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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치 새 출발선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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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정국 이후 새로운 정치문화 정립해야

민주당 정세균 대표가 8월19일 서울광장에 마련된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분향소에서 헌화하고 있다. <김정근 기자>

민주당 정세균 대표가 8월19일 서울광장에 마련된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분향소에서 헌화하고 있다. <김정근 기자>

김대중 전 대통령(DJ)은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 그 자체였다. 지난 50년 간 한국 정치의 한 축이었던 김 전 대통령의 서거는 그를 중심으로 경쟁하며 발전했던 한 정치시대의 종언임과 동시에 우리 정치가 새로운 출발선에 섰음을 의미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김 전 대통령의 퇴장은 현실 정치에 큰 변화를 가져올 전망이다.

김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정권과 신군부 정권에 맞서 정치적 민주화를 이뤄내는 족적을 남겼다는 데 누구도 이의를 달기 어려울 것이다. 한편으로 한국 정치의 병폐인 지역주의와 보스 중심의 정치를 고착화시켰다는 비판에서 자유롭다고 보기 어렵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지역갈등의 최대 피해자이자 수혜자였다. 지난 1987년 대선을 앞두고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후보단일화에 실패하자 평화민주당을 급조, 대선에 출마했으나 실패했다. 그 후 정계은퇴선언을 번복하고 1997년 제15대 대선에 출마해 호남 몰표를 바탕으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DJ의 대권도전사는 영·호남의 갈등사로도 귀결된다.

호남 정치적 리더십 무주공산
김대중 전 대통령은 김영삼 전 대통령 및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와 함께 보스 중심의 정당구조를 고착시키기도 했다. ‘3김’은 사실 민주적인 대의정치 대신 인치(人治)에 가까운 카리스마로 왜곡된 정치구조를 생산해냈다. 이 과정에서 ‘가신정치’, ‘계보정치’, ‘측근정치’라는 부정적인 요소도 발생했다. 특히 김 전 대통령은 지역주의 폐해를 겪는 호남인들의 정신적 지주였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호남인들은 열광했고 따랐다. 김 전 대통령의 영향력은 퇴임 이후에도 여전했다.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 고비고비마다 ‘정치적 발언’을 통해 그의 존재를 부각시켰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민주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 야권 대연합을 제시하기도 했으며, 이명박 정권을 “독재정권”이라고 몰아치기도 했다. 언론들은 그의 말을 대서특필했으며, 정치권은 술렁거렸고, 청와대는 바짝 긴장했다. 김 전 대통령은 민주당에는 나침반 같은 역할을 해온 것이 사실이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는 정치적 관점에서 지역주의와 보스 정치 종언으로 해석된다.

특히 민주개혁진영에 김 전 대통령은 구심점이었고, 민주당에는 절대적 지지기반인 호남지역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김 전 대통령 서거로 인해 초래된 리더십의 공백은 그만큼 클 수밖에 없다. 민주당에는 김 전 대통령의 부재에 따른 빈자리를 극복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이제 호남의 정치적 리더십은 ‘무주공산’이 됐다. ‘포스트 김대중’을 노리는 정치인들의 각개 약진이 이미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민주당 대표를 맡고 있는 정세균 대표, 지난 재보선에서 당선한 무소속 정동영 의원, 최근 의원직 사퇴의사를 밝힌 천정배 의원 등이 대표 주자로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과 같은 강력한 리더는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이며, 이 여파로 호남이든 영남이든 지역주의가 엷어질 수 있다는 견해가 나온다. 이해찬 전 총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오랜 민주화운동과 정당 활동,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시련과 고통을 통해 강고한 지지기반을 형성됐다”며 “앞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같은 강력한 리더십과 지지기반이 나올 수 없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박희태 대표 등 한나라당 지도부가 8월19일 여의도 한나라당에서 열린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는 묵념을 올리고 있다. <우철훈 기자>

박희태 대표 등 한나라당 지도부가 8월19일 여의도 한나라당에서 열린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는 묵념을 올리고 있다. <우철훈 기자>

