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노년의 문화활동 ‘즐거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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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가수 모여 유랑극단 공연… 영화감독·배우·PD 등 활약도

뽀빠이 이상용씨와 1950~70년대를 달군 원로 가수들이 다른 노인들을 위문하기 위해 결성한 ‘뽀빠이유랑극단’.

뽀빠이 이상용씨와 1950~70년대를 달군 원로 가수들이 다른 노인들을 위문하기 위해 결성한 ‘뽀빠이유랑극단’.

지난 5월 4일 서울 충무아트홀 대극장 분장실. 1950~70년대를 화려하게 수놓던 낯익은 멋쟁이 원로 가수들이 무대의 막이 오르길 기다리며 담소를 나누거나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고치고 있다. 오랜만에 대형 무대에 서는 그들의 얼굴은 설렘과 기대로 한껏 상기돼 있다. 이날은 뽀빠이 이상용씨(65)가 원로 가수 24명으로 결성한 ‘뽀빠이유랑극단’이 처음 공연하는 날이다. ‘호수의 소야곡’의 안다성씨(80), ‘기타부기’의 윤일로씨(80), ‘뜨거운 안녕’의 쟈니리씨(73), ‘여고시절’의 문정선씨(61) 등 왕년의 톱스타와 박찬일악단이 뽀빠이유랑극단의 멤버다. 단장 이상용씨는 “뽀빠이유랑극단은 전국의 노인들을 위문하기 위해 지자체의 후원을 받아 무료 순회공연을 하는데, 국내 각 지역은 물론이고 미국, 캐나다, 일본, 브라질 등 해외 공연도 할 계획”이라고 소개했다.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잘 알려진 명국환씨(77)는 “1953년부터 가수생활을 했는데 지금 당시 함께 활동한 가수가 몇 안 남은 상태에서 유랑극단이 생겨 가슴 벅찬 감동을 느끼고 있다”고 소감을 피력했다. ‘청실홍실’ 등 1950년대에 드라마와 영화 주제곡을 많이 부른 안다성씨는 “17년 전까지만 해도 나이트클럽, 카바레 무대에 섰지만 이렇게 정식 무대에 선 것은 30년 만”이라며 “극단의 연락을 받고 감개무량했는데, 우리와 같이 활동이 뜸한 원로 가수들에게는 이런 좋은 무대가 생기고 관객이 될 노인들에게는 위안을 줄 수 있어 기쁘기 한량없다”고 말했다.

지자체 후원 받아 무료공연 나서
전 세계적으로 고령층이 증가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말 현재 우리나라의 65세 이상 인구 비중은 9.5%로 이미 고령화시대에 진입했고, 2026년이면 20%를 웃돌아 유엔이 정한 ‘초(超)고령화 사회’에 돌입할 전망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노인은 철저히 소외돼 있다. 노인은 기력이 없는 연약한 존재고 젊은이들이 부양해야 할 버거운 짐의 이미지로 자리매김해 있다. 생산·창조의 이미지와 가장 거리가 먼 집단으로 인식돼왔다. 특히 문화를 생산하고 향유하는 데 노년층은 왕따당해왔다. 이 같은 노년의 이미지 매김은 TV드라마의 영향도 크다.

하지만 최근 들어 문화 주체로 맹활약하는 활기찬 노인이 늘고 있다. ‘뽀빠이유랑극단’ 등 왕년의 스타들이 모여 다른 노인들을 위한 위문공연을 펼치는 것 못지않게 일반 노인 중에서도 문화예술 활동으로 제3의 인생을 즐겁게 살고 있는 사람이 꽤 있다.

탑골문화예술학교 인기 높아
경찰공무원 출신 마임 배우 최형하씨(84)도 그중 한 사람이다. 서울노인복지센터에 운영 중인 탑골문화예술학교 프로그램 중 하나인 마임을 지난해부터 수강한 게 계기가 돼 지금은 마임 배우로 무대에 자주 선다. “한국전쟁 이후 55년간 취미로 한국무용과 현대무용, 탈춤을 췄어요. 해외공연도 했고요. 춤처럼 마임은 일반 연극처럼 대사를 외울 필요 없이 몸으로 연기하는 거니까 노인들에게 제격이라고 판단했지요. 그동안 허리우드 극장과 대학로에서 공연을 두 번 했는데, 아주 행복했어요.” 최형하씨는 두 번의 마임 공연에서 주역으로 무대에 섰다. 춤으로 다진 동작의 유연함과 무대 경험이 단연 그를 돋보이게 한 것이다. 3년 전부터 노인보건소에서 호스피스자원봉사활동도 하고 있는 그는 “흔히 노인들은 가족들에게조차 푸대접을 받는 신세지만 나는 나를 사랑하고, 나의 지식과 경험을 생산적으로 활용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건강하고 행복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며 “다른 분들도 우두커니 앉아만 있지 말고 뭔가 배우고 활발히 활동하고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남은 인생을 지혜롭게 살면 좋겠다”고 말했다.

