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네기 리더십

근로조건 좋으면 열정은 배가된다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아시아의 빌 게이츠’ 김윤종 SYK글로벌 회장 성공 신화

김윤중 SYK글로벌 회장이 5월 13일 노보텔호텔에서 열린 한국카네기연구소의 월례조찬간담회에서 ‘위기의 한국 변해야 산다’는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한국카네기연구소 제공>

김윤중 SYK글로벌 회장이 5월 13일 노보텔호텔에서 열린 한국카네기연구소의 월례조찬간담회에서 ‘위기의 한국 변해야 산다’는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한국카네기연구소 제공>

'아시아의 빌 게이츠’로 불리는 김윤종 SYK글로벌 회장(60)이 5월 13일 서울 노보텔호텔에서 강연했다. ‘한국카네기연구소 조찬간담회’에 초빙강사로 초청된 것이다. 김 회장은 미국에서 벤처사업의 성공으로 억만장자가 됐다. 미국에서는 스티븐 김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강연에서 뜻밖에도 그는 아직도 ‘돈 욕심’을 거론했다. 더 벌자는 게 아니라 잘 쓰자는 희망을 피력한 것이다. 김 회장은 “젊은이에겐 버는 돈이 자기 돈이지만 나이든 사람에게는 쓰는 돈이 자기돈”이라고 말했다. 그는 ‘꿈·희망·미래재단’을 만들어 돈 쓰는 재미를 톡톡히 느끼고 있다고 한다. 이 재단의 목표는 돈이 없어 공부를 못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는 것이라고 한다. 재단은 한국과 북한, 중국 옌볜지역의 학생들에게 경제적·사회적 지원을 주로 하고 있다.

미국서 주경야독으로 대학원 졸업
돈을 벌기가 얼마나 힘든지, 또 그 돈이 얼마나 소중한지 체험적으로 터득한 사람이 돈을 잘 쓸 줄 안다. 그는 돈이 인간을 얼마나 황폐화시키는지 경험한 사람이다. 그의 부친은 사업에 실패했다. 오죽했으면 고립무원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을까.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던 상황이 바로 이민의 이유였다. 젊은이 김윤종은 그래도 꿈이 있었다. ‘가난한 사람은 책으로 부자가 된다’는 얘기가 있다. 그는 미국에 가자마자 무작정 야간대학원에 입학했다. 낮엔 시간당 2달러75센트를 받으며 자동차 부품 도매상에서 궂은 일을 했다. 주말에도 쉬지 않았다. 어려울수록 공부에 더 매진했다. 3년 만에 대학원을 졸업한 뒤 방위산업체인 리튼데이터시스템(Litton Data System)사에 취직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존재감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이 회사의 기계부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꼈다. 김 회장은 “남보다 앞서고 싶었다”면서 “중소기업인 팔로옵테컬시스템디비전(Phalo Optecal System Division)으로 옮긴 게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다”고 말했다. 당시는 광케이블 개발로 ‘2차 통신혁명’이 진행 중이었다. 준비한 사람에게 변혁기는 곧 기회다. 책임연구원으로 일하면서 기술개발은 물론 생산·영업·제품 사후관리·마케팅·교육 업무에도 관여했다. 회사의 운영 시스템을 파악하고 익혔다. 김 회장은 거기에 머물지 않았다. 시장의 판도와 경쟁사에 대한 연구도 꾸준히 했다. 그것이 창업에 대해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던 원천이다.

미국에서 Xylan를 경영할 당시의 김윤종 SYK글로벌 회장.

미국에서 Xylan를 경영할 당시의 김윤종 SYK글로벌 회장.

그는 홀로 1년간 차고에서 제품 개발에 매달렸다. 그 뒤 30명에게 30만 달러를 투자받아 파이버먹스(Fivermux, 1984년)를 창업했다. 그러나 생각처럼 만만치 않았다. 고객들에게 오직 논리와 상식만 갖고 달려갔다.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달라. 요구대로 만들어내겠다’며 시제품을 소개했다. 첫 수주는 미항공우주국(NASA)연구소에서 10만 달러를 받은 것이다. 창업 첫 해부터 흑자를 냈다. 1990년 회사는 5000만 달러 규모로 성장했다. 매년 20% 이상 성장을 거듭해온 것이다. 매각 제의도 적지 않게 왔다. 하지만 김 회장은 ‘실적(Track Record)’이 없었다. 경쟁사의 흔들기 작업도 전개됐다. 회사 가치를 떨어뜨리기 위한 것이다. 나스닥에 등록해야 할 시점이라는 판단이 섰다. 공개시장에 등록하면 지속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주가가 폭락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운이 좋았다. 때마침 중동전쟁이 터졌고 그 즈음에 ACD텔레콤에서 매각 제안이 들어왔다. 초기 투자의 25배 가격으로 매각을 결정했다. 주주들은 ‘김 회장이 잘 하고 있다’ ‘당신이 나의 인생을 바꿨다’고 칭찬만 했지 어떤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 역시 인력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심지어 이익금을 고스란히 은행에 예치해뒀다. 만일 이 돈을 재투자했다면 25배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많은 투자수익을 올렸을 것이라는 게 김 회장의 회고다.

