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연가 - 이영훈의 삶과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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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빛]광화문 연가 - 이영훈의 삶과 음악

이제 모두 세월 따라/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언젠가는 우리 모두/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언덕 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향긋한 오월의 꽃향기가/가슴 깊이 그리워지면/눈 내린 광화문 네거리 이곳에/이렇게 다시 찾아와요
- 이영훈 ‘광화문 연가’ 중에서

2월 14일 서울 정동길에서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작곡가 이영훈(1960~2008)의 1주기를 맞아 세운 그의 노래비 제막을 기념하는 공연이었다. 가수 정훈희, 이문세와 배우 윤석화 등이 나와 그의 히트곡을 불렀다.

그렇게 보고 싶던 그 얼굴을/그저 스쳐 지나가면/그대의 허탈한 모습 속에/나 이젠 후회 없으니//그대 나를 알아도/나는 기억을 못 합니다/목이 메어 와 눈물이 흘러도/사랑이 지나가면 - 이영훈 ‘사랑이 지나가면’ 중에서

‘사랑이 지나가면’이 불릴 때 고인의 아들 정환과 함께 앉아 있던 아내 김은옥은 연방 눈물을 훔쳤고, ‘광화문 연가’는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시민이 함께 따라 부르기도 했다. 이날 제막한 그의 노래비 앞에는 책 두 권이 놓였다. ‘Art Book 광화문 연가’(이영훈&김은옥 글, 민음사 간). 고인의 삶과 음악을 기록한 책이었다.

여태 살아온 것이 그러했듯이 난 아직도 대중에 익숙하지 않다. 그저 내 음악으로 인해사람들이 행복해하길 바랄 뿐이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대중과 영합하지 않는 음악으로 남길, 또한 내 음악이 여러 사람에게 희망을 주고 삶의 기쁨으로 존재하기를 기도할 뿐이다.(나, 이영훈)

어머니는 독학으로 음악 공부를 하는 아들의 부탁에 70여 만 원 되는 월급에서 서슴없이 58만 원 하는 피아노를 사주셨다. 그는 그때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고 했다. 무엇이든지, 어떤 음악이든지 그 피아노만 있으면 가능할 것 같았다고 했다. 그래서 믿어준 어머니에게 자신의 성공을 보여드리고 싶어 했다. … 그가 처음 발표한 곡 ‘난 아직 모르잖아요’가 10주 동안 각종 가요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을 때는 어머니가 혼수상태로 중환자실에 계실 때였다. 그가 잠깐 의식이 돌아온 어머니를 붙잡고 성공 소식을 알려드렸고, 어머니는 활짝 웃으셨다. “이제 피아노 사 준 돈, 다 갚아.”(어머니, 어머니)

이. 영. 훈. 1985년 가을, 처음 만난 그가 작곡가란다. 미술학원에 같이 다니던 선배를 따라간 작업실에 그가 있었다. … 흔들림 없이 쳐다보는 그의 눈빛 때문에 내 입은 더 굳게 닫혔고, 그 강한 눈빛이 너무 민망해 혜화동 작업실의 작은 창가로 들어오는 햇살만 쳐다보았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래도 내가 등 뒤로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은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와 따뜻함이 흘러내릴 것 같은 웃음소리…. 그를 다시 만난 것은 졸업 작품 전시회가 열린 1년 후, 그의 이름이 적힌 꽃다발을 받았다. 그리고 우리의 만남은 시작되었다.(만남)

우리는 꼬박 1년을 붙어다닌 후 결혼했다. 우리가 떨어져 있었던 시간이라면 일본, 미국 공연으로 한국을 며칠 떠나 있었을 때뿐. 그는 아침 9시면 언제나 혜화동 우리 집 근처에서 나를 기다렸다. 그리고 우리의 이른 데이트는 시작되었다. 이른 아침 문을 여는 곳은 고궁뿐. 그와의 고궁 순례는 매일 계속되었다. 창경궁, 경복궁, 비원…. 함께 있으면 아무 말 안 해도 좋았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몰랐다.(결혼)