마임 배우 최형하씨가 공연하는 모습(왼쪽)과 다큐감독으로 새 인생을 살고 있는 조경자씨.

마임 배우 최형하씨가 공연하는 모습(왼쪽)과 다큐감독으로 새 인생을 살고 있는 조경자씨.

지난해 제1회 서울노인영화제에서 <꼬마사장님과 키다리 조수>라는 18분짜리 다큐영화를 출품, 각본상을 받은 조경자씨(82)도 밝고 힘찬 노년을 살고 있다. 평범한 주부로 살다가 증손자까지 본 뒤인 2002년, 무료 스포츠댄스 강습을 받으러 서울노인복지센터에 갔다가 영상아카데미 모집 공고를 본 게 계기가 돼 영화감독이 됐다. 이곳에서 그는 6㎜ 디지털카메라 작동법을 배웠고 이를 기반으로 지금까지 <산부인과> <언제나 청춘> <한옥예찬> <꼬마사장님과 키다리 조수>, 모두 4편의 다큐영화를 완성했다. 직접 연출과 각본, 내레이션, 편집까지 한 작품들이다. 기초생활보호 수급으로 생활하고 있지만 그는 “돈이 없다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죽기만 기다리는 인생이 될 뿐”이라고 말했다. “다큐전문감독으로서 세상의 보석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꿈’이라고 밝히는 그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김영민 서울노인복지센터 문화복지팀장은 “탑골문화예술학교는 마임, 연극, 영상미디어, 난타, 라디오방송국반 등 모두 6개 전공으로 돼 있으며 입학생 총 정원이 100명인데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인기가 높아 정원이 금방 찼다”며 “문화산업에서 소외돼온 노인들이 문화생산 주역으로 나설 수 있도록 지식과 기술, 가치를 섭렵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게 문화예술학교의 목적”이라고 소개했다. 김 팀장은 또 “노인들도 젊은이들 못지않게 지식 습득과 창작, 사랑에 대한 욕구가 왕성하고 다양하다”고 덧붙였다.

방송 분야는 그동안 노년에 대해 전반적으로 호의적이지 않았던 게 사실. 실제로 보건복지가족부가 만든 ‘2008년 저출산 고령화 방송 모니터 상반기 보고서’에 따르면 노년 인구를 다룬 방송 빈도수는 매우 적을 뿐 아니라 노인을 사회경제적 부담이 된다는 등 부정적으로 묘사해 시청자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런 환경 속에서도 방송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노인의 수는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 공중파 라디오방송의 대표적 노인전문 프로그램으로 각각 18, 9년 동안 장수해온 SBS라디오<언제나 마음은 청춘>(토요일 제외하고 월~일 05:05~ 05:40)과 KBS라디오 <출발 멋진 인생>(월~일 14:05~15:00)에 대한 노인층의 반응은 뜨겁다. SBS라디오 <언제나 마음은 청춘>을 15년 동안 진행해온 유영미 아나운서는 “새벽에 방송하다 보니 공직 등에 계시다가 은퇴 후 경비원으로 일하시는 분들이 진솔한 사연을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으로 수없이 보내온다”며 “처음에는 60대 이후 청취자를 타깃으로 했지만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노년층뿐 아니라 노인에 대한 그 가족들의 인식 변화도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아들, 며느리가 포함된 중장년 이상이 들을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새단장했다”고 밝혔다. 유 아나운서는 또 “노인이 되기 전까지는 대다수 사람이 자신도 언젠가 늙어 노인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두려움 탓에 애써 외면한다”며 “젊음은 젊음 그대로, 늙음은 늙음 그대로 가치가 있는 것이고 그 가치를 아는 사람만 그 나이가 되었을 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이 깨달았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KBS라디오 <출발 멋진 인생>의 권은정 작가의 말도 크게 다르지 않다. 권 작가는 “노인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노년층에 대한 사회 인식의 변화와 노년 스스로 인식 변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느낀다”며 “이를 위해서는 방송의 역할이 상당히 크다고 판단한다”고 피력했다.