그는 “당시 미국인들은 한국 사람을 보면 보신탕과 판문점 도끼만행만 얘기하던 시절이었다”면서 “그들이 내 말을 듣게 하기 위해서는 더 열심히 일해야 했다”고 말했다. 회사가 성장 궤도에 올라섰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는 ‘부유한 노예’(US 버클리 대학 로버트 라이시 교수가 정의한 현대인)에 지나지 않았다. 주주들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휴일도 없이 일에 매달렸다. 결과적으로 ‘주주가치 보호’를 기치로 일한 게 자신에게도 ‘성공과 부’를 가져다줬다.

1990년 초반 IT 붐 ‘제2의 창업’
또 다른 기회가 왔다. 1990년 초반 IT 붐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변화였다. PC 상용화가 시작된 것이다. 그는 컴퓨터 네트워킹의 중요성에 주목했다. 다른 제품들과 차별화된 최첨단 제품을 만들고 싶었다. 제2의 창업을 결심했다.

이미 축적된 투자실적(Track Record)은 수많은 투자자들을 몰고 왔다. 1993년 자일란(Xylan)을 설립했다. 역시 비즈니스는 경험이다. 파이버먹스 창업 때와 전혀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좋은 인재를 뽑기 위해서 무려 500만 달러를 썼다. 미국 근로자의 법정근로시간은 주당 40시간이다. 그러나 자일란은 60시간 근무를 계약조건으로 내세웠다. 스톡옵션도 제시했다. 직원의 열정을 끌어내기 위한 전략이었다. 열정은 능률을 배가시킨다. 200%까지도 가능하다는 게 김 회장의 생각이다. 능력의 50%만 발휘하는 네 사람 몫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김 회장은 이를 ‘50 대 200의 법칙’이라고 이름붙였다. 능력의 200%를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은 늘 솎아냈다. 대신 김 회장은 솔선수범했다. 골프도 치지 않았다. 왕복 이틀이 소요되는 동남아 국가 출장은 금요일 밤에 떠났다. 또 이 회사에는 정례회의가 없다. 수시로 요구가 있을 때 스탠딩 미팅을 하면서 명확한 가이드라인과 업무의 우선순위를 결정했다. 또 작업 과정에 생기는 문제는 즉시 해결했다. 하루에 20~30개의 문제점을 해결했다. 김 회장은 이를 ‘문호개방정책(Open the door Policy)’이라고 명명했다.

자일란은 전 세계 60개 도시에 판매지사를 설립하고 출범했다. 그만큼 제품 개발과 시장성에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기업 목표를 세계화에 둔 게 ‘무리한 투자’를 한 원인이 됐다. 창립 첫해에 3000만 달러 가치의 회사가 됐다. 이듬해는 1억 달러로 가치가 높아졌다. 그 이후에도 매년 20~30%의 고속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1996년 3월 드디어 나스닥에 진출했다.

주당 상장 가격은 26달러였다. 하지만 상장 당일 폐장 가격은 무려 54달러였다. 회사가 성장을 거듭하면서 고속 성장에 대한 부담도 커졌다. 그런 상황에서 프랑스 알카텔로부터 20억 달러에 매입하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회사를 매각하자 창업 초기 투자자들은 100배 이익을 거뒀다. 김 회장은 두 번의 창업과 기업을 운영했던 15년(60분기) 동안 매분기 성장목표치를 초과 달성하는 신화를 이어왔다. 그는 지난해 한국으로 영구 귀국, 창투회사인 SYK글로벌을 창립해 운영하고 있다.

<김경은 기자 jjj@kyunghyang.com>

바로가기

주간경향 댓글 정책에 따라
이 기사에서는 댓글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