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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플루 안전지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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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로 알 수 없는 지역사회 감염 늘어 ‘가을 대유행’ 공포

신종 플루에 대한 국민행동요령이 발표된 가운데 8월16일 인천국제공항에서 검역관들이 입국한 여행객들을 대상으로 발열감시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신종 플루에 대한 국민행동요령이 발표된 가운데 8월16일 인천국제공항에서 검역관들이 입국한 여행객들을 대상으로 발열감시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팬데믹(pandemic).’ 특정한 전염성 질환이 전 세계로 급속히 확산돼 유행하는 현상을 말한다. 지난 4월 말 미국에서 최초의 감염자 7명이 나온 이후 신종 인플루엔자A(H1N1)가 당초 우려대로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망자를 낳으며 대유행 조짐을 보이고 있다. 국내에서도 두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사망기’에 접어들었다는 분석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기온이 떨어져 독감 환자가 늘어나는 가을이 고비로, “국민 80%가 앓고 난 뒤에야 위험성이 떨어질 것”이라는 공포의 예측까지 나왔다. 보건 당국조차 향후 대유행이 시작되면 2~4개월만에 입원환자가 13만~23만명, 외래환자가 450만~800만명까지 확산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스페인독감과 홍콩독감, 최근의 사스와 조류인플루엔자(AI)에 이은 변종 바이러스인 신종 플루의 대공습이 시작된 것일까.

“방학 동안 아이들 데리고 단기어학연수를 다녀왔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열이 나서…. 그러나 사람이 너무 많네요.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며칠째 고열에 시달리다 왔는데 급한 사람 먼저 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다른 병원을 알려달라고 해도 아는 게 없다고 하니 답답하네요.” “정부에서는 치료 거점 병원을 선정했다고 하지만 발표도 하지 않고 있으니 어디인지도 알 수가 없고, 기다리라는 말밖에 할 수 없는 저희도 미칠 지경입니다.”

8월19일 서울 시흥동 금천구보건소의 풍경이다. 10명 남짓의 여성과 노인이 대기실에 앉아 차례를 기다렸지만 1명당 상담과 검진이 1시간을 훨씬 넘는 바람에 그들은 지쳐 있었다. 저마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지만 혹여 옆자리에 있는 사람이 신종 플루 환자가 아닐까 하는 우려와 의심의 눈빛은 역력했다. 이날 오전 내내 금천구보건소는 검사희망자와 문의 전화로 북새통을 이뤘다.

사망자 발생 후 의심·확진환자 늘어
신종 플루 감염환자가 속출하고 있다. 대전에서 대학생 9명이 신종 플루 양성반응을 나타냈고 안양에선 어린이집 교사와 원생 등 6명이 양성반응으로 나타났다. 수원에서는 종교 수련회에 참가한 7명이 한꺼번에 감염됐으며, 울산에선 군인 9명이 확진 환자로 판명되는 등 집단 감염의 양상을 띠고 있다. 파주 영어마을도 신종 플루 집단감염자가 발생하자 ‘임시휴관’을 결정했다. 인천국제공항에서도 보안요원 등 직원 8명에게서 집단감염 증상이 나타나 방역체계에 구멍이 뚫린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특집]신종 플루 안전지대가 없다

258명의 환자가 양성반응을 보인 20일은 신종 플루 ‘대유행’의 분기점이었다. 지난 18일 처음으로 하루 발생 환자가 100명(108명)을 넘어선 이래 불과 이틀 만에 200명 벽을 훌쩍 뛰어넘어선 것이다. 이로써 8월20일까지 국내 신종 플루 감염자는 2417명으로 늘었다. 이 가운데 2명이 사망하고 573명이 병원과 자택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2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이후 신종 플루 의심환자와 확진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는 추세다. 지난 5월2일 국내 첫 환자 발생 이후 20일 동안은 10명에 불과할 정도였으나 그후 한 달 만인 6월20일 100명을 넘어서고, 한 달만인 7월23일엔 1000명을 돌파했다. 사망자 발생 이전에 평소 100여 건에 지나지 않던 신종 플루 의심 신고건은 이후 8월 18일 621건, 19일 999건 등으로 폭증했다. 감기 증상을 보이고 있는 환자들이 스스로 신종 플루 감염을 의심하면서 급격히 늘고 있는 것이다.

