동안 청와대와 여권 일부에서 흘러 나오던 행정도시건설 수정 추진 방안이 국무총리에 내정된 같은 충청권 출신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총리 내정을 크게 환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충청권 인사를 내세워 행정도시건설을 무산시키려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지역정당인 자유선진당이 심대평 대표의 갑작스런 탈당으로 균열 조짐을 보이자 행정도시 건설을 염원해 온 지역민들의 심기는 불편하기만 하다.

이같은 주민들의 복잡한 심기를 잘 보여 주는 한 사례가 지난 9월9일 있었다. 공주시는 정 총리 내정 발표 직후 시청 본관 건물 외벽에 ‘환영, 정운찬 국무총리 내정’이라고 쓴 대형 현수막을 내걸었지만 1주일도 채 안돼 철거했다. 이유는 현수막 내용에 대한 주민들의 잇달은 항의 때문이었다. 시의 한 관계자는 “공주에서 태어난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의 총리 내정을 축하하기 위해 외벽에 현수막을 내걸었지만 시민들의 철거 요구가 잇달아 어쩔 수 없었다”면서 “정 총리 후보자가 언론 인터뷰에서 ‘행정도시건설을 원칙적으로 반대하지만 현실적 여건을 고려해 수정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 것이 시민들의 정서를 자극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일부에서는 총리 인준 국회 인사청문회와 취임이 남아 있는 만큼 “걸어 놓는 게 좋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항의 전화가 수그러들지 않아 불가피하게 철거를 결정했다는 후문이다.

“고향사람이라고 하기에는 글쎄…”
공주시내에서 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시 외곽에 전형적인 농촌마을인 덕지리가 위치해 있다. 부여군과 약 2㎞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이 마을에서 정 총리 후보자가 태어났다. 현재 200명 남짓한 주민들이 거주하며 60대 이상 노인이 대부분이다. 마을 입구에 총리 지명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2, 3개 걸린 모습에서 이곳이 정 총리 후보자의 고향임을 짐작케 하지만 마을 주민들의 표정은 생각외로 무덤덤했다.

골목에서 만난 심규칠씨(61·덕지리)는 “정 후보자가 몇년 전 야당 대통령후보로 거론될 때 고향을 찾아왔지만 그분을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고향이라고 하면 학교친구도 있어야 하고 피붙이도 있어야 하는데 연고를 주장할 수 있는 그런 ‘끈’이 없다. 부모 묘도 경기도 어딘가에 있는 것으로 안다. 본인이 고향이라고 하니까 뭐라 얘기하기는 그렇지만 우리는 그분을 잘 모른다”고 말했다.

노인 10여 명이 모여 있는 마을회관에서도 정 총리 후보자를 기억하는 이가 거의 없었다. 한 할머니는 “총리 후보자가 되셨으니 축하는 해야지만 우리가 잘 알지 못한 분이어서 마치 내 일과 같이 신나고 하는 건 없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땅 수용당하고 결국 또 당하나

위_지난해 12월 착공에 들어간 행정도시 중심행정타운 내 국무총리실 건립공사 현장. 아래_충남 연기군에 있는 행정도시건설청 전경. <정혁수 기자>

위_지난해 12월 착공에 들어간 행정도시 중심행정타운 내 국무총리실 건립공사 현장. 아래_충남 연기군에 있는 행정도시건설청 전경. <정혁수 기자>

같은 공주시라고는 하지만 탄천면에서 북쪽으로 30여 ㎞ 떨어진 의당면 율정리의 분위기는 싸늘했다. 마을로 이어지는 도로변에 ‘정부는 행정도시건설 원안대로 추진하라’고 새겨진 현수막이 보였다. 한 노인(65)은 “태어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학교를 다니고 지역을 위해 일한 사람이 고향사람”이라면서 “총리에 내정되자마자 ‘행정도시건설 수정’을 이야기 하는 분이 충청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거냐”고 따졌다. 그는 “행정도시 짓는다고 사람들 다 몰아내 놓고 이제는 엉뚱한 도시를 짓겠다는 게 말이 되느냐”면서 “행정도시 건설에 대해 지역민과 같은 정서를 공유하지 못하는 사람은 충청도 사람이 아니다”고 정 후보자를 평가절하했다. 의당면 율정리는 자유선진당을 탈당한 심대평 전 대표의 고향이다.

