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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심의 현정은, 남북경협 재개 ‘물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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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보도문 성과로 이명박 정부 들어 경색된 남북관계 전기 마련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면담을 마친 현대아산 현정은 회장이 8월17일 경기도 파주시 남북출입사무소를 빠져나오고 있다. <김창길 기자>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면담을 마친 현대아산 현정은 회장이 8월17일 경기도 파주시 남북출입사무소를 빠져나오고 있다. <김창길 기자>

이명박 정부 들어 전면 단절의 위기까지 치닫던 남북 관계가 전환 기회를 맞았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10~17일 방북이 잘하면 출발점이 될 듯도 하다. 여기에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와 관련해 김기남 조선노동당 중앙위 비서와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등 북한의 고위급 인사들이 포함된 특사조문단이 지난 21일 서울을 방문, 1박2일 체류하는 등 현재의 대결 구도를 대화 구도로 바꿀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현 회장은 지난 16일 묘향산에서 북한 김정일 위원장과 4시간 동안 오찬을 겸한 면담을 갖고 중단된 금강산관광 등 현 정부 들어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던 남북 경제협력 사안들을 활성화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명박 정부 들어 남측 인사가 김 위원장을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북한측의 경협 재개 의지 확인
합의 사항은 현대그룹과 북한의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가 지난 17일 발표한 공동보도문에 집약됐다. 공동보도문은 △금강산 관광의 조속한 재개와 비로봉 관광 개시 및 북측의 관광에 대한 편의와 안전 보장 △육로통행과 북측 지역 체류 관련 제한 해제 △개성관광 재개와 개성공업지구 사업 활성화 △백두산 관광 개시 △추석 때(10·3) 금강산에서 남북 이산가족 상봉 등을 담고 있다. 남북간 경제협력과 관련된 쟁점들을 망라하고 이에 대한 이행 의지를 확인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비록 당국 간에 체결된 것은 아니지만 이번 합의가 남북관계 경색을 해결하고 대립구도를 전환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란 전망을 내놓는다. 합의 이행을 위해 남북 당국간 협의와 동의가 필수적인 만큼 끊어졌던 당국 간 대화가 재개될 단초가 마련됐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남북경협을 지속시킬 의지가 있느냐’는 의심을 받았던 북측의 경협 지속 의지를 확인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실제 북측은 그동안 정부의 대북 적대시 정책 등을 이유로 남북 경협의 문을 하나하나 닫아왔다. 개성공단 체류 및 통행을 제한하는 ‘12·1조치’를 단행했으며, “6·15(공동선언)를 부정하는 남측에 6·15의 혜택을 줄 수 없다”면서 개성공단과 관련한 기존 계약 무효를 선언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선 “북한이 개성공단에서 근로자가 벌어들이는 연간 3000만달러보다 주민 15만명(근로자·근로자가족)의 사상 오염을 더 우려한다”면서 개성공단 폐쇄를 기정사실화하기도 했다.

그랬던 북측이 이번 공동보도문에서 ‘개성공단 활성화’라는 문구를 적시하고 개성공단 육로통행, 체류제한 해제 조치를 취하는 데 동의했다. 공단 운영에 걸림돌이었던 12·1조치를 거둬들이겠다는 뜻으로, 실제 북한은 이 조치를 지난 21일 해제했다. 또 지난해 7월 박왕자씨 피격사건을 이유로 남측이 중단시킨 금강산관광 재개 의사도 밝혔다. 김 위원장은 현 회장과의 면담에서 유감의 뜻을 표한 뒤 “앞으로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남측이 금강산관광 재개의 전제조건으로 삼은 사과·재발방지 요구를 의식한 발언이다.