이런 맥락에서 한나라당도 ‘반(反) DJ 정서’를 정치적 동력으로 활용해 왔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한나라당은 그의 언행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며 영남과 보수우익진영의 단결을 유도했다. 그러나 여권도 김 전 대통령의 서거로 더 이상 정치적 반사이익을 얻을 수 없게 됐다. 한나라당도 정치적 발상의 전환을 요구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나라당, 민주당 등 여야 모두 새로운 출발선에 서게 되는 셈이다. 한나라당뿐 아니라 영남 지역의 강력한 지지를 정치적 기반으로 하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도 정치적 도전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다. 차제에 바람직한 한국 정치 문화가 새로 정립돼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각 정당은 김 전 대통령 서거를 계기로 전략을 가다듬고 있다. 민주당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5.23) ▲한나라당의 미디어법 날치기 처리(7.22)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8.18) 등으로 조성된 이른바 ‘조문 정국’의 모멘텀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생각이다. ‘조문 정국’이 가능한 한 오래 가지 않기를 바라는 한나라당은 일단 민심을 감안, 장례식 기간에는 ‘애도’와 ‘비통’ 모드를 이어가겠다는 전략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때와 달리 서울광장에 분향소를 차리고 개방한 것도 이같은 전략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여야 조문정국 전략 가다듬어
이명박 대통령이 언급한 행정구역 및 선거구제 개편 등은 지연이 불가피해진 것으로 판단된다. 이 대통령은 8·15 경축사를 통해 행정구역 및 선거구제 개편 등을 제시하고 한나라당 지도부가 일제히 이를 구체화하는 행동에 들어감으로써 미디어법 날치기 통과 논란에서 벗어나 정국 주도권을 쥐려고 했다는 것이 정치권의 해석이다. 하지만 이같은 여권의 전략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로 일단 물거품이 된 모양새다. 신율 명지대 정치학과 교수는 “미디어법이 비정상적으로 처리된 이후에 이 대통령이 중대선거구제와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 등을 통해 국면 전환을 노렸다”면서 “하지만 김 전 대통령 서거로 여권이 그려놓은 판이 흐트러지게 됐다”고 분석했다.

미디어법 날치기통과 무효를 주장하며 장외투쟁 중인 민주당 등 야권이 김 전 대통령의 서거로 당분간 정국을 주도할 가능성이 높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인 지난 6월 “민주개혁진영이 힘을 합해 민주주의 후퇴 등 민주주의, 서민경제, 남북관계의 3대 위기를 막아야 한다”고 지적한 것은 위기에 처한 민주·개혁 진영에 제시한 일종의 좌표로 해석된다. 민주당 등 야권은 김 전 대통령 서거를 계기로 미디어법 무효 투쟁을 계속하면서 진보세력과의 연대를 통한 정국 반전을 시도할 것으로 관측된다. 민주당은 일단 장외투쟁 등 모든 일정을 중단하고 김 전 대통령의 상주 자격으로 장례를 주도했다.

10월 재·보선까지 파급 효과
민주당이 조문정국 이후 장외에 쏠린 투쟁방식을 원내투쟁으로 전환할 것이라는 전망도 일각에서 제기된다. 민주당 내부에서는 9월 정기국회에서 대정부 질문과 함께 국정감사에서 정부 여당의 실정을 집중 공격하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야당에 있어 국정감사와 예산안 심사 등 정기국회는 여권을 공격하고 실정을 국민에게 부각시킬 수 있는 기회다. 이같은 원내 투쟁을 성공적으로 벌여 오는 10월 재·보선에서 승리로 이끌자는 것이다. 하지만 야당이 김 전 대통령 서거를 발판으로 총공세에 나설 경우 전직 대통령 서거라는 ‘국가적 불행’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려 한다는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김영삼 신민당 총재, 김대중 평민당 총재,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악수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영삼 신민당 총재, 김대중 평민당 총재,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악수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나라당 등 여권에는 김 전 대통령의 서거가 상당한 심리적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이 대통령이 국정운영 기조를 ‘중도 실용’ 노선으로 전환한 뒤 친(親)서민 정책을 강도 높게 추진하는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변수를 맞은 것이다. 청와대는 당·정·청 쇄신을 통해 정국의 키를 주도하려는 계획이었으나 당장 내각 및 청와대 개편을 장례식 이후로 미뤘다. 지난해에는 ‘촛불정국’, 올 상반기엔 ‘조문 정국’으로 국정을 정상적으로 추진하지 못했지만 올 하반기부터는 ‘이명박식 국정’을 펴겠다는 계획이 주춤해질 수밖에 없다.

여권 일각에서는 조문 정국의 파장이 9월 정기국회는 물론 10월 재·보선으로 연계될 수도 있다는 비관적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이럴 경우 재·보궐 선거 경남 양산에 출사표를 낸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에 불리한 구도로 진행될 수도 있다. 3선의 한 한나라당 의원은 “대표직을 내놓고 출마하든 유지한 채 출마하든 박희태 대표는 한나라당 대표라는 상징성을 감출 수는 없을 것”이라며 “야권에서는 이명박 정권 심판론을 내세워 반MB(이명박) 연대를 강화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10월28일 재·보선이 치러지는 국회의원 지역구는 경기 안산상록을, 경남 양산, 강원 강릉 등 3곳이 확정돼 있다. 10월 이전에 있을 법원 판결에 따라 대상 지역은 1, 2개 추가될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조문 정국이 정부 여당에 불리한 것만은 아니다. 한나라당은 민주당이 김 전 대통령 서거를 계기로 장외투쟁을 중단한 만큼 애도기간 이후 장외투쟁을 재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지 않겠느냐는 판단을 하고 있다. 이에 따라 9월 정기국회에 대비해 민주당 등 야당과의 대화재개 채비를 한다는 계획이다.

<권순철 기자 i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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