정 총리 후보자의 ‘수정 추진’ 발언은 성난 충청권 민심에 ‘기름을 부은 격’이나 마찬가지였다. 행정도시의 법적 지위와 관할구역 등을 규정하는 ‘세종시특별법’이 국회에서 계류 상태에 있고, 정부부처 이전 변경고시도 2년째 지연되고 있는 상황에서 같은 지역 출신인 정 후보자가 지역 민심에 배치되는 주장을 내 놓았기 때문이다.

실제 연기군에서 만난 주민들은 ‘정 총리 내정’, ‘행정도시건설’ 등 정부의 태도에 대해 날선 목소리를 많이 냈다. 행정도시 건설을 원안대로 즉각 추진해야 한다는 것으로 정 총리 후보자의 경우 같은 충청권 인사를 내세워 지역민심을 잠재우려는 것 아니냐는 다소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지난 2007년에 첫 삽을 뜬 행정도시 건설사업은 숱한 논란 속에서도 현재 광역교통, 부지 조성, 정부청사 건립, 첫마을 및 시범단지 등 4개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지난해 12월 공사에 들어간 남면 정부청사 1단계 1구역에서는 국무총리실 건립 공사가 한창인 가운데 뿌연 먼지를 날리며 작업에 여념없는 덤프트럭과 굴착기의 굉음만이 무성했다. 아파트 7000가구가 세워지는 첫 마을 조성사업도 현재 39%의 공정률을 보이고 있다.

정운찬 총리 후보자의 고향인 충남 공주시 탄천면 덕지리의 한 주민이 손가락으로 정 총리 후보자가 태어난 집을 가리키고 있다. 비닐하우스 옆 ‘깨밭’ 터가 전 총리 후보자의 집이 있던 자리다. <정혁수 기자>

정운찬 총리 후보자의 고향인 충남 공주시 탄천면 덕지리의 한 주민이 손가락으로 정 총리 후보자가 태어난 집을 가리키고 있다. 비닐하우스 옆 ‘깨밭’ 터가 전 총리 후보자의 집이 있던 자리다. <정혁수 기자>

첫 마을 사업 예정지 공사 현장에서 만난 인부 김도수씨(44·대전시 유성구)는 “몇년 전만 해도 누렇게 익은 벼들로 황금들녘의 장관을 연출하던 곳인데 지금은 먼지가 풀풀 나는 황무지가 돼 콘크리트 시설물만 을씨년스럽게 들어서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연기군이 고향인 김씨는 행정도시 건설 이전에는 이곳에서 농사만 짓던 원주민 출신으로, 조상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오던 땅을 행정도시 건설을 이유로 수용당한 뒤 대전으로 이주해 현재는 첫 마을 공사 현장에서 잡부로 일하고 있다.

그는 “신세를 생각하면 참 기구하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지난 정권에서는 ‘명품도시를 건설해 주겠다’며 황금들녘을 싹 밀어 버리더니 정권이 바뀌면서 행정도시 건설을 이런저런 이유로 지연시키거나 아예 축소하려 하고 있다”고 답답해 했다.

행정도시무산음모저지 충청권비상대책회의 홍석하 공동사무처장은 “일가 친척들과 농사지으며 오순도순 살던 사람들의 집과 땅을 수용한 정부가 이제 와서 행정도시 건설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국민과의 약속 위반”이라면서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을 내놓으면서까지 정부의 국책사업에 협조한 주민들을 또다시 실망시키는 일이 벌어져서는 안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최근 정 총리 후보자의 발언에 대해 “그분이 충청도 출신이라는 사실을 최근에서야 알게 됐다”면서 “효율성을 이유로 ‘수정 추진’을 말했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분이라면 그 이전에 정부가 행정도시 건설을 지연시키면서 이로 인해 발생한 부작용을 먼저 지적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따졌다. 그는 또 “충청권 출신이라고 하면서 몇 년에 한 번 고향에 와서 얘기하면 고향에서 인정 받는가”라고 일침을 놓았다.

