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어디에서 오는가 - 북촌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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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빛]봄은 어디에서 오는가 - 북촌 사람들

북촌에 갔습니다. 분명 봄은 아직 이른데도 봄빛을 보러 갔습니다. ‘산 너머 남촌’에도 봄이 이르건만 북촌에서 하마 ‘봄타령’이라니요. 용서하십시오. 그만큼 봄이 절실한 탓입니다. 삼청동 화개길 축대에 도자기와 점토를 붙여 만든 ‘만지는 삼청동 지도’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서울 도시갤러리’ 작업의 일환으로 작가그룹 ‘우리들의 눈’과 서울맹학교 미술반 어린이들이 공동으로 만든 ‘만지면서 느끼는 공감각 지도’입니다. 그렇습니다. 눈으로 볼 수 없다면 손으로 만져보고, 그마저 아니라면 마음으로 느끼면 될 일입니다.

북촌에서 ‘봄빛 찾기’는 안국동 현대 사옥 옆으로 난 북촌길에서 시작합니다. 공간사랑이 건너다보이는 현대 사옥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왠지 골바람처럼 싸합니다. 그래도 옷깃을 세우고 길을 올라갑니다. 북촌문화센터가 있고 조금 더 지나면 서울게스트하우스가 나옵니다. ‘운당(雲堂)’이라는 옥호가 걸린 집에서 먼저 손님을 맞는 건 덩치 큰 삽살개 두 마리입니다. 이 집의 삽살개들은 이제 명물이 다 되었습니다. 기왕에 묵고 간 외국 손님들이 귀국 후 편지라도 보내올라치면 사람보다 개의 안부부터 물어올 정도라고 합니다. 황삽살인 주몽은 이제 일곱 살이고, 청삽살인 순둥이는 세 살로 주몽의 손녀입니다. 순둥이의 아버지 싸리는 지금 이 집의 안주인을 따라 잠시 제주도에 내려가 있는데 날이 풀리는 대로 함께 올라올 예정이라고 합니다.

재작년 겨울이었습니다. 집주인인 현준희씨가 개들을 데리고 인사동에 마실을 나갔던 모양입니다. 마침 인사동에는 대선을 앞두고 현 대통령이 후보로서 거리 유세를 나왔다가 시민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나타나자 후보를 지켜보던 시민들이 삽시간에 그쪽으로 몰려들어 개를 만지고 껴안고 사진을 찍는 등 북새통을 이루는 바람에 정작 유세판은 썰렁해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당시 북촌에 살던 그 후보는 어엿이 대통령이 되어 북촌의 가장 높고 깊은 곳으로 들어갔고, 그 후 어느덧 1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현씨의 삽살개들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마당 한가운데서 조손이 서로 뒤엉켜 뒹굴며 놀기에 바쁩니다.

북촌에서만 10년째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민박집을 운영해오고 있는 현씨는 북촌에 산다는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양궁 사잇길은 꿈결에도 걷고 싶다’는 속담도 있지만 경복궁과 창덕궁, 양대 길택을 끼고 있는 만큼 사람 살기에 더없이 좋을 것은 당연지사 아니겠느냐는 겁니다. 차 한 대 드나들기 힘든 비좁은 골목과 번듯한 시장 하나 없어 용달행상에 의지해야 하는 형편이지만 그깟 불편쯤은 최대 길지에 사는 긍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듯합니다. 비록 골동품 같은 동네라고는 하지만 그런 만큼 귀하기도 하다는 게 현씨의 생각입니다. 신도시야 언제든 100개라도 만들 수 있지만 골동품은 한 번 사라지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것이지요.

