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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가치’ 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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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개혁·혁신의 시대정신으로 역사 변혁 모티브로 싹터

2004년 5월 헌법재판소의 탄핵 기각으로 직무에 복귀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 <청와대 사진기자단>

2004년 5월 헌법재판소의 탄핵 기각으로 직무에 복귀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 <청와대 사진기자단>

‘노풍’이 불고 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죽음이었고 추모 열기 또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규모다. 대다수 조문이 자발적으로 이뤄진 점, 백범 김구 선생 국민장과 박정희 전 대통령 국장 때 추모 인파가 각 200만 명이었던 점 등을 감안하면 이번 추모 열기는 가히 국가적인 규모라 할 수 있다.

권위주의적 이명박정부와 대비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 전직 대통령에 대한 단순한 연민 때문이라면 추모 열기가 이렇게 뜨겁지는 않을 것이다. 국민의 가슴을 울리게 하는 무언가 있는 것이다. 어쩌면 알았지만 잊었던, 아니면 몰랐던 ‘노무현의 가치’에 대한 성찰일지도 모른다. 추모 행렬 속 시민들은 소리 없이 외친다.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세상, 노무현 당신의 꿈이 우리의 꿈이 되었습니다” “당신이 그립습니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합니다”라고.

그렇다면 이 같은 폭발적인 추도의 사회적 의미는 무엇일까. 연세대 김호기 교수는 “‘인간 노무현’과 ‘시대정신으로서 노무현’에 대한 그리움이 예기치 않은 죽음으로 폭발한 것”이라면서 “최근의 권위주의적이고 시장만능주의인 이명박 정부의 국정 운영과 비교해보면서 그 그리움이 더욱 간절해진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평론가 황태순씨도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 슬픔을 안다”면서 “그 슬픔은 목숨을 지켜주지 못한 데 대한 부채의식으로 확장되고 더 나아가 ‘노무현 유산’을 계승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노무현에 대한 부채의식은 그의 정책이라기보다 그의 정신에서 비롯한 것이다”면서 “이 같은 ‘노무현 정신’에 대한 사회적 공론화가 가능하게 된 것은 극적이고 충격적인 죽음에 의해 노무현의 이념·정책·인간적인 허점이 묻힌 것도 한 이유가 됐다”고 지적했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부채의식 속에는 일종의 저항감이 깔려 있다. 기득권층의 양면성에 대한 거부감, 이명박 정부의 국정 운영과 방식에 대한 회의감 등이 그것이다. 성공회대 정해구 교수는 “이명박 정부는 국민이 생각하는 정의, 상식과 상당한 괴리가 있는 법치주의를 중요한 통치술로 전면에 내세웠다”면서 “여기에 주눅들고 억눌린 국민들이 분노감을 표출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은 비통함과 안타까움 속에서도 또 하나의 새로운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셈이다. 그동안 민주당 분열과 계파 갈등의 원인으로 노 전 대통령을 지목하며 목소리를 높여온 민주당 의원은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애정이 놀랍기만 하다”면서 “추모 열기는 곧 정치권에 국민화합과 지역구도 타파를 위해 노력해달라고 주문하는 것이 아니겠냐”고 반문했다.

대중참여정치 실험 터전 마련
‘노무현의 정신’과 그의 가치는 무엇인가. 노 전 대통령이 기치를 내걸고 실험했던 것은 참여민주주의다. 참여민주주의 확대는 노 전 대통령의 정치실험의 목표이기도 했다. 김민전 경희대 교수는 “3김시대까지 한국은 ‘가부장적 민주주의’였다”고 말했다. 가부장적 민주주의에는 ‘참여’가 없다. 참여의 핵심은 자발성이다. 노무현 정권의 창출 및 집권 과정에서는 참여를 쉽게 목격할 수 있다. 홈페이지 개설, 인터넷 커뮤니티 설립, 촛불시위, 즉석 번개팅, 인터넷 생중계 등 다양한 방식이 출현했다. 권위주의 시대의 대중 참여 방식인 격렬한 계급투쟁·반독재투쟁과 전혀 다른 분위기다. 선거운동원 동원 같은 것은 과거의 유물이 되어 버려졌다. 국민들은 촛불을 들고 자기의 주장을 당당히 외칠 수 있었다. 참여는 약자의 특권이 되기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10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정상회담 1차 회의를 마친 뒤 걸어나오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10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정상회담 1차 회의를 마친 뒤 걸어나오고 있다.

