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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메이카인 ‘태어날 때부터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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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움직임 가능한 근육 유전자… 주식 ‘얌’은 스피드 배가 효가

제12회 세계육상선수권 남자 100m 결승에서 우사인 볼트가 우승한 뒤 자신의 기록을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연합뉴스>

제12회 세계육상선수권 남자 100m 결승에서 우사인 볼트가 우승한 뒤 자신의 기록을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연합뉴스>

베이징 올림픽에 이어 1년 만에 벌어진 미국과 자메이카의 육상 단거리 ‘리턴매치’는 싱겁게 끝났다.

자메이카가 8월23일 막을 내린 2009 베를린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남녀 100m를 동반제패하면서 메이저대회 2연패를 달성했다. 자존심을 걸고 설욕에 나선 미국은 ‘단거리=자메이카’라는 공식을 전 세계 육상팬들에게 각인시켜 주는 조연에 불과했다.

‘번개 사나이’ 우사인 볼트(23)가 1년 만에 100m(9초58)와 200m(19초19)에서 연거푸 세계신기록을 작성한 자메이카는 400m계주에서도 대회신기록(37초31)으로 우승, 단거리 세계 최강국임을 입증했다. 이 뿐 아니었다. 여자 100m에서 베이징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셸리 앤 프레이저(23)가 우승을 차지했고, 400m계주도 우승했다. 미국은 단거리 6개 종목 가운데 여자 200m(앨리슨 펠리스)에서만 우승, 완패를 면했을 뿐이다.

‘액티넨 A’ 근육성분, 유전자가 다르다
전 세계기록 보유자인 아사파 파월(27), 혜성처럼 등장한 볼트에 이르기까지 자메이카가 단거리 육상왕국을 건설하게 된 원동력은 무엇일까. 무엇이 자메이카를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람들이 사는 나라’로 만들었을까.

중앙아메리카 카리브해 연안에 위치한 인구 260만명의 작은 섬나라 자메이카. 국민소득 3000달러에 연상되는 것이라곤 ‘블루 마운틴 커피’나 ‘레게음악’의 원산지라는 사실 정도다.

그러나 그들이 육상 단거리왕국을 건설한 배경에는 뭔가 특별한 게 있었다. 자메이카인들의 ‘(우리는)태어날 때부터 빠르다’는 단순한 믿음이 과학을 통해 한 꺼풀 벗겨졌다.

자메이카 공업대학의 에롤 모리슨 교수는 영국 글래스고 대학의 연구 결과를 근거로 ‘액티넨 A’ 라는 근육성분을 특별한 이유로 제시했다. 액티넨 A는 근육의 빠른 움직임을 만들어 내는 유전자 성분으로, 스타트 반응속도에서 승부가 크게 좌우되는 100m에서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 이 성분은 자메이카와 서부 아프리카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서 주로 발견된다.

모리슨 교수는 “볼트나 프레이저뿐 아니라 파월과 심슨, 스튜어트 등 아쉽게 금메달을 놓친 선수 모두가 이 유전자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자연적 성질, 즉 섭생의 효과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를 만들어 냈다. 자메이카의 주식은 한국의 참마와 비슷한 ‘얌’이다. 얌은 탄수화물이 많아 단거리 선수들이 힘을 낼 수 있는 글리코겐을 체내에 축적해 스피드를 배가시키는 효과를 낸다. 에티오피아 장거리 스타들이 해발 3000m에서 자라는 칼슘·단백질·철분 등이 풍부한 ‘테프’를 먹고 힘을 내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전 국민이 달리기 선수’

자메이카는 400m 계주에서도 대회신기록으로 우승해 단거리 세계 최강국임을 입증했다. <연합뉴스>

자메이카는 400m 계주에서도 대회신기록으로 우승해 단거리 세계 최강국임을 입증했다. <연합뉴스>

자메이카인들에게 유일한 스포츠는 육상이다. 축구나 야구 등 구기종목은 아예 없고 관심 밖이다. 자메이카인들은 100m 종목이 신분 상승은 물론 부를 가져온다고 믿고 있다.