[사람의 빛]봄은 어디에서 오는가 - 북촌 사람들

그렇지만 북촌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며 사는 애로사항마저 감추지는 못합니다. 서울의 숙박시설이 10만 원 이상의 호텔과 3만 원 급 여관으로 양극화되어 있는 상태에서 그 중간을 메우면서 우리의 고유문화를 전파하는 기능을 가진 게스트하우스가 뚜렷한 근거 규정이 없어 항상 불안한 상태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전통의 가치보다 이익에만 급급한 개발주의의 호시탐탐한 눈길이 두렵기도 합니다. 이곳 출신의 현 대통령만 해도 그렇습니다. 서울시장으로 있을 때 청계천 복원사업이라든지, 버스환승제라든지, 고가도로를 놓고 지하도를 뚫어 걷기 편한 도시로 만든 것들은, 당시로서는 반대도 많았지만 지나고 보니 그래도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일국의 대통령이 된 지금도 그때와 같을지는 의문입니다. 그때처럼 지나고 나면 잘한 것일지, 아니면 기본마저 흔드는 것은 아닌지 쉽사리 판단이 서질 않습니다. 누구의 말처럼 ‘후진기어 넣고 액셀을 밟는 것’은 아닌지 은근히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나중에 다시 고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한 번 손대면 완전히 사라지는 것도 있는데 말입니다.

서울게스트하우스를 나와 계동길로 접어듭니다. ‘중앙탕’이라는 오래된 목욕탕이 어쩐지 포근하고 정겹습니다만 오늘은 쉬는 날입니다. 아, 그런데 중앙탕 맞은편에 놀랍게도 봄이 와 있었습니다. ‘Salon de Flore’. 이름은 그럴싸하지만 그리 크지 않은 꽃집입니다. 그렇지만 가게 앞에 개나리가 화사하고, 쇼윈도 안에 백장미가 화사하고, 무엇보다 꽃집의 아가씨가 화사합니다. 이 꽃가게의 주인 박사임씨는 북촌 식구가 된 지 채 1년이 되지 않은 새내기입니다. 원래 웹디자인 일을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플로리스트가 되었습니다. 웹과 꽃의 거리가 얼마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사이에는 어릴 적부터 유난히 꽃을 좋아했던 그녀의 심성이 숨어 있습니다.

서울 토박이인 그녀는 전형적인 ‘아파트세대’입니다. 그런데도 우연히 한두 번 들른 적밖에 없던 이곳에 선뜻 가게를 냈고, 한 1년 살아보니 정말 ‘사람 사는 것 같아’ 좋습니다. 이제껏 살아온 아파트지역의 편의성을 딱히 싫어하는 것도 아니지만, 비좁고 불편한 이 골목 동네가 어쩐지 정겨워서 마음에 듭니다. 마치 어릴 적 추억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이제 그녀는 잠시 외출할 때면 그냥 문을 열어둔 채로 다니고, 골목길에서 마주치는 어르신들에게 먼저 눈인사를 보내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그녀에게는 웹과 꽃의 거리만큼이나 아파트와 골목통의 거리쯤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까지 벌이는 시원찮지만 점점 나아질 거라 믿기에, 아침부터 갤러리에 내보낼 꽃을 다듬는 그녀의 손길이 생기에 넘칩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꽃보다 아름답습니다. 마치 꽃을 피워내는 봄처럼 말입니다.

[사람의 빛]봄은 어디에서 오는가 - 북촌 사람들

계동길 언덕바지에 있는 중앙중·고등학교 교정은 한동안 사계절 내내 겨울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촬영한 드라마 <겨울연가> 덕분에 느닷없이 한류의 명소가 되었고 몰려드는 일본인 관광객으로 몸살을 앓았습니다. 수업에 방해가 될 정도로 교정 이곳저곳을 뒤집고 다니는 그들을 단속하느라 애꿎은 수위아저씨가 진땀을 빼야 했답니다. 그들을 겨냥해 학교 정문 앞에는 아예 기념품 가게가 들어서기도 했고요. 배용준, 최지우를 비롯한 한류스타들의 브로마이드, 그들의 사진이 들어간 머그잔, 티스푼, 배지, CD와 인형까지 온갖 기념품이 빼곡히 들어찬 가게를 지키고 있던 박영진씨는 아내가 잠시 외출한 틈에 대신 가게를 봐주고 있는 거라고 합니다. 한류 열풍이 시들해지면서 가게 매출도 부쩍 줄었고, 그만큼 한가해진 아내의 외출도 잦습니다. 그래도 사진기를 향한 박씨의 여유 있는 미소가 배용준 못지않습니다. 그나마 엔화 강세와 상춘관광에 기대를 걸어보는 그들을 위해서 새로 ‘북촌연가’라도 나왔으면 싶습니다.

