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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동지 이희호 여사와 ‘47년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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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아들은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피해자… 동교동 3인방 정치적 최측근

8월20일 임시 빈소였던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을 떠나 국회에 마련된 빈소에 김대중 전 대통령 가족들이 도착하고 있다. <우철훈 기자>

8월20일 임시 빈소였던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을 떠나 국회에 마련된 빈소에 김대중 전 대통령 가족들이 도착하고 있다. <우철훈 기자>

8월20일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입관식이 거행됐다. 입관식이 거행된 후 시신이 안치된 관은 국회 광장에 마련된 공식 빈소로 옮겨졌다. 이날 행사에서 김 전 대통령 가족과 측근의 면면을 볼 수 있었다. 이희호 여사와 세 아들인 홍일·홍업·홍걸씨가 앞에 섰고 뒤에는 동교동계 인사들이 섰다.

입관식에서 이희호 여사는 자서전 <동행>과 편지, 손수건, 고인이 즐겨읽던 성경 등을 관 안에 넣었다. 직접 뜨개질을 해서 투병 중에 덮어 주었던 담요도 여기에 포함됐다. 이 여사는 1962년 5월10일 김 전 대통령과 결혼한 후 47년 동안 늘 그의 옆에 있었다. 지난해 말에 발간된 자서전 <동행>의 이름도 여기에서 비롯됐다.

‘김대중 정권 지분 40%는 이 여사 것’
김 전 대통령은 세 번 낙선한 후 1961년 인제 보궐선거에서 당선됐으나 며칠뒤 5·16 군사정변 때문에 의원직을 잃는 불운을 겪는다. 가정적으로 바로 전 해인 1959년, 김 전 대통령은 첫째 부인과 사별하는 불운이 있었다. 이런 가운데 두 사람의 결혼이 이뤄졌다. 자서전 <동행>에서는 1961년 3월 파고다 공원에서 그가 이 여사에게 청혼하는 부분이 나온다.

“나에게는 원대한 꿈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 참된 민주주의를 꽃피우고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필요로 하며 나와 아이들을 돌보아주기를 바랍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시 이 여사는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YWCA 총무직을 맡고 있었다. 이 여사는 “김대중과 나의 결혼은 모험이었다”고 표현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대신동의 30만원짜리 전셋집에 어머니, 누이동생, 첫째부인 소생 자식 두 명과 살고 있었다. 첫째 부인의 아들인 김홍일 전 의원은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고, 김홍업 전 의원은 중학교 1학년이었다. 두 사람이 결혼한 후 1963년에 김 전 대통령의 셋째 아들 홍걸씨가 태어났다.

김 전 대통령이 군사 정권에서 납치, 사형 선고, 구금, 연금, 망명의 고초를 겪는 동안 그의 곁을 묵묵히 지킨 이 여사는 삶의 동반자이자 민주화 운동의 정신적 동지였다. 자서전 <동행>의 책띠에는 한 지인의 입을 빌어 “김대중 정권 지분의 40%는 이 여사의 것”이라는 표현이 적혀 있다. 이 만큼 이 여사의 ‘동행’이 김 전 대통령의 인생 행로에 큰 힘이 됐다는 것이다.

서울대 사범대를 다니던 당시 이 여사의 별명은 독일어에서 중성을 뜻하는 ‘다스(das)’였다. 이 여사는 남녀공학에서 남학생을 우선시하는 가부장제와 남존여비 의식을 깨기 위해 노력했다. 두 사람의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김 전 대통령과의 ‘동행’에서 이 여사는 내조자가 아니라 동지였다고 할 수 있다. 동교동으로 이사하면서 김 전 대통령이 김대중·이희호라는 2개의 문패를 나란히 내건 것이 두 사람의 동지적 관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김 전 대통령의 아들 3형제는 1997년 12월 김 전 대통령이 대통령에 선출되기 전까지 민주화 운동의 희생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암울한 유신시대와 1980년대 군사정권 시기에 김 전 대통령은 정권의 대표적인 정적이었다. 감옥에 있지 않으면 망명생활을 했으며, 늘 기관원이 그를 따라붙었다. 가족들에게도 기관원이 따라붙었다.