자메이카에 훈련을 다녀온 서말구 전 국가대표팀 감독(해군사관학교)은 “자메이카 국민들의 육상에 대한 애정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뜨거웠다”고 말했다.

육상국가대표팀이 지난 1월부터 두 달 동안 실시한 자메이카 현지 훈련기간에 열린 서인도대학 초청 육상경기대회에는 12세부터 성인까지 무려 2000여 명이 참가해 뜨거운 열기를 내뿜었다. 이 가운데 1500명은 100m 레이스에 참가했다. 청소년 세 그룹(14·16·18세 이하)과 성인그룹으로 나뉜 경기는 무려 4, 5시간에 걸쳐 계속됐지만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말이 육상대회지만 100m대회나 다름 없었다.

서 감독은 “자메이카의 영웅 볼트가 400m 결승에 출전하자 육상경기장은 대형 콘서트장을 방불케 했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이정호 대표팀 코치는 “구기종목이 대중화되지 않은 나라여서 그런지 작은 육상대회라도 관중이 꽉 차는 것을 보고 놀랐다”면서 “대회 전에 국제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낸 선수들을 영웅으로 호칭해 다른 선수들에게도 목표의식을 확실하게 부여했고, 다양한 이벤트까지 겸해 말 그대로 축제였다”고 했다.

자메이카에서는 매주 토요일이면 2~5개의 육상대회가 열리고, 대회마다 2000~3000명의 선수가 참가해 미래의 볼트를 꿈꾼다. 엘리트 육상선수를 꿈꾸는 유망주들이 자메이카 공과대학의 코치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실력을 뽐낸다.

그렇다고 선수들이 전력질주를 하지는 않는다. 대회 주최 측이 ‘육상동량’을 보호하기 위해 배려하는 모습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가능성’이 선발 우선순위이기 때문이다. 허들 종목의 경우 국제육상경기연맹 규정상 여자부는 100m와 400m이지만 여기선 변칙적으로 치러진다. 70m, 80m, 300m 등 3개 종목으로 세분화 했다. 12세, 14세, 18세 이하 선수들을 배려해 거리를 조정한다.

남자부 110m 허들도 나이에 따라 허들 높이를 조정해 어린 선수들도 쉽게 뛰고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이를 통해 선발된 선수들은 영국 식민지 시절인 1910년에 설립된 ‘자메이카 챔프스(전국 고교육상대회)’에 출전하고 여기서 두각을 나타내면 자메이카 공과대학의 육상부에 입학해 본격적인 스프린터의 길을 걷게 된다. 자메이카 공과대학에서는 280여 명의 단거리 선수가 집중 육성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 볼트도 이 같은 관문을 거쳐 스타로 키워졌다.
트랙조차 없는 잔디밭이 되레 약이 됐다.

스프린터의 길을 걷게 돼도 특급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다.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이 공인한 자메이카 공과대학의 상급자 훈련장(HPTC)이 잔디 트랙이라면 믿겠는가. 볼트와 파월도 여기에서 훈련한다.

자메이카가 훈련효과를 위해 잔디를 깐 게 아니다. 영국 식민지 당시 사용하던 크리켓 잔디구장에 엔진오일로 레인만 그려서 육상 경기장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국민소득 3000달러밖에 되지 않는 자메이카에서 베를린 올림피아슈타디움과 같은 ‘몬도트랙’은 사치일 뿐이다.

그러나 효과는 탁월했다. 트랙과 달리 표면이 불규칙해 발과 다리의 잔근육을 키워 준다. 지면이 부드러워 같은 강도의 훈련을 받아도 선수들은 더 힘들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한국 대표팀 주장을 맡고 있는 110m 허들의 박태경(29·경찰대)은 “자메이카 전지훈련 두 달 동안 생활환경이나 운동환경이 열악해 실망감을 금치 못했다”면서 “그러나 트랙에서만 운동하던 우리 선수들이 처음엔 잔디밭 훈련에 적응하지 못했지만 두 달 동안의 훈련을 통해 기록 향상에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뛰는 게 마냥 즐거운 자메이카 국민들은 열악한 육상 환경을 즐기며 제2의 볼트를 향해 달리고 있다.

<체육부·김창영 기자 boda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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