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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발사업의 지혜’는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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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권과 조합이익 충돌 불상사 키워… 흑석시장 재개발 영업권 보장 타협

재개발은 타협할 수 없는가? 오랜 투쟁과 협상 끝에 가수용상가 등 세입자들의 영업권이 일정 부분 보장된 흑석시장 재개발 현장. 공사중인 주상복합건물 앞으로 가수용상가에서 20여 상인이 정상적으로 장사를 하고 있다.

재개발은 타협할 수 없는가? 오랜 투쟁과 협상 끝에 가수용상가 등 세입자들의 영업권이 일정 부분 보장된 흑석시장 재개발 현장. 공사중인 주상복합건물 앞으로 가수용상가에서 20여 상인이 정상적으로 장사를 하고 있다.

흑석시장 버스정류장 옆 한 포장마차에서 떡볶이며 김밥을 파는 박순자(여·61)씨와 국수를 삶아내는 정삼순(여·57)씨는 다리 건너 용산 참사를 바라보는 마음이 남달리 착잡하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박씨와 정씨 역시 시장 재재발조합이 동원한 용역들과 맞서며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용산 참사는 재건축 투쟁이 있는 곳 어디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이들의 걱정이자 충고였다.

최대 10년간 영업권 보장받아
중앙대학교 정문 옆에 자리한 흑석시장의 정확한 주소는 서울시 동작구 흑석동 95-1번지 일대 5700㎡. 흑석동 최고의 요지로 불리는 이곳은 40년 넘게 이어져 온 대표적 재래시장이지만 현재 지상 20층, 지하 5층 규모의 주상복합 건물이 한창 공사 중이다. 아천세양건설이 짓는 ‘흑석동 세양 아르비채리버’로, 109~152㎡형 아파트 154세대와 판매시설이 들어서게 된다.

2006년 10월에 분양을 시작해 2009년 11월 입주 예정. 아파트는 이미 100% 분양 완료된 상태이며, 지하 1층~지상 2층 상업시설은 한창 분양 중이다.

박씨와 정씨 등 흑석시장 세입자와 노점상 60여 명은 2006년 6월, 수십 년 동안 일했던 흑석시장에서 쫓겨났다. 2004년 12월 서울시가 재래시장을 활성화·현대화한다는 명분으로 흑석시장 재개발사업을 인가한 이후 본격적인 철거작업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대부분 영세 세입자였던 시장 상인들은 2005년 11월께 흑석시장세입자철거민대책위(대책위)를 꾸리고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장사할 수 있는 대체 부지를 마련해줄 것과 공사가 끝나면 상가를 임대해달라”는 요구사항을 모아냈다. 하지만 철거가 시작되기 전 재개발조합 측으로부터 보상과 관련해 어떠한 협의나 설명도 들을 수 없었고, 철거 요구 하루 만에 용역이 들이닥쳤다는 게 이들의 말이다. 정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억했다.

“새벽 5시에 용역 200명이 들이닥쳐 숟가락, 그릇 하나 꺼낼 여유도 주지 않고 노점과 매장을 뒤집었다. 20년 가까이 애들 학교 보내고, 입에 풀칠하게 해주었던 생곗거리가 흙더미 속에 파묻히는데 그때만큼 치 떨린 적이 없었다. 조합과 구청으로부터 ‘돈이나 더 뜯어내려는 거지 근성’이라는 욕설을 듣고 보니 억울해서 더욱 열심히 싸웠다.”

조합이 동원한 용역들에게 계란과 파, 생선 등을 던지며 대항하던 채소가게 아줌마, 떡볶이 노점 할머니, 화장품가게 아줌마는 결국 몸에 인분을 칠하고 휘발유를 뒤집어썼다. 굴삭기에 깔리고 모든 게 뒤집혀버린 터전이었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50~60대 여성으로 이런 방법밖에는 별다른 투쟁 전략도 없었다.

