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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훈센, 박정희와 ‘닮은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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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째 장기집권하며 경제성장 주력…

식자층 비판하지만 농촌 지지 절대적

정치 민주화와 경제 발전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는 캄보디아는 앞으로 어떤 길을 걷게 될까. 사진은 캄보디아 프놈펜 시가에서 관광객을 태우고 달리는 시클로(인력자전거).

정치 민주화와 경제 발전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는 캄보디아는 앞으로 어떤 길을 걷게 될까. 사진은 캄보디아 프놈펜 시가에서 관광객을 태우고 달리는 시클로(인력자전거).

인도차이나 반도의 중심부에 위치한 캄보디아. 식민지와 내전의 상흔을 딛고 정치 안정과 개발에 여념이 없는 나라. 험난한 자본주의 세계의 파고 속에서 개발과 발전의 길로 매진할 수 있을지 민주주의를 성공적으로 정착시켜 낼 것인지 기로에 서 있는 캄보디아를 찾아갔다.

프놈펜 초고층건물 건설 한창
프놈펜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건설 현장이었다. 낮은 건물들로 확 트인 시야에 현재 프놈펜에서 최고층 건물이라는 26층짜리 중국계 카나리아 은행 건물이 들어왔다. 푸른색 유리건물 아래에는 초록색 조끼를 입은 시클로 기사들이 관광객을 태우고 거리를 누비고 있었다. 경제 발전 열풍에 휩싸여 온 시내가 오토바이 천지라는 하노이나 아기자기한 볼거리로 한껏 꾸며 놓고 호객에 나선 방콕과 달리 프놈펜 거리는 비교적 한산했다. 거리를 메운 것은 대부분 일제 도요타 승용차였으나 교통량은 많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곳곳에서 공사장이 눈에 띄었다. 프놈펜 시내에서 메콩강 등 여러 강의 지류와 합쳐지는 톤레사프 호수 주변에는 중국계 건설자본이 새로 지은 초대형 위락시설이 보였다. 도박장, 테마파크, 스파, 백화점 등이 한데 모인 거대한 건물이었다. 여전히 허름한 프놈펜 주택가와 시장골목을 생각하면 과연 저곳에서 오락을 즐길 프놈펜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다른 쪽에는 한국계 투자회사가 42층짜리 건물을 짓고 있었다. 납작한 프놈펜에 우뚝 솟아오른 초고층 건물. ‘한국적인, 너무나도 한국적인’ 발상.

캄보디아 전체가 한국형 발전 모델을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었다. 전후 잿더미에서 맨손으로 시작해야 했던 한국처럼 캄보디아 역시 변변한 자원이 없다. 양 옆에는 베트남과 태국이 있어 상대적으로 약한 캄보디아는 늘 그 등쌀에 시달려야 했다. 면적 18만㎢, 인구 1450만명, 대부분 평야로 이뤄진 비옥한 땅을 갖고 있긴 하지만 인력자원이 동북아처럼 많은 것도 아닌 데다 아직까지 교육 수준도 높지 않다. 여전히 성인 문자해독률은 70%대다.

그런 캄보디아가 가장 먼저 키우고 있는 산업은 한국이 그랬듯이 의류·직물산업이었다. 프놈펜 외곽의 의류공장에서는 점심시간이 되자 작업복 차림의 여공들이 쏟아져 나왔다. 캄보디아 전체 수출의 85%가 이 분야에서 나온다.
 

점심시간이 되자 쏟아져 나오는 캄보디아 의류공장의 여성 노동자들. 의류·직물 산업은 캄보디아 전체 수출의 85%를 차지한다.

점심시간이 되자 쏟아져 나오는 캄보디아 의류공장의 여성 노동자들. 의류·직물 산업은 캄보디아 전체 수출의 85%를 차지한다.

현재로서는 최소한 발전 펌프에 ‘마중물을 부은’ 단계는 이룬 듯하다. 지난 몇년 간의 경제 성적은 괜찮았다. 실질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2006년 10.8%, 2007년 10.2%에 이르렀다. 그러나 글로벌 경제 위기로 선진국 시장이 침체된 지난해에는 6.8%로 떨어졌다. 수출지향적 경제구조의 작은 나라는 선진국들의 기침에 몸살을 앓을 수밖에 없다. 캄보디아 경제의 ‘진검승부’는 이제부터인 것처럼 보였다. 대부분 아프리카 국가들은 국제기구와 서방의 막대한 원조를 받고도 개발 원동력을 축적하는 데에 실패한 반면 아시아의 많은 나라는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시작해 느리게나마 발전의 길을 걸어왔다. 캄보디아의 현재 경제 상황은 사하라사막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보다 그리 좋을 것도 없다. 1인당 GDP(구매력 기준)가 연간 2000달러에 불과한 아시아의 최빈국 가운데 하나이다. 베트남, 태국의 발전효과가 캄보디아에까지 미칠 지 관심거리다.