자포자기에서 나를 일으켜세우는 날이 다가오고 있다. 발소리마냥 그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이젠 절망과 폭음과 자폐에서 우울과 기쁨과 억압에 이르는, 그 모든 형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요즘 아들과 예쁜 아내와 재미있게 살고 있다. 그럼에도 나의 작곡이란 것이 내용 면에서 상충되어 빚어진 모순적 결과로 인해, 조울증에 시달려 왔음은 사실이다.(여름이 시작되며)

담배꽁초 가득한 재떨이, 텅 비어 있는 대용량의 커피포트, 이리저리 뒹구는 담뱃갑, 피아노 위에 떨어져 있는 지우개 가루들…. 밤새 이 방에서 얼마나 힘들게 작업을 했을까, 생각하게 만드는 흔적들. 쓰레기를 비우고 지우개 가루를 털어내고 피아노 음반 구석구석 먼지들을 닦아내면 그가 일어났다.(내 하루의 시작은)

그는 집에 있을 때도 언제나 내 손을 잡았다. 잠자리에 들어서는 심지어 손가락 하나라도 붙잡고서야 잠이 들었다. 가끔은 성가시기도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생긴 그 버릇, 홀로 떨어져 있는 것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싫어했기에 나는 항상 그의 주위에서 맴돌아야 했다.(그의 버릇)

광화문 덕수궁 돌담길에서 열린 이영훈 노래비 제막 기념 공연. 그의 아내 김은옥은 많은 시간이 흐르고서야 알았다. 연애 시절 그렇게 많은 고궁을 돌아다니고 같은 곳을 여러 번 갔는데도 불구하고 한 번도 그와 가보지 않은 궁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그의 음악에 늘 나오는 덕수궁이었다는 것을.

광화문 덕수궁 돌담길에서 열린 이영훈 노래비 제막 기념 공연. 그의 아내 김은옥은 많은 시간이 흐르고서야 알았다. 연애 시절 그렇게 많은 고궁을 돌아다니고 같은 곳을 여러 번 갔는데도 불구하고 한 번도 그와 가보지 않은 궁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그의 음악에 늘 나오는 덕수궁이었다는 것을.

피곤하다. 약을 세 번이나 먹었는데도 통증이 온다. 잠을 좀 자면 나을 것 같은데…. …예전에도 그런 생각은 했었다. 곡을 쓰면서 몸이 피곤하고 지치면 내가 내 명을 줄이는구나, 하고 말이다. 한 곡을 쓰기 위해 몇 날 몇 밤을 새워가며 하루 대여섯 갑씩 담배를 피우고 스무 잔 정도의 커피를 물 마시듯 하며…. 그것도 모자라 며칠씩 잠을 안 잔 날도 허다했다. … 그러나 작업이 없는 동안은 그까짓 술, 남들의 두세 배씩 먹는다. 이유가 있다. 내 마음속에 있던 것들을 어렵게 끌어낸 상처를 치유하는 거랄까. … 음악의 존엄성이란 음악을 만든 이와 그 음악을 듣는 이가 같이하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만든 이 따로, 듣는 이 따로인 음악은 내팽개쳐진 음악일 뿐.(음악은 존엄하다)

2006년 5월, 인천공항에 내려 제일 먼저 남편 얼굴을 찾았다. 반가움에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지난 3개월 전 시드니에서 봤을 때보다 반쪽이 되어 있었다. 많이 마르고 피곤해 찌든 모습, 가슴이 철렁했다. ‘별일 없겠지. 단순한 염증일지도 모른다고 했으니까 치료하면 금방 나을 거야.’ 스스로 위안하면서도 며칠 전 시드니로 전화한 남편의 목소리가 자꾸 걸렸다. ‘병원에서 검사를 했는데, 큰 병원에 가보라고 하네. 당신 나올 수 있어?’(불안했던 일이 현실로)

의사는 남편의 직업을 물었다. “혹시 목사님이신가요?” “아니요. 노래를 만드는 사람이에요.” “아, 그래서 저리 천진하시군요. 그런데요, 암이 문제가 아니라 세포 종류가 너무 나쁘네요. 저희로서도 보기 힘든 암세포예요. 이 상태라면… 2년 정도 시한부로 봅니다.” 아무 생각 안 하기로 했다. 어차피 그는 이겨낼 테니까. 병실에 돌아와 가만히 남편 옆에 누워보았다.(하루 만에 다시 수술대에)