현 회장은 귀환 회견에서 “(김 위원장이) 원하는 것 있으면 얘기하라고 해서 다 얘기했다. 그것을 다 풀어줬다”고 말했다. 북한이 경협에 대한 적극 의사를 표출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최소한 이번 합의를 계기로 남북경협 전면 중단 등 최악의 시나리오는 상정할 필요가 없게 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자연스럽게 남북관계가 방향을 틀 수 있는 길도 열렸다. ‘전면대결태세’ 운운했던 북측이 교류협력을 매개로 대화 의지를 타진한 데다 남측도 일단 “긍정 평가”(천해성 통일부 대변인)한다는 입장을 밝혔기 때문이다. 청와대 핵심 참모는 “대화국면으로 넘어갈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도 8·15 경축사에서 남북 ‘고위급 회의’ 설치를 제안한 바 있다. 향후 당국 간 대화가 진행되고, 공동보도문대로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지면서 각종 교류와 경협 사업이 활성화된다면 남북관계는 진전될 수도 있다.

정부는 즉각 공동보도문 합의사항에 대한 이행 여부 검토 등 후속조치에 돌입했다. 비록 당국 간 회담을 통해 결정되지는 않았지만 어렵사리 마련된 남북관계 개선의 계기를 놓치지 않겠다는 게 정부의 기본입장이다. 특히 이산가족 상봉과 금강산 관광 재개 등의 합의문은 절차적 조정이 필요하더라도 원칙적으로 받아들인다는 방침인 것으로 보인다.

정부, 금강산관광 재개 검토 착수
당장 대한적십자사는 8월20일 북한의 조선적십자사에 제17차 이산가족 상봉 개최를 위한 남북적십자 회담을 오는 26~28일 금강산에서 갖자고 제의했다. 한적은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방문단 선정 등 실무 작업에 이미 착수했다. 과거 이산가족 상봉 때 준비기간이 2개월 안팎 소요된 만큼 추석(10·3) 이전에 행사를 개최하려면 회담을 지체할 수 없다는 게 정부측 설명이다. 

2000년 이후 남북 적십자를 통한 이산가족 상봉자는 대면상봉 16차례 1만6212명이며, 2005년 이후 화상상봉(7차례·3748명)까지 포함하면 총 1만9960명이다. 이산가족 상봉행사는 현 정부 출범 이후 남북 당국 대화가 단절되면서 중단된 상태로, “냉전이데올로기에 빠져 1000만 이산가족의 염원을 외면한다”는 비난을 받던 정부로서도 부담스러워 하던 사안이다.

정부는 금강산관광 재개를 위한 검토작업에도 착수했다. 아태평화위와 현대 측이 합의한 ‘추석 이산상봉’ 장소가 금강산이란 점을 감안하면 금강산관광 재개와 이산상봉은 사실상 맞물린 쟁점이란 것을 정부도 안다. 당장 정부는 관광 재개 3대 조건으로 내건 △북측의 사과 △진상조사 △재발방지 등 사안들을 재검토하고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김 위원장이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한 것은 나름대로 뜻이 실린 것 아니겠나”고 했다. 김 위원장의 발언을 사과 및 재발방지 다짐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투다. ‘진상조사’도 당초 당국간 합동조사에서 민간조사도 가능한 진상규명으로 단계를 낮추는 방안을 생각하고 있다.

장용석 평화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금강산에서 이산상봉을 하게 되면 그 지역으로의 통행이 다시 시작된다는 상징성이 있다. 이산상봉이 이뤄진 후에 정부로서도 다시 통행을 중단시키기 어려울 것”이라며 “북측이 이산상봉의 조건으로 금강산관광 재개를 내걸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개성공단 활성화 및 개성·백두산 관광 등 다른 합의사항에 대한 점검에도 들어갔다. 지난달 2일 중단된 개성공단 실무회담의 재개 여부를 검토 중이다. ‘토지임대료 31배, 북측 근로자 임금 4배’ 인상 등 개성공단 계약조건 재조정을 주장했던 북측이 ‘개성공단 활성화’ 의지를 밝힌 만큼 실무회담에 적극적으로 응할 수 있다는 기대가 깔려 있다. 정부는 그동안 세 차례의 실무회담에서 북측의 인상안이 터무니없다며 일축해 왔다.

