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Z 평화생명동산 정성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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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열쇠로 평화의 문을 연다

[사람의 빛]DMZ 평화생명동산 정성헌 이사장

갈라짐은 온갖 고통과 슬픔의 뿌리입니다. 한국전쟁으로 우리 겨레와 강토가 남북으로 갈라진 지도 어언 55년이 지났습니다. 한반도의 허리를 분단한 비무장지대! DMZ는 지금도 우리 민족의 아픔과 좌절이며 세계 평화의 위협이며 인류 문명의 부끄러움입니다. 그러나 DMZ 일원은 자연과 생명의 역동적인 역사로 사람이 할 수 없는 ‘위대한 복원’이 감동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전쟁, 대결, 죽임, 차단의 DMZ 일원을 ‘평화와 생명의 터전’으로 바꾸어내기 위한 뜻과 정성을 모아 한국 DMZ 평화생명동산을 창립합니다.
-‘한국 DMZ 평화생명동산 창립선언(2008년 11월 18일)’ 중에서

1998년 11월, 정성헌(63) 이사장은 당시 인제군수로부터 서화면 주민의 숙원이던 민간인출입통제선(민통선) 출입영농 타당성 조사를 의뢰받았다. 대학 시절 한일회담 반대와 관련해 구속된 이후 가톨릭 농민운동과 우리 밀 살리기운동 등에 주도적 역할을 해온 그가 고향인 강원도로 내려와 직접 농사를 짓던 때였다. 그 자신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농민운동과 함께 직접 농사를 지어온 만큼 어느 정도 판단에 자신이 있었다. 후배 기자와 함께 가전리 민통선지역을 둘러본 그는 뜻밖의 결론을 내렸다.

이 지역을 영농이 아니라 평화와 생명의 터전으로 가꾸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영농을 한다면 연 8억 원 정도의 소득을 올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 정도의 수익을 위해 어떤 이유로든 50년이 넘게 보존되어온 땅을 쉽사리 파헤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당장 눈앞의 이익보다는 이 땅이 지닌 진정한 가치를 살려 민족과 인류를 위한 생태평화공원을 조성하자는 그의 생각은 결국 ‘DMZ 평화생명동산’의 모태가 되었다.

이후 몇 차례 현지조사를 통해 ‘한국 DMZ 평화생명마을’ 마스터플랜을 확정했고, 이는 곧 권근술(남북어린이어깨동무 이사장), 김지하(시인), 김진선(강원도지사), 오정희(소설가), 유재천(한림대 교수), 이삼열(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사무총장) 등이 참여한 10인의 이름으로 제안, UNDP와 여섯 차례 협의를 거친 다음 추진위원회의 발족과 함께 구체화했다. 2004년에는 그 이름을 ‘한국 DMZ 평화생명동산’으로 바꾸고, 서화면 점고개 일대에 평화생명교육마을 부지를 확보해 2006년 착공, 마침내 오는 6월 개장을 앞두고 있다.

DMZ는 한국전쟁의 결과물인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너비 4㎞, 길이 250㎞의 공간을 말하며, 보통 DMZ 일원이라 하면 남북이 군사·행정적 필요에 따라 구획한 공간, 이를테면 남한의 경우 민통선 이북지역과 일부 접경지역을 포함해 지칭한다. DMZ는 전쟁과 평화, 단절과 소통, 대결과 협력, 무장과 비무장, 파괴와 보존 등 현대사의 모순과 역설, 좌절과 희망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현장이다.

십수 년 전부터 세계적 차원의 냉전질서가 해체되고 남북한 관계가 개선되면서 DMZ는 주로 생태계의 보존, 역사문화의 복원이라는 관점에서, 또 세계 유일의 분단지역으로서 관광명소로 부각되고 있다. 이에 따라 반세기 이상 군사·행정 및 환경적 이유 등으로 중첩 적용되어온 특수한 규제지역의 개발욕구를 자극하여 주민의 숙원사업이라는 명분 아래 크고 작은 자본과 권력의 무분별한 개입에 늘 노출되어 있는 실정이기도 하다. 이에따라 DMZ의 역사·문화·생태계를 올바르게 보존하는 바탕 위에서 사람과 자연, 민족과 인류가 공존·공영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하고 실천하는 광장으로서 평화생명동산의 존재 이유가 있다.

평화생명동산 조감도. 6만6116㎡ 규모의 오행동산 등이 조성되고, 전망대, 교육·전시관 및 숙소도 건립된다.

평화생명동산 조감도. 6만6116㎡ 규모의 오행동산 등이 조성되고, 전망대, 교육·전시관 및 숙소도 건립된다.

강원 인제군 서화면 서화리와 가전리 일대 12만4210㎡에 들어서는 DMZ 평화생명동산은 크게 두 구역으로 나뉜다. 가전리 DMZ 일원의 자연생태공원과 서화리 일대의 평화교육마을이다. DMZ 내 생태공원이 전방이라면 평화·생명 프로그램을 교육하고 체험하는 평화마을은 후방인 셈이다. 생태공원은 지뢰 미확인지대의 지뢰를 탐색, 제거하여 이동을 위한 최소한의 나무 도로와 관찰마루를 설치할 예정이지만 군과의 협의 문제로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지금 공사가 한창인 평화교육마을은 생명동산과 평화공원으로 이루어진다. 생명동산은 우리의 고유한 토종식물 유전자를 수집·보전·연구·개발하는 공간으로, 인간의 오장육부와 태극, 신·의·예·지 등 고유 가치를 담은 생명살림 오행동산으로 꾸민다. 평화공원은 교육관, 전시실과 한 번에 12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숙소 등이 들어서며, 모든 집은 ‘생명에 이롭고 평화에 도움이 되는 원칙’ 아래 설계 건설된다. 예를 들면 태양열과 지열을 최대한 활용하고, 지붕 전체를 잔디밭으로 하거나, 빗물과 생활하수를 순환 활용하는 식이다.