장기집권 중인 훈센 총리는 베트남 ‘괴뢰정권’의 총리를 지낸 것을 시작으로 친베트남 노선을 꾸준히 걸어온 인물이다. 1975~1978년 크메르루주의 폭압 통치 뒤 캄보디아는 1989년까지 베트남의 점령통치를 받았고, 1993년 유엔 지원 아래 선거를 치러 연립정부가 구성됐다. 연립정부의 제2총리로 뽑힌 훈센은 1997년에 제1총리인 노로돔 라나리드 왕자를 몰아내고 무혈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했다. 이어진 선거들에서 ‘민의’로 총리에 취임했지만 야당과 계속 연정을 구성해야 하는 처지였다.

지난해 총선에서 훈센의 캄보디아인민당은 처음으로 의석 과반을 차지했다. 선거 과정을 지켜본 국제선거감시단은 “민주적으로 치러졌다”고 평가했다. 훈센이 총리를 지내기 시작한 지 벌써 24년째이지만 워낙 곡절이 많았기 때문에 ‘장기집권 독재’라고 말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지식인층은 훈센이 베트남의 지원을 받는 정권이라고 비판하지만 농촌에서는 훈센에 대한 지지가 절대적이다. 캄보디아인 안내원 찬산은 “폴 포트 시절이 지옥이었다면 지금은 그래도 천국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훈센 덕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부정축재 흔적은 아직 없어
훈센은 애당초 논란이 많은 인물이었다. 크메르루주 정권 시절에 군 장교였던 그는 베트남과의 전쟁에 대비해 변경지대 자국민들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거부하고 베트남으로 도주했다. 그리고 베트남에서 게릴라 훈련을 하면서 반 크메르루주 군대를 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베트남군이 1978년 캄보디아를 침공하자 함께 들어와 괴뢰정부를 이끌었다. 캄보디아의 역사적인 짐인 크메르루주에 맞서 싸웠다는 정통성, 하지만 타국의 점령통치에 복무했다는 반민족성을 함께 지닌 인물인 셈이다.

한국이 일본을 미워하면서도 일본을 앞세워 성장의 길을 따르는 ‘기러기형 발전’을 한 것처럼 캄보디아도 베트남의 뒤를 쫓으려 하고 있는 듯했다. 이를 추진하는 훈센에게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모습이 겹쳐지는 것은 당연하다. 어떤 사람들은 훈센 정부도 썩어들어가고 있다고 하지만 어떤 이들은 “최소한 훈센은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나 필리핀의 마르코스 같은 부정축재자들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적어도 대놓고 노골적으로 훈센 또는 그 일가가 캄보디아의 부를 빼돌린 정황은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24년 집권에 이 정도면 강력하면서도 깨끗한 지도자인 셈이다.

정치에서도 역시 ‘문제는 지금부터’인 듯했다. 지난해 과반 의석을 확보한 훈센은 국제사회의 눈치를 보던 것에서 조금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프놈펜은 아시아 비정부기구(NGO)들의 아지트로서 이곳에 200여 개 인권·구호단체가 활동하며 민주주의 정착 과정이나 빈곤과의 싸움을 감시·지원해 왔다. 아시아 인권운동 단체인 아시안브릿지의 나효우 운영위원장은 “지난해 총선 뒤 자신감에 찬 훈센은 인권단체들에 공공연히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면서 “최근 분위기가 급속히 억압적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말했다. 훈센은 “인권단체들이 더 이상 발목을 잡으면 좌시하지 않겠다”면서 검열을 강화하고 주민 통제의 고삐도 바짝 죄고 있다. 이를 방증하는 것은 시골마을로 속속들이 파고든 CPP 조직이다. 프놈펜 시내에서는 물론 전기조차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시골길을 달려도 5분 간격으로 CPP 사무실 간판들이 보여 주민 통제·조직화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라나리드의 푼신펙 정당을 제치고 훈센과 맞서는 최대 야당세력으로 떠오른 삼랭시(정치지도자 삼랭시의 이름을 딴 정당)의 촛불 간판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찬산에게 CPP나 훈센에 대해 물었지만 대답을 꺼렸다. 힘겹게 민주화 길을 걸어온 캄보디아와 훈센은 과연 어떤 길을 택할까.

<국제부·프놈펜|글·사진 구정은 기자 ttalgi2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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