정부가 추석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남북적십자회담을 제의한 가운데 8월18일 서울 남산동 대한적십자사를 찾은 한 이산가족이 상봉 신청 서류를 확인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가 추석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남북적십자회담을 제의한 가운데 8월18일 서울 남산동 대한적십자사를 찾은 한 이산가족이 상봉 신청 서류를 확인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는 이와 별도로 남북간 현안들을 포괄적으로 논의할 고위급 회담 제안을 검토하고 있다. 북측이 ‘경협 차단’에서 ‘경협 활성화’로 급작스럽게 방향 전환을 한 것에 대한 진의를 확인하고 이대통령이 8·15경축사에서 밝힌 ‘신 한반도 평화구상’도 함께 논의하자는 차원이다. 정부는 한때 그 시기로 당초 2009 을지연습이 끝나는 지난 20일을 염두에 뒀으나 김 전 대통령 서거로 미루는 분위기다. 정부 당국자는 “당국간 대화를 통해 북한의 진정성을 확인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당장 남북관계의 획기적인 전환을 기대하기는 무리다. 곳곳에 장애물이 많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회담의 진행을 위해 필요한 당국 간 신뢰가 전혀 없다. 또 남북 공히 남북관계 개선을 최우선 과제로 여기지 않고 있는 게 사실이다. 우선 북한은 북·미관계 개선을 위해 남북관계 개선을 추진하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북·미관계 개선의 전제조건으로 남북관계 개선을 요구했을 수도 있고, 남측이 북미관계 개선에 방해하는 상황을 우려했을 수도 있다.

남측도 마찬가지다. 남북관계를 우선시한 과거 정부와 달리 현 정부는 동북아 정세 관리의 한 축으로 남북관계를 바라보는 측면이 있다. 국제정치학자인 현인택 고려대 교수를 통일부장관으로 임명한 것만 봐도 그렇다. 또 한·미 공조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남측으로선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 이후 다시 북에 대해 강경해진 미국과 보조를 맞춰야 하는 상황이다. 한마디로 남북관계를 주도적으로 이끌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의지도 약해 보인다.

곳곳에 장애물, 낙관은 금물
게다가 남북이 관계개선의 출발점을 달리 생각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북측은 6·15 공동선언과 10·4선언의 이행을 요구할 것이 뻔하다. “역사적인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에 따라”라고 남북경협사업 조건의 전제로 단 이번 공동보도문에도 북측의 주장이 반영됐음이 틀림없다. 북측이 김 전 대통령 서거를 고리삼아 6·15선언에 대한 이행 의지를 거듭 촉구할 가능성도 있다.
 
남측이 과거처럼 “두 선언의 이행 방안에 대해 논의하자”는 등 모호한 태도를 취한다면 당국간 대화는 시작부터 암초를 만날 가능성이 크다.

반면에 남측은 ‘남북관계 개선의 전제조건=북한 비핵화’라는 원칙이 확고하다. 당장 이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마음을 열고 대화에 나선다면 북한 경제를 발전시키고 북한 주민의 삶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는 국제협력 프로그램 실행 등 한반도의 새로운 평화구상을 추진할 것”이라고 했다. 북한이 ‘정치적 주권침해’라며 반발했지만 이 대통령은 ‘비핵·개방 3000’의 명패만 바꾼 정책을 거론한 것이다. 게다가 정부 내부에선 북측이 무력시위를 멈추고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하는 것에 대해 “대북 압박책이 먹힌 것”(고위 당국자)이라는 생각이 많다. 반면에 북한은 자신들이 ‘핵 보유국’이 됐음을 기정사실화해 줄 것을 요구할 것임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이번 방북을 통해 대화의 여지는 마련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장용석 실장은 “핵과 미사일 문제엔 변화가 없고 국제사회의 대북 압박과 제재는 지속되고 있다”면서 “남북관계는 큰 틀에서는 변화를 기대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장 실장은 “양측간 합의사항이 실무 협의와 당국간 대화가 필요해 그쪽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면서 “작거나 낮은 수준에서 대화가 시작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박형중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최근 북한의 전술적 유화공세와 전세전망’이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남북간의 전략적 대치와 전술적 유화가 공존하는 국면이 도래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남북 당국간 대화가 시작됨을 전제하되 협의 과정이 쉽지 않을 것임을 시사하는 발언이다.

<정치부·이용욱 기자 wood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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