아무리 뜻이 좋아도 평화와 생명의 가치를 계속 확산하고 주민과 이용자 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협력하지 않으면 평화생명동산 역시 또 하나의 커다란 집이나 짓고 마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 다행히 평화생명동산을 조성하고 운영하는 데 지방자치단체나 국가는 지원은 하되 간섭은 최소화하는 원칙에 열린 시각으로 동의해주었다. 서화면의 주민들 역시 ‘직접적으로 돌아갈 이익이 없다’는 설명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거듭되는 모임과 교육, 그리고 실천행동으로 평화생명운동을 조금씩 자기 것으로 키워나간 결과다.

평화생명동산 입구에 장승공원을 세울 때 외부 조각가에게 맡기지 않고 굳이 장승아카데미를 불러 주민들이 2박3일 동안 교육받아 직접 작품을 만들도록 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가 귀향해 농사를 짓던 춘천 북산 생기마을에서의 경험을 살려 ‘나눔과수원’을 주민들과 공동으로 조성하기로 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여러 사람의 뜻을 모아 이 과수원을 만들었습니다. 나무가 자라 과일이 열리면 먹고 싶은 사람은 아무나 따 가십시오. 다만 따 가실 때 5개 더 따서 어려운 이웃에게 나눠 주십시오. 나눔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그 자신 6년 전 위암 수술을 받은 이후 민간요법(배달의학)으로 몸을 치유해오고 있기도 하지만 마을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는 데 주민들을 위한 의료봉사활동도 한몫했다. 한의사들을 주축으로 한 평화생명동산 생활건강위원회는 지난해부터 ‘의료 오지’나 다름없는 서화마을에서 농민들의 병을 고쳐주고 예방의학으로 그들의 건강 증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그 반응이 어찌나 좋던지 마을 사람들의 입에서 의료봉사활동에 참여한 한 총각 한의사를 인제 여자와 결혼을 시켜서라도 붙잡아두자는 이야기까지 나오기도 했다.

주요 건물의 설계는 건축가 승효상씨가 맡았다.

주요 건물의 설계는 건축가 승효상씨가 맡았다.

정 이사장은 궁극적으로 평화생명마을 전체를 전면적인 생명농업으로 바꿔나갈 생각이다. 그를 위해 에코생활협동조합 같은 형태의 지역조합 운영도 염두에 두고 있다. 공동으로 투자와 참여를 하고 거기서 나오는 이익금 중 3분의 1은 배당, 3분의 1은 재투자, 나머지는 평화생명기금으로 내놓는 방식이다. 평화교육은 성공회대에 일임할 생각이다. 평화생명운동을 어느 한 사람이나 조직이 독점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는 45년 동안 운동을 해오면서 자기 조직만 크게 하려다 망치는 경우를 여러 번 보았다. ‘독수리 모이주기운동’ 등 다른 DMZ 관련 운동 조직들과 협력하기로 한 것도 충분한 협조틀에 의한 운동방식을 지향한 결과다. 조직 또한 크고 굼뜬 조직이 아니라 작고 민첩한 조직으로 꾸려나갈 생각이다.

남북강원도협력협회 이사장도 맡고 있는 그는 남북 교류사업의 일환으로 연어 남북 공동방류사업을 펼쳤을 때의 감격을 잊지 못한다. 남에서 방류한 연어가 북에서 자라 남으로 돌아오고, 북에서 방류한 연어는 남에서 자라 북으로 돌아간다. 그 생명과 순환의 감동, 그대로라면 내친 김에 DMZ의 생태평화공원 역시 남은 북으로, 북은 남으로 그렇게 남과 북이 함께 펼쳐나갔으면 하지만, 언젠가 이를 제안했을 때 북측은 선뜻 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두르지 않을 생각이다. 지금 비록 남과 북의 빗장이 다시 닫히고 있지만 DMZ를 흐르는 물 밑으로 남과 북의 연어 새끼들은 여전히 물길을 거슬러 헤엄치고 있지 않겠는가.

정 이사장은 평화생명동산이 들어서기 전부터 조성되어 있던 잣나무 숲을 거닐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머지않아 저 숲도 마을 사람들과 함께 간벌을 해야 하리라. 잣나무 아래서는 다른 생명들이 자라지 못한다. 평화를 이루려면 여러 생명이 다같이 건강해야 한다. 다양성의 존중, 관계성의 강화, 구조적 순환성, 이것이 생명의 열쇠다. 생명이 건강할 때 비로소 ‘나’의 평화가 이루어지고, 그 위에 세상의 평화, 사람과 자연의 평화도 열린다.

인법지(人法地, 사람은 땅을 닮고), 지법천(地法天, 땅은 하늘을 닮고), 천법도(天法道, 하늘은 도를 닮고), 도법자연(道法自然, 도는 자연을 닮는다) -노자 <도덕경>에서

<글·사진 유성문 편집위원 rotack@lyco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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