노년의, 노년에 의한, 노인을 위한 방송
지상파 방송은 아니지만 지난해 개국한 노인들을 위한 라디오방송국 인터블루는 작가부터 DJ, PD, 그리고 엔지니어까지 모두 노인이 이끄는 실버 라디오방송국으로 주목받고 있다. 관악노인종합복지관이 관악FM과 협약해 운영하는 이 방송은 관악FM(100.3㎒) 전파와 인터넷(www.radiogfm.net)를 통해 들을 수 있다. 이 방송의 간판 프로그램은 ‘행복한 라디오 쾌지나 청춘’. 노인이 공감하는 이야기와 음악으로 구성돼 있다.

<행복한 라디오 쾌지나 청춘>의 수요일 진행자인 이동은, 김운경씨((왼쪽)와 SBS <마음은 언제나 청춘> 진행자인 유영미 아나운서.

<행복한 라디오 쾌지나 청춘>의 수요일 진행자인 이동은, 김운경씨((왼쪽)와 SBS <마음은 언제나 청춘> 진행자인 유영미 아나운서.

‘노년의, 노년에 의한, 노년을 위한’ 방송은 6월께 전주에서도 개국할 예정이다. 전주 양지노인복지관이 만드는 인터넷방송으로 기획에서 원고, 촬영, 편집, 그리고 인터넷 송출까지 모두 노인이 한다. 이 방송에서도 노년을 위한 각종 정보와 문화예술, 오락을 노년의 기호와 취향에 맞춰 제공할 계획이다.

지난해 말 국내에서도 개봉한 스티븐 월커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로큰롤 인생>(원제 Young@Heart)은 평균 나이 81세의 실버밴드의 이야기를 다뤄 전 세계적으로 잔잔한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1982년 동네 노인들의 사소한 노래모임으로 시작해 유럽과 캐나다, 호주 등 세계 각국을 순회하며 공연한 로큰롤밴드다. 암세포에 공격당하는 등 노년기 육체에 찾아오는 각종 질환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인생 그 자체를 즐기는 주인공들의 유쾌하고 유머러스한 모습이 인상적인 이 영화가 던져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비록 세월의 흐름과 함께 육신은 늙고 병들어갈지언정, 마음만은 누구나 자신의 인생을 한껏 즐기고 싶은 푸른 청춘이라는 게 아닐까.

노인 전용 영화관·라이브카페 아세요?

영화관에 가면 으레 10~20대 젊은이 일색이다. 그러다 보니 대다수 상업영화가 이들 젊은이들을 타깃으로 만든다. 당연히 노인들은 영화관에 가고 싶어도 어색함 때문에 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서울 탑골공원에 시간적으로 여유가 많은 노인들이 모이는 것은 그만큼 노인을 위한 오락물이 없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하지만 올 1월 노인전용영화관이 서울 종로 낙원동에 문을 열었다. 서울시가 기존 허리우드 극장의 한 관(300석 규모)을 노인전용영화관으로 개설한 것이다. 오전 10시 30분, 낮 12시 30분과 2시 30분, 이렇게 하루 세 번 상영하는데, 57세 이상에는 2000원의 관람료만 받는다. 김은주 허리우드 극장 대표는 “지금 한국의 노인들은 과거에는 전쟁과 가난으로 영화를 보고 싶어도 보지 못했던 세대”라며 “하지만 경제적 여력과 시간이 허락되는 지금도 젊은이들에게 위축돼 영화관을 찾지 못하는 현실에서 오랜 세월 동안 앞만 보고 달려온 60~80대 노년층이 마음 편하게 영화를 볼 수 있도록 서울시에 노인전용극장으로 허리우드 극장을 활용하자고 제안했다”고 밝혔다.

그동안 이 극장에서는 <벤허> 등 흘러간 명화와 최근 히트 영화들을 상영했다. 또 매주 일요일 오후 4시 30분에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로마의 휴일> 등 추억의 명작들을 무료 상영하고 있다.

서울 종로3가 국일관 2층에는 올초 실버라이브카페 ‘로맨스 파파’가 문을 열고 성업 중이다. 1960~70년대 인기를 누린 원로 가수 9명이 번갈아 출연하는데, 입장객은 60세 이상으로 한정하고 있다. ‘노란샤스의 사나이’의 한명숙, ‘추풍령’의 남상규, ‘야생마’의 김하정, ‘전화통신’의 남백송,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의 박건 등이 고정 출연하고, 원로 코미디언 홍해 남춘과 이미테이션 가수 너훈아도 출연한다. 메뉴는 6000원짜리 식사와 간단한 주류지만 990여㎡(300여 평) 크기의 400석 좌석은 평일에도 발디딜 틈이 없다. 멀리 지방에서도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노인이 많다고 한다.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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