10·11월 대유행 예상, 지역축제 취소 이어
가장 큰 문제는 해외여행과 무관한 ‘지역사회 감염’이 창궐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난 19일 발생한 108명 환자의 감염경로를 조사한 결과 입국자 15명, 확진환자 긴밀접촉자 11명이었고 나머지 82명은 지역사회 감염으로 추정돼 지역사회 감염이 이미 대세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동안 ‘비행기를 탄 사람’으로 감염경로가 한정된 데 반해 경로를 파악할 수 없는 감염자가 급증하고 있다는 분석으로, “자신도 모르는 환자들이 곳곳에서 다른 사람에게 퍼뜨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보건복지가족부에 따르면 신종 플루 지역사회 감염자는 지난 7월10일 강원 지역 어린이집 교사가 처음으로 확인된 뒤 7월25일 316명(27.1%), 8월5일 467명(30.1%), 10일 599명(33.1%), 15일 705명(34.7%), 20일 976명(40.4%) 등으로 급증하고 있다. 이 같은 추세라면 조만간 지역사회 감염자는 1000명을 넘어서고, 확진환자 2명 가운데 1명은 감염경로를 밝히지 못하는 환자로 분류될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신종 플루가 정부당국의 통제선 밖에서 속도를 내고 있다”며 “지역사회 감염자가 늘었다는 것은 예방엔 한계가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고, 치료가 더욱 중요한 상황이 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질병관리본부도 신종 플루의 지역사회 침투가 상당히 진행된 것으로 판단하고 개학과 더불어 환절기가 닥치면 중증환자가 속출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에 따라 각급 학교가 개학을 늦추거나 휴교하는 등 비상조치를 강화하고 있고, 군은 군대로 현역 장병에서 예비군에 이르기까지 신종 플루 예방 활동을 펼치고 있다.

신종 플루가 급속히 확산되면서 전국의 축제나 국제행사가 잇따라 취소되거나 연기되는 등 파행을 겪고 있다. 지난 12일 제주도에서 개막한 제주국제관악제는 국내외 참가자 25명과 진행자 1명이 신종 플루에 감염되면서 조기에 막을 내렸다. 충주시는 9월23~27일 예정이던 제12회 충주 세계무술축제를 취소했다. 행사 참가국 대부분이 신종 플루 환자가 발생한 지역인 데다 참가자들이 합숙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에 감염 우려가 크다는 게 결정 이유였다.
 
전남지역에서도 올 하반기 개최 예정이던 여수 국제청소년축제·영어체험캠프, 고흥 국제스페이스캠프 등 각종 국제행사가 취소되거나 연기됐다.

보건 당국은 향후 신종 플루 팬데믹, 즉 대유행이 시작되면 2~4개월 만에 입원환자가 13만~23만명, 외래환자가 450만~800만명까지 확산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정부도 20일 열린 당정 회의에서 “개학 후 9월 초에 인플루엔자 유행기준에 도달한 후 10, 11월에 유행이 정점에 도달할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개학철을 맞아 신종 플루 확산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서울 시흥동 동광초등학교 2학년의 한 학급에서 빈자리가 눈에 띈다. 학교 측은 외국에 다녀온 학생 중 귀국 후 1주일 동안 증상이 없는 경우에 등교하고 있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개학철을 맞아 신종 플루 확산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서울 시흥동 동광초등학교 2학년의 한 학급에서 빈자리가 눈에 띈다. 학교 측은 외국에 다녀온 학생 중 귀국 후 1주일 동안 증상이 없는 경우에 등교하고 있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이번 신종 플루의 증상은 일반 독감과 거의 흡사하다. 고열이 내려가지 않고 근육통, 콧물, 기침, 인후통 등이 나타난다. 그러나 일반 감기가 하루면 열이 내리는 데 반해 신종 플루의 경우 고열이 오랫동안 지속된다. 정희진 고려대 구로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일선에서 환자들의 증상을 듣고 ‘이 사람이 신종 플루 환자다, 아니다’를 구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서 “신종 플루의 증상과 발생기전이 일반 독감의 그것과 똑같기 때문에 초기에 신종 플루 환자를 가려내기는 매우 힘들다”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정부가 내놓은 대책은 ‘구강체온이 37.8도 이상이며 신종 플루 의심 증상이 보일’ 경우 보건소나 병원에서는 신속항원 검사를 실시한다는 것이다. 신속검사와 확진검사 결과 신종플루 환자로 확인되면 병원이나 보건소의 처방 아래 타미플루를 복용하게 된다. 캡슐 형태의 알약인 타미플루는 하루에 두 번 한 알씩 5일 동안 복용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예방 백신이 국내에서 생산하지 않을 뿐더러 세계적으로도 물량이 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정부가 비축 중인 항바이러스제는 타미플루 199만명분, 리렌자 48만명분 등 모두 247만명분이다. 정부는 오는 12월까지 300만명분을 추가로 확보해 재고량을 타미플루 331만명분, 리렌자 200만명분 등 531만명분으로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지구촌은 지금 ‘백신 확보’ 전쟁 중
그러나 정부의 방침대로 백신이 제대로 확보될지 미지수라는 분위기다. 신종플루 감염자가 전 세계적으로 급증하자 세계 각국이 너도나도 백신 확보에 나서 백신 공급 대란까지 예상되는 상황이기 때문. 국내 백신 생산업체인 녹십자도 연말까지 500만명분, 내년 2월까지 추가로 100만명분의 백신을 생산할 계획이지만 수율이 떨어져 정상적인 공급이 어려울 수 있음을 내비치고 있다. 국내 생산량으로 부족한 부분은 외국에서 들여올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최근 백신 수입가격이 크게 오르는 바람에 책정된 정부예산으로는 수입물량에 차질이 있을 수 있다는 지적마저 나오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지난 18일 북반구의 신종 플루 백신 주문이 10억회 복용 분량을 넘어섰다고 밝혔다. 그리스·네덜란드·캐나다·이스라엘 등은 전체 인구가 두 번씩 접종할 수 있는 분량, 독일·미국·영국·프랑스 등은 인구의 30∼78%에 해당하는 분량을 각각 주문했다고 한다. 신종 플루 치료제 타미플루는 지난 2004년 이후 전 세계에 2억2000만명분이 공급된 바 있지만 이미 사용한 분량을 제외한 재고량은 현재 집계되지 않고 있다.