그렇게 싸우기를 1년. 60명이던 시장 세입자와 노점상은 점점 줄어갔다. 덩치 큰 용역들이 무섭기도 하거니와 당장 장사를 못하면 살 길이 없는 나이 든 상인들이 ‘한 줌의 보상금’을 받고 하나둘 떠난 것이다. 용역의 1차 철거 때 40명으로 줄더니 2차 철거엔 20명, 3차 철거 진입엔 10명 정도가 남았다. 하지만 정삼례 대책위위원장 등 5명의 상인은 연골이 파열돼 석고붕대를 하고, 허리를 다쳐 복대를 한 상태로 끝까지 저항했다. 결국 조합 측은 철거를 시작한 지 1년 만인 2007년 7월 협상에 나섰다.

현재 철거에 따른 흑석시장 세입자들에 대한 조합 측의 보상은 3가지로 진행되고 있다. 철거 싸움에 다소 소극적이던 기존 소방 통로 세입자와 노점상들은 주상복합이 완공되는 시기까지 영업할 수 있도록 했고, 대책위 소속의 일부는 보상금과 완공 시까지 가수용상가 보장, 최후까지 싸운 5인에게는 향후 상가 완공 시 10년간 영업권 보장이다. 저항의 강도에 따라 보상을 달리한 셈이다. 정 위원장은 “조합과 대책위, 건설사가 법무법인에서 공증을 체결했고, 구청이 참관인 자격으로 함께 했다”면서 “투쟁 중간에 힘들어 빠져나간 뒤 적은 보상금으로 다시 노점을 펼친 세입자들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고 밝혔다.

“용산 경찰 신속투입 이해 안 돼”
이에 대해 흑석시장재개발조합 측의 의견은 “헌법에 보장된 사유재산권을 행사하려고 108명의 조합원이 모였는데 세입자와 노점상 들의 1년에 걸친 농성 탓에 공사 진행에 차질이 생겨 수억 원의 손해를 봤다”면서도 “하지만 일정 정도 수준에서 합의를 봤고, 주상복합 완공 후 쌍방이 이를 지켜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흑석시장 재개발은 1년여의 철거싸움 끝에 다양한 보상책이 실현됐다. 도시계획전문가들은 순환재개발 방식 도입을 강조하고 있다. 흑석시장 세입자들이 가수용단지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모습.

흑석시장 재개발은 1년여의 철거싸움 끝에 다양한 보상책이 실현됐다. 도시계획전문가들은 순환재개발 방식 도입을 강조하고 있다. 흑석시장 세입자들이 가수용단지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모습.

재개발 사업 초기 조합은 철대위가 요구한 임시시장 마련과 재개발 후 상가 임대점포 마련 등 흑석시장 세입자들의 요구를 묵살했다. 조합의 한 관계자는 “재래시장재개발 사업의 근거법인 ‘재래시장육성을위한특별법’(재래시장특별법)을 보면 ‘임시시장을 만들어주고, 건물이 완공되면 임대상가를 준다. 그 두 가지를 못할 시에는 영업비로 보상하라’는 내용이 있다”면서 “임시시장과 임대상가를 줄 만한 여건이 안 돼 이주비과 영업보상비 등을 제시했는데, 이해관계자마다 받아들이는 게 달랐다”고 말했다. 그는 또 “국가가 영세 상인을 보호해야지 개인이 사유재산까지 내주면서 책임을 져야 하느냐”면서 “정부가 방관한 채 조합이 해결하라고 하면 결국 싸움밖에 더 나겠는가?”라고 되물었다. 재개발 관리감독 기관인 구청과 시청이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조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흑석시장 재개발 사업이 우여곡절 끝에 영업권을 일정 정도 보상하는 수준에서 타협을 봤다면 지난달 20일 6명이 숨진 용산 철거민 참사는 재개발조합이 주도하여 밀어붙이기식으로 무리하게 사업을 추진한 것이 결국 화를 불렀다는 지적이다.