가회동으로 접어들면 길은 점입가경입니다. 미로 같은 골목을 따라 이리저리 한옥 담장이 이어지거나 서로 처마를 맞댄 기와지붕이 끝도 없이 넘실거립니다. 한상수자수박물관, 가회박물관, 동림매듭박물관 등이 들어서 있는 11번지 일대는 그래도 느긋한 편이지만, 가회로를 건너 31번지 지역에 들어서면 첩첩히 포개진 기와지붕으로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북촌 일대가 이처럼 복잡하게 조성된 것은 조선왕조의 생성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새 왕조가 들어서면서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짓기 시작하자 힘 있는 세도가들이 궁궐 부근의 명당을 서로 먼저 차지하고 다투어 집을 지었습니다. 그때 큰길과 중간길에서 자기 집 앞에까지만 길을 내는 통에 길들이 그렇게 복잡하게 얽혀버린 것입니다. 회색빛 기와 물결을 보고 있노라면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은 것도 같고, 얼핏 기와 틈으로 이미 봄이 시작되고 있는 것도 같습니다.

북촌의 마지막 순례길은 삼청동을 거쳐 정독도서관에 이르는 길입니다. 앞에서 말한 화개길 높은 곳에 이르면 ‘겸재(謙齋)의 인왕제색(仁王霽色)’과 ‘파란 기와집’이 한꺼번에 내려다보입니다. 날씨 탓인지 그 풍경은 왠지 흐릿하기만 합니다. 앞의 ‘만지는 삼청동 지도’ 옆 축대에는 김월식 작가의 작품 ‘북두팔성’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우리 미래의 여덟 번째 빛’이자 ‘살아온 삶에 대한 보너스’라고 합니다. 과연 우리의 미래에 그런 덤이 있을까요. 내려오는 길에 티베트박물관 못 미처서 ‘마음의 무늬’라는 가게에 들렀습니다. ‘작가들이 만드는 감성 수제 타이’집입니다. 이름이 마음에 들기도 했지만 봄을 맞으며 넥타이 하나쯤 마련하고도 싶었습니다. 이 집은 굳이 유행이나 트렌드를 쫓지 않습니다. 돈을 벌려 하기보다는 한국적 색감과 문양을 고집하는 ‘작가정신’을 내세우기 때문입니다. 가게를 지키고 있던 신원영 작가는 타이야말로 자기 마음의 표현이라고 말합니다. 새 봄에 어울리는 타이로 화사한 블루 톤이나 생기에 넘치는 초록 빛깔을 권하지만, 정작 나는 내 마음의 무늬가 어떤 색깔일지 몰라 마냥 망설일 뿐입니다.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기에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봄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꼭 남에서 오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북촌에 터 잡아 살던 그 많던 세도가도 어지간히 ‘강 너머 남촌’으로 가버린 지금, 북촌에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은 궁궐의 위세와는 관계없이 어느 곳에선가 민박을 치고, 꽃을 팔고, 구멍가게를 지키고, 자기 일에 묵묵히 땀을 쏟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봄은 그런 사람들의 더 나은 삶에 대한 소망과 더 나은 내일에 대한 바람으로부터 올 겁니다. 그리고 북촌에 봄이 오면 바야흐로 세상은 온통 봄일 겁니다.

<글·사진 유성문 편집위원 rotack@lyco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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