1970년대 초에 동교동 자택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 가족이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1970년대 초에 동교동 자택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 가족이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김홍일 전 의원은 가장 큰 피해자였다. 그는 장례식장에서 이전의 모습을 알아 보기 힘들 정도로 수척한 모습으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의원 시절 비록 휠체어를 타고 있었지만 통통한 얼굴에 건장한 체격이었던 그는 공식석상에 몰라보게 야윈 모습을 드러냈다.

김홍일 전 의원 고문 후유증 시달려
1980년 김 전 대통령도 감옥에 갔지만 김홍일 전 의원도 함께 영어의 몸이 됐다. 민주화 운동을 한 아버지를 둔 이유 때문이었다. 8월19일 최경환 김 전 대통령 비서관은 “(김홍일 전 의원이)당시 김 전 대통령과 함께 끌려가 고문을 당하며 허리와 등을 심하게 다쳤다”고 설명했다. 김홍일 전 의원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돼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때 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그는 파킨슨 병을 앓고 있다. 최경환 비서관은 “김홍일 전 의원은 침대에 누워서 생활할 정도로 몸이 좋지 않았다”면서 “최근에야 휠체어에 앉아서 거동하는 것이 가능해졌다”고 전했다.

올해로 61세인 김홍일 전 의원은 최근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으나 김 전 대통령이 임종하는 순간에 “아버지”라고 세 차례 불렀다. 18일 오후 헌화를 하려고 겨우 몸을 움직이려는 모습을 보여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김홍일 전 의원은 1996년 15대 국회에 전남 목포-신안갑에 출마해 당선됐다. 16대에서는 전남 목포에 출마해 당선됐고, 17대에서는 비례대표 의원으로 활동했다.

김홍일 전 의원의 몸이 불편해 사실상의 상주는 김홍업 전 의원이 맡고 있는 셈이다. 김홍업 전 의원은 17대 국회에 전남 무안-신안 재보선에 당선돼 금배지를 달았다. 그러나 18대 총선에서는 같은 지역구에서 낙선했다. 3남인 김홍걸씨는 중국에서 부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귀국했다.

세 아들은 아버지인 김 전 대통령이 대통령직에 오르기까지 민주화 운동의 정신적 피해자였지만 대통령에 오른 직후에는 또 다른 정신적 피해자가 됐다. 3명 모두 김 전 대통령의 임기 말년에 비리 연루 의혹에 휩싸였다. 홍업·홍걸씨는 2002년 구속됐다. 이때 김 전 대통령은 국민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이 여사 자서전 <동행>에서는 “2002년은 악몽이었다”고 표현했다. 이 여사는 “사형수 아버지에서 대통령 아버지가 된 것이 관객들에게는 드라마틱한 역전극으로 보이겠지만 아이들에게는 현기증이 나는 롤러코스터 게임과 같았을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자서전에서는 미국에서 귀국한 홍걸씨가 아버지 보기가 두려워 청와대에 오지 못한 채 검찰에 바로 출두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이 여사는 아들들의 구속에 대해 “남편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도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다”고 표현했다.

김 전 대통령에게는 가족만큼이나 가까운 동지들이 있다. 동교동계 인사들이다. 김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동교동계에서 권노갑, 한화갑, 한광옥, 김옥두 전 의원 등 4명의 주요 측근이 모든 장례의식에서 앞에 섰다.