사고가 난 ‘용산 4구역’이 도시정비구역으로 지정된 것은 2006년 4월. 2007년 2월 조합이 설립된 뒤 같은 해 6월 재개발사업시행 인가가 이뤄졌고, 이어 10월 조합 총회에서 이주 및 주거 이전비 지급안과 철거업체 선정 등이 확정됐다. 재개발의 경우 사업인가를 받기까지 통상 3, 4년 이상 걸리는 점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세입자들과 보상 및 이주대책에 대해 충분한 논의 없이 사업을 강행한 것이 결국 화를 자초했다는 분석이다.

경찰의 조기 개입도 의문스럽다는 게 흑석시장재개발조합의 의견이다. 철거 과정에서 경찰은 대개 조합이나 철거민 양쪽에 ‘원망’을 사는데, 이번 용산 참사의 경우 경찰이 통상적인 경우보다 상당히 빠르게 개입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한 조합 관계자는 “용산의 경우 조합과 건설사, 경찰의 공감대가 있었을 것”이라며 “경찰이 그렇게 빨리 투입될 수 없으며, 그게 불상사를 불러온 이유이기도 할 것”이라고 조심스레 지적했다.

삼성 끼면 용역이 독해진다
건설재벌이 시공하는 재개발지역의 철거 싸움이 상대적으로 더 과격하다는 지적도 있다. 재개발 전 과정을 주도하는 시공업체의 성격에 따라 보상과 철거 절차가 진행되는데, 건설재벌의 경우 ‘악명 높은’ 용역회사를 동원해 일사천리로 진행하려 한다는 것이다. 정 위원장은 “철거 투쟁을 하다 보면 특히 ‘삼성’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시공사와 싸움이 가장 치열하다”면서 “그들은 특정 업체 몇 곳만 골라 용역을 키우는 것 같다”고 주장했다.

경찰 진압 과정에서 철거민 등 6명의 사망자를 낸 용산 국제빌딩 주변 4구역은 대표적인 도심재개발 사업지다. 이 일대엔 지하 9층~지상 35층의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 3개 동과 29층 업무용 빌딩 3개 동이 지어질 예정이었다. 사업자는 삼성물산, 대림산업, 포스코건설로, 주간사는 40% 지분을 갖은 삼성물산이다.

흑석시장의 경우에도 ‘재래시장을 활성화한다’는 명분이지만 상가와 토지 소유주로 구성된 재개발조합과 건설자본을 위한 돈 잔치라는 지적이다. 인근 부동산 업자에 따르면 흑석시장 일대는 올해 지하철 9호선이 개통되면 흑석중앙대입구역에서 도보 1분 거리의 초역세권으로, 대학가 상권이면서 뉴타운 개발로 1만3000세대의 풍부한 유입 인구로 높은 프리미엄이 붙었다. 주상복합상가인 세양아르비채리버 상가의 경우 3.3㎡당 1억 원이 넘는 시세가 형성될 전망이라고. 정 위원장은 “흑석시장 주상복합의 경우 ‘재래시장육성특별법’의 혜택을 받아 원래 15층 허가날 것이 20층으로 올랐으며 조합원과 시공회사의 이익이 엄청나게 커졌다”면서 “하지만 40년 전부터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상권을 키워온 세입자들에겐 한 줌 정도의 보상비를 줬다”고 말했다.

순환재개발 방식 등 현실적 대책을
이에 대해 홍인옥 한국도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재개발 사업의 근본적인 한계는 공공사업임에도 민간이 개발 이익을 전제로 사업을 추진하는 점”이라며 “결국 이런 문제들이 재개발 사업을 각종 비리의 온상이자 무법천지의 장으로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이전의 철거가 ‘아무런 대책도 없는 폭력적 강제 철거’였다면 지금의 철거는 ‘형식적 대책과 제한적 강제 철거’라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여전히 강행되고 있다”면서 “용산 참사는 그동안 묵인하고 방치해 누적됐던 재개발사업의 문제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변창흠 환경정의 토지정의센터장도 “조합과 시공사에 속도는 곧 돈이기 때문에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하는데, 용산 참사는 바로 이 속도전이 빚은 참사”라고 주장하며 “특히 조합 중심의 사업추진 방식은 부동산 개발이익을 전제로 작동되는 기형적인 구조”라고 지적했다.