요즘 그는 무더운 여름을 오전엔 병원, 오후엔 녹음실에서 보내면서 <옛사랑1>을 작업 중이다. 2년 전에 약속한 앨범을 마무리하기 위해 지친 몸을 이끌고 녹음실로 가는 그를 말리고 싶었는데 아무 이야기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가 선택한 삶이고 그를 살아있게 하는 힘이었으니까.(암 환자 카드를 받고)

이영훈 노래비. 1985년부터 2001년까지 가수 이문세와 정규 앨범 8장, 기획 앨범 3장을 함께 만들면서 1980년대 한국 대중음악에 ‘팝 발라드’라는 장르를 개척하고, 최초의 골든디스크 연속 3회 수상 기록을 세우기도 한 그는 이민용 감독의 <보리울의 여름> 영화 음악 작업을 끝으로 잠시 활동을 쉬고 자신의 히트곡으로만 구성된 뮤지컬 <광화문 연가>를 준비하던 중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49세의 아까운, 참으로 아까운 나이였다.

이영훈 노래비. 1985년부터 2001년까지 가수 이문세와 정규 앨범 8장, 기획 앨범 3장을 함께 만들면서 1980년대 한국 대중음악에 ‘팝 발라드’라는 장르를 개척하고, 최초의 골든디스크 연속 3회 수상 기록을 세우기도 한 그는 이민용 감독의 <보리울의 여름> 영화 음악 작업을 끝으로 잠시 활동을 쉬고 자신의 히트곡으로만 구성된 뮤지컬 <광화문 연가>를 준비하던 중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49세의 아까운, 참으로 아까운 나이였다.

하고 싶은 말들과 적고 싶은 글들을 가슴에 묻습니다. 굳이 꺼내어 말하지 않아도 적지 않아도 우리가 겪고 있는 삶이고 그런저런 너와 나의 같은 이야기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사랑하는 동안 삶과 사랑은 하늘의 구름과 같이 흘러만 갑니다. 바라보면 손에 잡힐 듯하지만 바라보면 그 사이 먼 곳으로 사라져가 없습니다. … 그리고, 이제 많은 기도가 필요한 저입니다. 항상 사랑하고 늘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십시오.(<옛사랑> 서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신 아파줄 수도, 대신 걸어줄 수도. 그저 속수무책으로 자리에 앉아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걱정 말라는 듯이 오히려 웃어주었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앞만 바라보았다. 창밖을 보며 기도했다. 할 수만 있다면 저 사람 대신 내가 아프고 대신 죽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다.(아들, 그가 사랑한 아들)

20년간 서로 생일을 챙겨주었지만 오늘은 좀 더 각별한 날인 것 같소. 해가 갈수록 당신을 더욱 사랑하오. 점점 아름답고 성숙해지며 인내하는 당신에게 나는 진심으로 감사와 고마움을 느껴…. 사랑하오. PS. 정말 고생 많았소.(2007년 12월 10일, 남편 영훈)

오늘 그가 떠. 났. 다. 2008년 12월 14일 새벽 3시. 모두들 12시쯤 돌아가고, 잠시 쉬는 것처럼 보이던 그가 가빠지는 호흡을 참을 수 없어 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면 허공에다 대고 ‘하늘의 선율’이라며 지휘를 시작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황홀한 미소로 가슴 벅차했다. 자기가 만든 노래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아름다운 멜로디들이 천국에 가득하다며 즐거워했다. …난 너무 두려웠다. 그러나 혼자 가는 그가, 남겨진 나보다 더 힘들 것 같아서… 나는 참아야 했다.(마지막까지 작곡가로)

누군들 떠나간 아픈 사랑을 기억하는 이라면 ‘광화문 연가’를 모를까. 사람은 가고 음악은 남았다. 사랑은 가도 음악은 남는다.

이젠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내 맘에 둘 거야/그대 생각이 나면 생각난 대로 내버려 두듯이…눈 녹은 봄날 푸르른 잎새 위엔/옛사랑 그대 모습 영원 속에 있네 -이영훈 ‘옛사랑’ 중에서

<글·사진 유성문 편집위원 rotack@lyco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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