WHO는 앞으로 2년간 최대 20억명이 신종 플루에 감염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신종 플루 백신 생산은 일부 제약사의 경우 계절 독감 백신 때문에 생산이 지체되는 등 수급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일부 제약업체의 경우 자국 우선공급 원칙을 고수하고 있어 우리에겐 더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최근 유럽질병통제센터(ECDC)는 현재의 환자 발생 추이를 감안하면 다가올 겨울이 끝날 때까지 유럽 인구의 약 30%가 신종 플루에 감염돼 치료가 필요한 환자가 된다는 시뮬레이션 자료를 내놨다. 지구상에 변종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등장하면 인구 10명 중 3명 정도가 새 바이러스의 감염자가 돼야 면역성이 생겨 사람끼리의 교차 감염이 차단되고 확산이 수그러든다는 이른바 ‘30% 룰’을 근거로 한 연구 결과다. 오명돈 서울대병원 감염내과 교수도 “지난 20세기에 있었던 세 번의 신종 인플루엔자 대유행을 보면 전체 인구의 약 30%가 감염됐다”면서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현 단계에서 신종 플루의 치명률은 높게는 0.8%, 낮게는 0.2% 정도이다. 치명률 자체는 그리 높지 않지만 계절 인플루엔자(감염률 10%)보다 3배나 높은 감염률 탓에 인류는 공포에 떨고 있다.

일본 “대유행” 선언, 스페인 “키스 피하라”


[특집]신종 플루 안전지대가 없다

세계 각지에서 신종 플루로 인한 사망자가 급속히 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8월19일 현재 전 세계 신종 플루 사망자 수는 최소 1799명에 이르고, 확진환자는 18만2166명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8월13일까지 사망자가 1462명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일주일도 안돼 300여 명이나 늘어난 것이다. 특히 현재 겨울로 신종 플루가 맹위를 떨치고 있는 중남미에선 희생자 수가 1300명을 돌파했다.

여기에 지금까지 신종 플루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던 중동의 쿠웨이트와 남태평양의 뉴칼레도니아 등지에서 잇따라 사망자가 생기고 있다. 쿠웨이트 보건부는 19일 중증 폐렴을 앓아온 젊은 남성이 신종 플루로 인해 쿠웨이트에서 최초로 목숨을 잃었다고 발표했다. 앞서 쿠웨이트 정부는 지난 13일 쿠웨이트 내 신종 플루 감염자 수가 740명에 이른다고 설명했다.

프랑스 해외 자치령인 뉴칼레도니아 보건국도 19일 8세 여자 어린이가 신종 플루 증세로 입원한지 이틀 뒤인 17일 숨졌다고 밝혔다. 뉴칼레도니아에선 전체 인구의 약 8%에 해당하는 2만명이 지난 6월 이후 신종 플루에 감염됐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종 플루는 특히 현재 겨울인 중남미에서 1300여 명이나 사망하는 등 맹위를 떨치고 있다. 아르헨티나 404명, 브라질 368명이 사망했고 신종 플루 발원지인 멕시코(164명)와 칠레(105명)도 사망자가 각각 100명이 넘었다. 이 밖에 페루(62명),파라과이(39명),코스타리카(28명) 등에서도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전 세계적으로는 미국이 477명으로 가장 많은 신종 플루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웃 일본에서도 세 번째 신종 플루 사망자가 발생하자 국가전염병 대응 수준을 ‘대유행’ 단계로 높였다. 지난 15일 오키나와에서 첫 사망자 발생 이후 사흘 만인 18일에는 고베, 19일에는 나고야에서 각각 사망자가 발생하자 전 국가적으로 대책에 나선 것이다. 일본의 사망자 역시 모두 해외에 나간 적이 없는 지역감염자로, 직접 사인은 중증폐렴이었다. 일본 국립감염증연구소는 현재까지 일본 내 신종 플루 환자 수는 총 6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중증환자가 속출하고 있어 사망자는 더 늘 것으로 예상하지만 이를 억제할 만한 뚜렷한 대책을 찾지 못하고 있어 일본 보건 당국은 고민에 빠져 있다.

8월16일 현재 집계된 신종 플루 감염자가 1만4000명, 사망자가 12명으로 늘어난 스페인에선 ‘키스 자제’를 외치고 있다. 스페인 보건부는 키스를 피하고 다른 사람과 같은 물컵을 사용하지 말 것을 권장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신종 플루 예방지침을 발표한 것. 스페인 성직자들은 이와 별도로 신도들에게 상대방과 인사할 때 악수하는 대신 머리를 끄덕이도록 권고하고, 성수반에 손가락을 담그는 것도 위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조득진 기자 chodj2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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