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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선생님을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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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딸’ 추미애 의원 추모글


민주당 추미애 의원이 8월18일 서울 신촌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진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빈소를 찾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

민주당 추미애 의원이 8월18일 서울 신촌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진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빈소를 찾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

민주당 추미애 의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와 관련해 “태백산맥이 무너지는 것 같다”며 애통해했다. 3선 의원으로 국회 환경노동위원장인 추 의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적 딸’이라고 불린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김 전 대통령으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그는 대구 출신으로 잘 나가던 판사생활을 접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1995년 정계에 입문했다. 그는 1997년 15대 대선에서 당시 김대중 후보를 그림자처럼 수행하는 등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의 일등공신이기도 했다. ‘추다르크’ 추미애 의원이 ‘Weekly 경향’에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추모의 글을 보내왔다.<편집자주>


"인생은 행복과 불행의 도전과 응전 관계다”
국상의 황망함 속에서도 오늘 공개된 김대중 대통령님의 일기에서 당신이 즐겨 말씀하시던 철학을 보면서 다시 한 번 깊은 감회를 느꼈습니다. 돌아보면 우리의 현대사와 함께 당신의 삶도 도전과 응전의 연속이었습니다. 제가 대통령님을 처음 만난 것은 지난 1995년, 새로운 정당을 창당하며 필생의 도전을 준비하시던 때였습니다. 대통령님의 권유로 50년만의 정권교체라는 시대과제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저를 아는 법조인들이나 대구의 학교 친구들은 많이들 궁금해 했습니다. 왜, 얌전한 여판사가 어느 날 정치인생으로 바꾸게 되었는지, 그것도 전혀 연고가 다른 정당에서 험난한 길을 가게 되었는지 물어보곤 합니다. 

전두환 정권 말기 공안통치가 기승을 부리던 무렵, 춘천지방법원에서 초임판사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등 100권이 넘는 책을 불온서적이라며 압수하려던 영장을 기각하는 등 공권력 남용에 수시로 제동을 걸었습니다. 어느 날 법원장이 저를 호출하더니 “당신, 김대중 정치운동하는 판사냐?”고 비아냥대듯 야단쳤습니다. 양심과 법률에 따른 초임판사의 열정이 그렇게 묵살 당했습니다. 당시 ‘김대중’이라는 이름 석 자는 암울한 시대에 금기와 편견의 상징이었고, 불온의 대명사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저에게 ‘김대중’의 이름이 씌워졌지만 그 분과는 생면부지였습니다. 실제로 인연이 맺어진 것은 그로부터 10년 뒤에 우연히 찾아왔습니다.


1995년 8월 한여름.
‘다시 태어나도 판사’라고 생각할 정도로 법관직에 대한 소신과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제가 느닷없이 정계 입문을 권유 받았습니다. 새로운 정당을 준비하던 김대중 총재로부터였습니다. 그로부터 열흘 간의 고민 끝에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될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어느 중국 음식점에서 김대중 총재 내외분과 우리 부부의 이른바 ‘정치맞선’ 자리가 이루어졌습니다. 물도 안 넘어갈 정도로 여러 날 정치 참여에 대한 치열한 번민으로 좀 야위어 보였을 때입니다. 

당신께서 “어! 채시라 닮았네?” 하는 말씀으로 어려운 분위기를 풀어주시는데 정작 저로서는 얼른 걱정부터 들었습니다. 저런 노구의 몸으로 다시 정치를 이끌고 재기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두세 시간 가량의 만남을 통해 그런 걱정은 곧 기우가 되었습니다. 신념과 기력이 충만한 대정치인의 면모를 느꼈습니다. 당신께서 지난날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어려운 고비를 넘겼는지 열정적으로 대화를 이끌어가셨습니다. 정의가 이겨야 한다는 당위가 실현되는 것이 너무나 어려웠던 것이 당시 우리의 현실이었습니다. 정의가 아닌 강한 힘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50년을 독점해온 보수 기득권 정당이 계속 집권을 자신하고 있었습니다. 대화에 열중하는 동안 밀린 음식 접시는 당신이 다 비우실 정도로 식욕이 좋으셨습니다. 무엇보다 당시 한 사람의 젊은이에 불과한 저를 건성이 아니라 성의껏 진지한 대화로 대해 주시는 대정치가의 모습은 자석 같은 매력을 발산했습니다. 

