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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라 누리꾼들, 인터넷 집단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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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인터넷 여론 통제 맞선 자구책
해외서버 구축·콘텐츠 확보 방안 논의

[커버스토리]아고라 누리꾼들, 인터넷 집단망명?

아고라 누리꾼들이 사이버 집단망명을 꿈꾸고 있다. 이름하여 ‘상해 임시 아고라’. 정부의 인터넷 여론 통제에 맞선 자구책이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공간에 해외서버를 구축하려는 누리꾼들의 꿈은 과연 이뤄질까? ‘Weekly경향’이 아고라 공안탄압부터 미네르바 옥중 기고문까지 아고라 문제를 집중 취재했다.

아고라 누리꾼들은 지금 망명을 꿈꾸고 있다. 3월 8일 포털사이트 다음에 ‘세계 아고라 정의 포럼’이라는 카페가 개설됐다. 한 달 사이에 4753명이 이 카페에 회원으로 가입했다. ‘이야기방’과 ‘토론방’을 기본 메뉴로 한다는 점에서는 여느 카페와 다를 바 없지만, 이 카페 회원의 지향점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집단망명’이라는 이름의 토론방이다. 이 토론방에서는 해외 서버 구축, 콘텐츠 확보 방안 등 집단망명의 구체적인 실현을 둘러싸고 회원들 사이에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들은 왜 아고라를 떠나려고 하는 것일까. 카페 운영진은 “아직까지 카페가 정비되지 않았고 언론에 소개될 만한 규모도 아니다”면서 인터뷰를 사양했다. 대신 운영진은 “아고라에서 벌어지는 정보 전달의 심각한 왜곡과 의사 표현의 제한적 상황이 계속 심해짐에 따라, 자유롭고 비판적이고 투명한 의사 표현의 공간이 현실적으로 만들어지길 갈망하는 누리꾼의 뜻이 펼쳐지고 있는 카페”라고 소개했다. 지난해 여름 광장으로 집중됐던 촛불의 열기가 온라인과 오프라인 공간으로 분산되면서 몰아치기 시작한 정부의 인터넷 여론 통제 시도에 맞서,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카페의 일차적인 지향점이라는 설명이다.

‘세계 아고라 정의 포럼’ 카페 개설
아고라 누리꾼들은 정부가 촛불집회의 배후로 인터넷을 지목하면서 점증하는 압박감에 시달려왔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해 6월 17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장관회의 개막식 환영사에서 “인터넷의 힘은 신뢰가 담보되지 않으면 약이 아닌 독이 될 수 있다”면서 인터넷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대통령의 이 발언은 불과 일주일 전인 6월 10일까지만 하더라도 촛불의 기세에 눌려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던 정부가 향후 강경한 입장으로 선회할 것임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이날 방통위는 “5월부터 외부 인사 16명으로 인터넷 실명제 확대 연구반을 꾸려 가동 중”이라고 밝혔다. 20일에는 김경한 법무장관이 특정신문 광고주 불매운동을 전면 수사하겠다고 밝혔다. 결국 아고라를 겨냥한 정부의 인터넷 통제 시도는 한나라당의 ‘사이버모욕죄’ 입법으로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이처럼 정부가 지난해부터 인터넷 여론 통제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온 것과 맞물려 아고라 누리꾼 사이에서 사이버 망명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사이버 망명 논의 역사는 1년 가까이 되는 셈이다. 지난해 5월 회사원이라고 밝힌 한 시민이 ‘아고리언’이라는 사이트를 만들었다. 아고리언 사이트는 아고라에 대한 정부 통제가 강화될 것에 대비해 다음 아고라의 기능과 유사하게 만든 공간이다. 지난해 여름까지만 하더라도 아고리언 사이트에는 2만~5만 명의 이용자가 드나들었다. 광고주 불매운동을 하던 누리꾼들은 비슷한 시기 구글에 ‘구글 아고라’를 만들었다. 주민등록번호를 요구하지 않는 구글의 특성 덕분에 수사 대상이 되거나 글이 삭제될 가능성이 낮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그러나 구글 아고라에는 지난해 12월 이후 새로운 게시물이 올라오지 않고 있다. 아고리언 사이트는 꾸준히 새로운 글이 올라오기는 하지만 활력이 예전 같지 않다.