도시계획전문가들은 현실적으로 세입자를 몰아내지 않고도 재개발할 수 있는 순환 재개발 방식을 대안으로 꼽는다. 현재 국내에서 시행하는 재개발은 대부분 해당 지역을 전부 철거하는 철거 재개발 방식인 반면 순환 재개발은 재개발 지역 안에 임대주택을 마련해주거나 인근 지역에 세입자를 이주시킨 뒤 순차적으로 개발하는 방식이다. 가수용단지와 임대주택에 입주할 수 있는 주거권을 보장한 부천 소사지구와 흑석시장의 경우도 일종의 순환 재개발 방식으로 영업권이 보장된 사례다.

인터뷰 | 정삼례 흑석시장철거민대책위 위원장
“누구도 망루에 죽으려 오르지 않는다”

[특집]‘재개발사업의 지혜’는 없는가

4명의 대책위 회원과 마지막까지 흑석시장 철거 싸움을 이끈 정삼례(53) 위원장은 눈 밑에 안와골이라고 눈을 보호하는 뼈가 없다. 흑석시장 철거 투쟁 과정에서 용역에게 맞아 뼈가 다 부스러졌기 때문이다. 용산 참사 희생자들의 분향소가 마련된 서울 한남동 순천향대병원에서 며칠째 밤을 새우고 있는 정 위원장은 “죽으려고 올라가는 사람은 없다. 다 살기 위해 망루에 오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1년 동안의 긴 투쟁을 이길 수 있던 배경은 무엇인가?
“새벽에 무자비하게 강제 철거를 당한 후 철거용역에 맞서 끈질기게 싸웠지만 조합 측의 회유와 협박에 많은 철거민이 생존권을 포기하고 떠났다. 법적인 문제나 버틸 수 있는 방법 등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114에 물어봐서 전철연(전국철거민연합)에 연락했고, 전철연 산하 각 지역 철대위와 전국빈민연합 등이 함께 해 1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시기에 승리했다.”

철거투쟁에서 망루가 자주 등장한다. 그 이유는?
“지상에서 싸우는 것을 우리끼리는 ‘바닥투쟁’이라고 한다. 바닥투쟁은 조합이나 시공사 측의 협박에 괴롭고, 하루 종일 철거 용역에 대비해야 하는 등 고통이 크다. 그래서 망루를 짓고 올라간다. 상대적으로 투쟁을 오래 끌 수 있고, 우리만의 고립된 싸움을 넘어 여론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부에선 전철연의 가세로 철거투쟁이 과격해졌다고 비판한다.
“용역깡패에게 시달리고 하루아침에 집과 영업장을 빼앗겨 거리로 나앉게 된 사람들끼리 서로 이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서로 절실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의지가 되고 힘이 된다. 전문 시위꾼이나 원정시위대로 매도하는 것은 철거민의 사정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재개발조합은 조직화하지 않은 철거민을 얕보고 대충 회유와 협박으로 내몬다. 전철연이 연대하면 그제야 협상을 하자고 나선다. 전철연은 철거민의 힘이다.”

용산 참사 이후 관 주도의 중재기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용역이 부르면 금방 달려오고 세입자가 부르면 한참만에야 나타나는 게 경찰과 관청이다. 나중엔 119도 안 온다. 용역과 싸워 부상해 맞고소하면 우리에게 더 많은 벌금이 나온다. 중재기구가 어떤 과정을 통해 어떻게 만들어질지는 지켜봐야겠지만 현재로선 믿음이 가지 않는다. 결국 조합과 건설업자, 자본 편들기에 나설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글·사진 | 조득진 기자 chodj2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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