행정도시 원안 추진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서 행정도시 내 각종 공사는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국내 굴지의 12개 대형 건설사들에 의해 중심행정타운 배후지역 3개 생활권의 경우 파행이 잇따르고 있다. 시범생활권 조성사업은 연기군 남면 일대 3개 권역을 대상으로 아파트·주택 등 1만5237가구를 건설하는 사업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 “행정도시 원안 추진은 물 건너 갔다’는 얘기가 계속 흘러 나오면서 사업성에 확신하지 못한 건설사들이 중도금 납부를 미루는 등 버티기로 일관하자 토지공사가 쌍용건설, 풍성주택 2곳에 대해 계약을 해지했다. 또 이달 들어 삼성건설에 대해서도 계약해지 절차를 밟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풍성주택은 시범생활권 1-2 공구에 1951가구, 쌍용건설은 1-5 공구에 1132가구 규모의 아파트를 각각 건설할 계획이었다. 삼성건설도 1-4 공구에 879가구 규모의 아파트를 계획하고 있었다.

계약 해지로 50억~100억원대 계약금을 떼일 위기에 놓인 해당 건설사들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한 건설사 관계자는 “가뜩이나 자금 사정도 좋지 않은 데다 정부가 행정도시를 원안대로 추진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무턱대고 자금을 쏟아부을 수는 없는 것 아니냐”면서 “우리는 토지공사가 제시한 장밋빛 청사진을 믿고 여기까지 따라온 죄밖에 없는데 바뀐 주변 상황은 고려치 않고 무조건 계약을 이행하라는 것은 일방적인 횡포”라고 분통해 했다.

정치 쟁점화, 지방선거 최대변수

행정도시건설이 한창인 충남 연기군 조치원읍의 한 네거리에 행정도시 건설 정상 추진을 촉구하는 현수막이 내걸려 있다. <정혁수 기자>

행정도시건설이 한창인 충남 연기군 조치원읍의 한 네거리에 행정도시 건설 정상 추진을 촉구하는 현수막이 내걸려 있다. <정혁수 기자>

토지공사 측은 그러나 “계약이 해지됐거나 관련 절차가 진행되는 건설사의 경우 2014년 완공 예정인 중심행정타운 인접 지역으로 중앙부처가 이전하면 곧바로 주거 기능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하는데 약속한 계약 사항을 이행하지 않아 공사 차질이 예상돼 어쩔수 없이 해지하게 됐다”면서 “건설사 측은 주변 상황이 변했다고 사정을 호소하지만 토지공사는 당초 설계대로 모든 상황을 진행한 만큼 외적 요인으로 반발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정 총리 후보자의 ‘수정 추진’ 발언으로 행정도시건설 문제가 정치 쟁점화되면서 민주당, 자유선진당 등 야권의 공세도 연일 계속되고 있다. 민주당은 “충청권 총리를 내정하고 후보자의 입으로 변경하겠다고 얘기하는 것은 배후에 청와대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면서 “이명박 정권이 행복도시를 원래대로 추진하는 것을 주저하고 무언가 꾸미고 있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 “정 전 총장이 총리 후보자로 지명되고 나서 가장 먼저 세종시 후퇴 발언을 하는 것을 보고 충청권 총리론이라는 것이 결국 세종시를 후퇴시키기 위한 방안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대통령과 한나라당이 법에 의해 이전하게 돼 있는 정부부처 이전고시를 빨리 시행하고 정상적인 세종시 건설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고 촉구했다.

자유선진당은 “세종시는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 특별법’에 규정된 원안 그대로 반드시 추진돼야 하고, 현 정권이 결코 원안을 수정하거나 하는 어리석은 일을 해서는 안된다”면서 “세종시는 대통령과 정권의 공약 사항으로 정부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원안대로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배재대 공공행정학과 정연정 교수는 “국가균형발전 차원에서 추진된 행정도시 문제를 정치적 관점에서 계속 지연시킬 경우 그 피해는 고스란히 주민들에게 전가될 수밖에 없다”면서 “현 정권이 정 총리 후보자를 충청권 민심수습 차원에서 활용하는 것이라면 바람직한 전략이라고 볼 수 없으며, 그로 인한 결과는 내년 지방선거에서 주민들의 냉정한 심판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정혁수<충남 공주·연기 | 전국부 기자> overal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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