그때 결심이 섰습니다. 정의가 이길 수 있다는 당연한 진리를 이루어내야 한다는 순수한 동기로 인생의 대전환을 받아들였습니다. 장래가 불투명하고 어렵고 힘든 야당을 선택한 것은 ‘노력과 정성을 다하면 반드시 정의가 이긴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에서 여성 최초로 서울의 지역구에 도전해 바람을 일으키자고 함께 계시던 정대철 의원님 부부와 함께 의기투합하게 되었습니다. 

2004년 정치 10년째. 지지세력이 갈라진 가운데 치러진 총선에서 저에게도 낙선의 고비가 닥쳤습니다. 유학을 떠나기 전에 퇴임하신 대통령님을 찾아뵈었습니다. 당신께서는 엄마 손이 그리운 아이들을 한 달 이상 떼놓고 고향 대구에 내려가 대선 운동하던 당시를 기억하시며 미안해 할 정도로 자상한 분이셨습니다. 당신처럼 교통사고로 한 쪽 다리가 불편한 남편의 안부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정치적 험로에 맞닥뜨린 제게 스승처럼 무한한 위로와 용기를 주셨습니다. 당신도 총선에서 네 번, 대선에서 세 번 떨어졌다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1년간 유학을 더 연장하기로 하고 도중에 다시 찾아뵈었을 때는 약간 노기를 띠고 계셨습니다. “정치인에게는 자신을 이해하는 지지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지금은 지지세력에게 역할을 할 때”라며 “당장 정치무대로 돌아와야 한다”고 나무라셨습니다. 그러나 길게 보고 한반도 문제의 공부와 연구활동으로 미래를 준비하기로 한 제 계획을 밀고 나갔습니다. 나중에 이해해 주시리라 믿었습니다. 

퇴임 이후 당신께서도 외롭고 힘든 상황이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유리할 때 편승하고 불리할 때 멀리하는 정치인이 아니라 당신의 뜻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발전시켜 줄 수 있는 단 한 사람이라도 그리웠을 것입니다. 외롭고 힘든 상황은 대북송금 특검이나 민주당의 분당 같은 국내 정치뿐 아니라 일생의 철학으로 설계하고 추진한 ‘햇볕정책’의 동요와 후퇴에서도 비롯되었습니다. 급기야 2006년 추석 무렵, 북한의 핵실험으로 햇볕정책이 당시 정부로부터도 외면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 불편한 노구를 이끌고 당신이 직접 나서서 햇볕정책을 지켜야 했습니다. 전국을 순회하면서 강연을 통해 흔들리던 정부를 다시 햇볕정책으로 견인했습니다. 외신을 통해 부시 정부의 대북정책을 질타했습니다. 그해 미국 중간선거에서 부시 공화당은 참패했고, 대북 강경정책이 후퇴하면서 6자회담이 재개되었습니다.

저도 햇볕정책을 지키고 계승하겠다고 나섰지만 미력했던 활동은 다시 생각해도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아! 이제 민족의 고비마다 적확한 진단과 방책이 절실할 때 대통령님이 늘 그리울 겁니다. 한반도에서도 정의가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역사적 정권교체를 이루어냈듯이 평화통일도 반드시 이루어낼 것입니다. 

김대중 대통령님!
어떠한 어려움을 겪더라도 끝까지 노력한다면 정의가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마지막까지 당신의 삶을 통해 보여 주셨습니다. 당신께서 일기에 남기신 대로 “최선을 다하는 삶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그로 인해 역사는 한 걸음씩 앞으로 발전해 나갈 것”입니다.

벌써부터 그리운 김대중 대통령님이시여!
우리들 가슴 속에 영원한 선생님으로 불꽃처럼 살아계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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