“표현의 자유 보장되는 공간 마련”
‘세계 아고라 정의 포럼’의 회원들에게 지금의 카페는 ‘새로운 사이버 망명지로 가기 위해 잠시 머무르는 간이역이며 플랫폼이자 환승역’ 역할을 하고 있다. 아고라를 대신할 ‘뉴 아고라’를 어떤 곳에, 어떤 행태로 구축할지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아직까지 구체적인 그림은 나와 있지 않지만, 몇 가지 원칙에 대해서는 합의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카페의 한 회원은 “새 대안 사이트는 ‘정권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고, 아고리언들이 사용하기에 익숙해야 하며, 좋은 글이 베스트에 오를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하고, ‘알바’ ‘도배질’ ‘물타기’를 차단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정리했다. 모두 현재 아고라 시스템에 대한 누리꾼들의 문제의식이 집약된 것이다.

이 카페에서 벌어지는 사이버 망명 논의가 어느 정도 수준까지 현실화할지 섣불리 예측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해 보이는 것은 누리꾼들이 사이버 망명을 시도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우리 사회의 인터넷상 표현의 자유가 크게 위축되고 있다는 점이다.

경희대 인류사회재건연구원 송경재 연구교수는 “국내에서 자유로운 토론을 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지지 않으면 이런 형태의 독자적인 커뮤니티는 앞으로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사이버 공화국 해외사례-라도니아

‘뉴 아고라’를 만들려는 누리꾼들은 라도니아와 같은 자율적인 인터넷 공동체를 꿈꾼다. 사진은 라도니아 창설의 발단이 된 스웨덴 조각가 라슈 빌크스의 조형물. <위키피디아>

‘뉴 아고라’를 만들려는 누리꾼들은 라도니아와 같은 자율적인 인터넷 공동체를 꿈꾼다. 사진은 라도니아 창설의 발단이 된 스웨덴 조각가 라슈 빌크스의 조형물. <위키피디아>

“우리는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항하기 위해서 라도니아를 세우려 하는 것이다… 우리가 마침내 찾은 척박한 이 땅은 우리에게 아무 자유도 평화도 행복도 돌려주지 않겠지만, 우리가 지키는 것은 바로 이 나라 전체의 자유와 평화와 행복이라는 것을 알려줄 것이다.”

‘세계 아고라 정의 포럼’의 한 회원이 지난 3월 16일 다음 아고라에 올린 글이다. ‘아고라 정의 포럼’을 거점으로 삼아 사이버 망명을 도모하는 이들이 새 망명지의 모델 중 하나로 검토하고 있는 ‘라도니아’는 어떤 곳일까.

라도니아는 스웨덴의 설치미술가 라슈 빌크스가 1996년에 만든 가상국가다. 빌크스는 1980년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스웨덴 북서부 해안가에 두 개의 대형 조형물을 설치했다. 뒤늦게 조형물의 존재를 파악한 스웨덴 정부가 이를 철거하려 하자 빌크스는 여러 차례 소송을 제기했으나 패소한 끝에 스스로 독립국가를 선포하고 ‘라도니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당연히 라도니아는 국제법적인 실체를 가진 국가가 아니다. 빌크스는 조형물이 설치된 약 1㎦의 지역을 라도니아의 영토로 선포했지만 실제로 거주하는 사람은 없다. 라도니아는 인터넷상으로만 존재하는 사이버 국가다.

그러나 라도니아는 인터넷 공간에서 완벽한 국가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라도니아는 공식적으로 입헌군주제를 취하고 있다. 여왕과 대통령이 있고 가상이긴 하지만 의회와 행정기관, 장관 직책도 있다.

라도니아의 시민이 되는 절차는 간단하다. 라도니아 웹사이트(www.ladonia.net)에서 회원으로 가입하기만 하면 된다. 무료 가입자는 ‘평민’의 지위를, 12달러를 내야 하는 유료 가입자에게는 ‘귀족’의 지위를 받는다.
2002년에는 파키스탄 주민 3000여 명이 라도니아에 메일을 보내 이주 절차를 문의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라도니아가 실제로 존재하는 국가라고 착각한 것이다.

라도니아는 현실적인 실체를 가진 국가가 아니라 빌크스를 비롯한 예술가들이 가상의 공간에 만든 자율적 공동체다. 그러므로 ‘아고라 정의 포럼’의 회원들이 ‘라도니아’라는 말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라도니아라는 실체가 아니라 정치권력에서 자유로운 ‘뉴 아고라’ 건설에 대한 열망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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