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

“여성이 행복해야 대한민국도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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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랜드마크로 자리 잡은 서울시 ‘여행(女幸) 프로젝트’

오세훈 서울시장이 2008년 10월 22일 열린 세계여성포럼 개회식에서 환영사를 하고 있다. <서울시 제공>

오세훈 서울시장이 2008년 10월 22일 열린 세계여성포럼 개회식에서 환영사를 하고 있다. <서울시 제공>

정책은 진화한다. 정책에서 진화란 정책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책 수요를 확장하고 또다시 확장된 수요를 충족해 나간다는 의미다. 일종의 정책 개혁이다. 서울시와 오세훈 서울시장의 정책 랜드마크로 자리 잡은 ‘여행(女幸) 프로젝트’ 즉 ‘여성이 행복한 도시 프로젝트’는 그런 취지에 부합하는 정책으로 손꼽히고 있다.

‘여행 프로젝트’는 여성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 여성을 ‘이용한’ 도시정책이다. 여성의 시각과 감수성을 시정에 반영(이용)해 도시 발전의 밑거름을 삼자는 취지다. 이를테면 여성이 행복한 서울을 만들어야 남성도 행복하고 대한민국도 행복해진다는 얘기다. 오 시장은 한 달에 두어 차례 시장이 직접 주재하는 ‘여행 프로젝트’를 위한 아이디어 간부회의를 주재한다. 또 여성가족정책관실에 정책 컨트롤 타워 역할을 맡겼다. 여성가족정책관실에 시청 안에 있는 180여 개 과(課)에 대한 지휘 권한을 주는 파격적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이다. 이 사업이 시작된 지는 2년도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화장실 개선 ▲주차시스템 개선 ▲브랜드 콜택시 도입 ▲급식 개선 등 핵심사업을 포함해서 무려 100여 개 사업으로 확장하는 등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둔 것은 이런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화장실 개선·브랜드 콜택시 도입
‘오세훈식 시정’이라는 별칭이 붙은 ‘여행 프로젝트’는 공약사업이 아니다. 처음부터 계획한 시정사업이 아니라는 얘기다. 발상은 우연히 나왔다. 오 시장은 2007년 취임 초 직원들과 릴레이 대화 시간을 마련했다. 6급 이하 여직원과 만남의 자리였다. 한 여성 직원들에게 “우리는 운동화밖에 신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 서울시 주변길이 자갈로 돼 있어 하이힐을 신지 못한다는 얘기였다. 부인 송현옥씨와 서울 인사동에 나갔을 때 난감했던 경험이 불현듯 그의 머리를 스쳤다. 보도블록 틈새에 하이힐이 끼어 부러졌다. 종로까지 걸어가서야 수선공을 만났을 수 있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서울시가 나를 먹여살린다”던 수선공의 얘기였다. 이게 바로 날로 확장되고 있는 여성 행복 프로젝트의 시작이다.

여행 프로젝트는 서울시정의 사각지대를 되돌아보는 정책이다. 사실 전임 시장인 이명박 대통령이 청계천 복원, 교통시스템, 녹지화사업, 재개발사업 등 굵직한 사업을 마무리하거나 추진해온 터여서 오 시장은 전임 시장과 차별화를 위해 고민에 빠졌다. 오 시장은 첫 간부회의 때 “시민의 일상생활이 곧 서울시정의 대상”이라면서 “서울시의 정책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겠다”고 선언했다. 여성의 눈으로 시정의 마스터플랜을 다시 짜자는 선언이다. 여행 프로젝트를 생활밀착형 시정의 모델로 지목한 것이다.

오세훈 서울시장 주재로 여행 프로젝트 보고회가 열리고 있다. <서울시 제공>

오세훈 서울시장 주재로 여행 프로젝트 보고회가 열리고 있다. <서울시 제공>

이 정책의 발안자는 ‘페미니스트’인 오 시장이다. 그는 국회의원 시절에도 여성 문제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았다. 격번제 여성비례대표제는 ‘오세훈 정치개혁법’의 한 부분이다. 그는 호적법 개정을 가장 선도적으로 추진했던 사람이다. 이 같은 여성 존중의 사고와 함께 섬세함이 만들어낸 정책이 바로 ‘여행 프로젝트’다.