이것은 노무현 정권의 ‘대중 참여정치’를 실험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다. 대중 참여정치의 본질은 사회 중심 구조에 대한 개혁과 변혁을 위한 것이었다. 또 다른 민주당 의원은 “노 전 대통령의 자기 희생과 도덕적 결벽성에 대한 국민적 기대가 국민의 정치 참여를 폭발시켰다”면서 “가치의 변화와 지배 엘리트 교체를 위한 ‘소리없는 혁명’이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노무현 정권의 또 다른 실험은 시민사회단체와 연계였다. 노무현 정부는 진보적 시민사회단체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 이는 대의민주정치를 보완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치학 교과서에 “대의민주주의가 정책 산출 과정이라면 참여민주주의는 정책의 투입 과정”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정책투입 수단은 ‘위원회’였다. 시민·사회단체가 각종 위원회를 통해 그들의 의견을 정부 정책에 반영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의 실험은 성공하지 못했다. 위원회는 많았지만 역할은 상대적으로 미미했다는 뜻에서 나온 ‘위원회 공화국’이란 말이 이를 대변한다. 김민전 교수는 참여의 확대에 대해 긍정적 부분을 인정하면서도 “누가 참여하느냐도 매우 중요한 문제다. 이해집단인 사회단체를 참여시킴으로써 정작 국민을 소외시킨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정치 참여 부분이나 대기업 관련 규제 및 환경운동 등에서 시민사회단체의 활약은 두드러졌다. 그러나 실행한 정책 결과를 두고는 평가가 후하지 않다. 서강대 손호철 교수는 “노무현 정부는 한때 ‘(이라크)참전정부’라는 비난을 받지 않았느냐”고 기억을 되살리면서 “다소 구호에 그친 측면이 있으며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해 나온 정책 중 의미 있는 결과를 가진 정책이 별로 없다”고 말했다. 그는 행정수도 이전을 예로 들면서 “이 역시 정략적 선거공약이었다”고 단정했다.

물론 실패의 원인은 있다. (정책의) 투입과 생산이 끊임없이 피드백하면서 보완·수정의 과정을 거치지 못했다. 노 전 대통령의 능력은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여론 수렴의 몫은 정당이다. 노 전 대통령은 호남 정당 소속의 경상도 대통령이다. 당내 세력이 없었다. 결국 민주당에 얹혀 더부살이하는 꼴이었다. 이 같은 태생적 한계가 그가 주도한 개혁에 걸림돌이 된 측면이 있다. 이 때문에 보수 일각에서는 “진보적 시민사회단체가 ‘짝퉁 진보주의자’인 노 전 대통령을 업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어떻든 참여민주주의 확대는 노 전 대통령의 정치 실험의 본질이었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노 전 대통령은 평생을 비주류로 살다가 서거했다”면서 “비주류로서 기득권 중심의 사회구조를 개혁·혁신하려는 끊임없는 실험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그런 노력이 지역주의 타파나 정경유착 근절로 나타난 것일 수도 있고 정치 개혁으로도 나타난 것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상식과 원칙 통하는 사회 구현 투쟁
신 교수가 언급한 지역주의 타파나 정경유착 근절을 노 전 대통령의 업적으로 평가하지 않는 이는 드물다. 권력기관을 중립화하고 권위주의를 청산하려고 했다. 권력기관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도 않았다. 책임총리제도 도입했다. 정치자금 투명화도 있다. 또 지역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공기업 이전과 기업·혁신도시를 지정하기도 했다. 지역주의를 타파하기 위한 지방도시 개발에 대해서는 비판적 시각이 지배적이긴 하다. 손호철 교수는 “토건국가적인 지방 개발 위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함으로써 진정한 주민을 위한 정책이 되지 못한 점은 아쉽다”고 말했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도 “카드대란 위기에서 경제 관료에 끌려가다가 뒤늦게 기업·혁신도시와 같은 클러스터 플랜을 제시했지만 그마저도 한·미 FTA를 추진하면서 지역균형발전이란 ‘노무현 브랜드’조차 평가받을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김상조 교수는 또 “노무현 정부가 소통과 참여를 중시하는 기본적 마인드는 갖고 있었다”고 인정하면서도 “하지만 그 기조를 체계화하고 정책에 반영할 수 있는 플랜을 마련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정책의 일관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한나라당과의 연정 같은 예측불허한 정책을 추진하고 친재벌적 정책으로 간주되던 한·미 FTA를 체결한 것 등이 그 예다. 이 때문에 노 전 대통령은 ‘인기영합주의’라는 공격을 받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5일째인 5월 27일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에 마련된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를 찾는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5일째인 5월 27일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에 마련된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를 찾는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하지만 노무현의 정신과 가치가 정책의 성패에 있지 않다는 평가도 나온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지도력 구현을 통해 상식과 원칙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그의 눈물겨운 투쟁에 있다는 것이다. 또 시대적 흐름을 읽어내고 그 시대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타협하지 않는 그의 원칙에 있다는 말도 있다.

실제로 그는 3당통합에 야합하지 않았다. 지역주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런 측면에서 노 전 대통령은 살아서 한국의 민주주의를 ‘진보’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노 전 대통령의 측근은 “고인은 아무 것도 없이 정치를 했기 때문에 잃을 것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면서 “그런 헝그리정신을 기초로 한 민본적 정치철학이 그를 다시 평가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은 역사 변혁의 모티브가 될 것 같다. ‘노무현 정신과 가치’에 담긴 귀중한 유산을 계승하기 위한 작업이 이뤄지고 있어서다. 추도 분위기 속에서 정당·단체들은 물론 사회 각계에서 노 전 대통령과 참여정부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정세균 민주당 대표는 “정치 개혁과 국민통합 등 노 전 대통령의 가치를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은 조만간 재평가를 위한 테스크포스팀을 구성할 예정이다. 한나라당 정몽준 최고위원도 “새 정치를 추구했던 노 전 대통령의 순수한 열정과 취지가 사회에서 잘 이해되고 교훈이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비판 일색이던 한나라당 내에서도 종전과 사뭇 다른 인식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죽은 제갈공명이 산 사마중달을 격퇴시킨 중국 고사가 연상된다.

<김경은 기자 jj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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