동교동계의 맏형인 권노갑 전 의원은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이전과 이후에도 여전히 동교동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동교동계에서는 중요한 결정을 모두 좌장격인 권 전 의원에게 미룬다. 권 전 의원은 중요한 결정에 대해 판단을 내리지만 모든 일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비교적 중요성이 떨어지는 일은 다시 후배에게 위임한다고 한다. 1963년 김 전 대통령이 국회에 첫발을 내디딜 때 권노갑 전 의원은 목포상고 후배로서 그의 선거운동을 도울 정도로 오랜 인연을 맺고 있다. 당시 권 전 의원은 목포여고 영어 교사였다. 평생동안 그는 김 전 대통령의 그림자 역할을 맡았다. 13·14·15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김 전 대통령의 재임시에는 사실상의 2인자로 주목을 받았다. 김옥두 전 의원은 권노갑·한화갑 전 의원과 함께 동교동 3인방으로 불리던 인사다.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한광옥 전 의원 역시 김 전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운 인사다. 이훈평, 윤철상, 최재승, 전갑길, 설훈, 정동채 전 의원 등 옛 동교동계 인사도 김 전 대통령의 주위에 머무르며 오랜 인연을 이어나갔다.

퇴임 후 박지원 의원 역할 돋보여
한화갑 전 의원은 김 전 대통령 서거를 전후해 4명의 동교동계 주요 인물로 복귀했다는 것이 주위의 평이다. 18대 총선 과정에서 김 전 대통령의 최측근인 박지원 의원과 한때 경쟁을 벌이기도 했으며, 독자 정당을 추진하면서 김 전 대통령과 다소 소원한 관계였다고 전해진다. 민주화 세력의 통합 정당을 원했던 김 전 대통령의 입장과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동교동의 품으로 돌아옴으로써 주위에서는 ‘극적 화해’라는 표현을 썼다.

8월16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입원했던 서울 신촌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 김 전 대통령의 최측근인 박지원 민주당 정책위의장과 권노갑·한화갑·한광옥·김옥두 전 의원(왼쪽부터)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연합뉴스>

8월16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입원했던 서울 신촌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 김 전 대통령의 최측근인 박지원 민주당 정책위의장과 권노갑·한화갑·한광옥·김옥두 전 의원(왼쪽부터)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연합뉴스>

권 전 의원을 정점으로 한 오랜 정치적 동지인 옛 동교동계의 축과는 별도로 박지원 의원은 매일 김 전 대통령을 만나 보고를 할 정도로 가장 가까운 김 전 대통령의 측근이라 할 수 있다. 옛 동교동계의 핵심 인물들 역시 박 의원의 역할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하고 있다는 것이 주위의 평이다. 비교적 늦게 동교동에 합류한 박 의원은 국민의 정부에서 마지막 청와대 비서실장을 역임하면서 김 전 대통령의 임기를 마무리했다. 퇴임 이후 그는 김 전 대통령의 바깥 살림을 진두지휘했다.

박 의원이 동교동에서 외부적인 일을 주로 맡아 처리했다면 안살림은 김성재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장이 도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이 주위의 목소리다. 국민의 정부 시절 문화관광부 장관이었던 김 이사장은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관련 일을 맡는 한편 이 여사가 만든 사회봉사모임 사단법인 ‘사랑의 친구들’의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이 남북 화해, 통일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던 만큼 임동원·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도 김 전 대통령 가까이에서 신임을 받았다. 김 전 대통령과 가까웠던 인물의 한 축은 종교계 인사다. 이해동 목사가 대표적이다. 

이 목사를 비롯해 고 문익환 목사, 고 강원룡 목사, 김상근 목사 등은 오래도록 김 전 대통령과 함께 어깨를 걸고 민주화에 앞장선 기독교·시민단체 인사들이다. 한명숙 전 총리 역시 당시 시민단체 활동으로 김 전 대통령 및 이 여사와 가까운 사이다.

국민의 정부에서 화려한 정치 이력을 자랑했던 동교동계는 참여정부·이명박 정부를 거치면서 점차 역사의 뒷무대로 밀려났다. 현역 정치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인사들로는 문희상 국회부의장, 이강래 민주당 원내대표, 추미애 환경노동위원장을 비롯해 박지원·박선숙 의원 정도를 꼽을 수 있다. 국회 부의장인 문희상 부의장은 “2009년 8월18일 저의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이 땅 민주주의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언급했다.

<윤호우 기자 ho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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