‘여행 프로젝트’가 시행 초기부터 만족한 결과를 낳은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공무원의 남성적 사고가 정책 입안에 큰 장애가 됐다. 남성적 시각으로는 섬세함이 필요한, 자질구레한 여성의 불편·불안·불만 사항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초기 입안된 사업 내용은 남녀평등, 일자리 창출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오 시장은 “이 정책에 힘도 실어줬지만 성과가 없어서 속도 많이 상했다”면서 “시간이 필요했던 사업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여행 프로젝트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건설공사가 아니다. 의식의 변화가 전제되는 소프트 프로젝트다. 또 사업 내용도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 특히 정책을 입안하는 공무원들의 사고가 변해야 했다. 여성의 생각을 빌려와야 했다. 싱크탱크로 ‘여행동반자’(여성계 지도자)를, 일반 시민 사업제안 그룹인 ‘여행 프로슈머’, 자치구별 활동가로 구성된 ‘자치구 여행포럼’ 등을 꾸리면서 이 사업의 속도는 빨라졌다. 여성용 화장실 변기 확대, 육아부담을 경감하기 위한 영유아 플라자 설치·운영, 초등학교 급식 도우미 지원, 아파트 단지 내 범죄 예방을 위한 CPTED(환경설계를 통한 범죄 예방) 시스템 도입 등이 구체적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물론 ‘시민고객’의 폭발적 호응도 얻었다.

세계여성학대회서 주목 끌어
이런 변화에 획기적 전기가 된 것은 국내가 아니라 해외의 평가였다. 2007년 12월에 열린 세계대도시협의회 여성네트워크 브뤼셀 포럼과 2008년 7월에 개최된 제10차 마드리드 세계여성학대회에 소개된 ‘여행 프로젝트’는 세계 여성계의 주목을 끌었다. 특히 2008년 2월 52차 유엔여성지위위원회에서 이 내용이 발표되자 유엔은 ‘해외 도시에 전파하고 공유할 만한 가치가 있는 정책’으로 평가했다.

진화된 여행 프로젝트는 전국 자치단체는 물론 기업에도 전파되고 있다. 조은희 서울시 여성가족정책관은 “생활 속에서 ‘여행정책’이 자치구는 물론 서울시 국·실, 다른 지방자치단체에 물처럼 흡수되고 있다”면서 “‘여행 프로젝트 정진대회-여행 동반자 어울림의 마당’에 출품된 작품(사례)이 무려 133건에 이른 것만으로도 그 파급 효과가 얼마나 큰지 짐작하고도 남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현대증권의 모나코뷰티크사업도 여행 프로젝트에서 착안한 것이다. 이뿐 아니라 서울시 정책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방문한 외국 공무원이 지난해 1000명이 넘는데 이들이 특히 ‘여행 프로젝트’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는 게 서울시 고위 관계자의 전언이다.

정책 진화의 대전제는 적응력이다. 전 세계적인 경제 위기 속에서 2009년 여행 프로젝트는 경제 회복을 뒷받침하는 방향으로 초점이 바뀌고 있다. 김용복 서울시 여성정책담당관은 “유능한 여성 인력이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경제 회복에 일조할 것”이라면서 “특히 보육환경의 개선(서울시 어린이 집)과 고학력 여성의 일자리 연계(엄마가 신났다)가 그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조은희 정책관도 “‘서울의 어린이집’이라는 인증이 붙은 보육시설에는 안심하고 아이들을 맡길 수 있도록 하는 제도”라면서 “민간보육시설을 국공립(752개)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물론이고 서비스도 수요자 맞춤형(주·야간·주말)으로 하는 포털서비스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경은 기자 jj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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