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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순의 KBS 관제언론으로 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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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물타기에 왜곡까지… 투쟁기자 5명 정직 등 징계

1월 22일 KBS 기자들과 PD들이 본관 민주광장에서 사측의 징계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김문석 기자>

1월 22일 KBS 기자들과 PD들이 본관 민주광장에서 사측의 징계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김문석 기자>

KBS는 지금 위기다. TNS미디어코리아 조사에 따르면, KBS <뉴스9>의 시청률은 1월 23일부터 25일까지 3일 연속 SBS <8뉴스>에 뒤졌다. <뉴스9> 시청률은 1월 23일에는 13.7%, 토요일인 24일에는 10.2%, 일요일인 25일에는 8.9%를 기록했다. 반면 SBS <8뉴스>는 23일 14.4%, 24일 11.0%, 25일에는 9.3%를 기록했다. 한 KBS 기자는 “우리는 2TV 뉴스 시청률에서도 SBS <8뉴스>를 앞지른 적이 있다. 간판 뉴스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SBS에 뒤졌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KBS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시계를 돌려 1월 16일 이후 2주간의 상황을 살펴보자. 1월 16일 밤 KBS 경영진은 정연주 전 사장 강제 퇴임 과정에서 KBS 이사회를 방해했다는 이유로 양승동 사원행동 공동대표(당시 PD협회장)와 김현석 대변인(당시 기자협회장)을 파면하고, 이사회 저지 투쟁에 앞장선 성재호 기자를 해임했다. 박승규 전 노조위원장 등 다른 5명에 대해서는 정직 등 징계를 내렸다. 기자협회와 PD협회는 1월 22일과 23일 이틀 동안 제작 거부 투쟁에 돌입했다. 일선 기자와 PD 들이 실무에서 손을 뗀 사이 간부급 사원들이 프로그램 제작에 투입됐다. 1월 28일에는 징계 수위를 놓고 회사와 협상하던 노조가 노조원들에게 일방적으로 업무 복귀 지침을 내리자 기자협회와 PD협회는 무기한 제작 거부를 선언하고 회사와 노조를 압박했다. 제작 거부에는 1000여 명의 기자와 PD가 참여했다. 작년 8월 정연주 전 사장 강제 퇴임과 연말 언론노조 총파업 국면에서 소극적인 모습을 보인 점에 비추어 이례적인 수준의 열기다.

‘뉴스9’ 시청률 SBS에 뒤져
KBS 기자와 PD 들이 제작 거부라는 초강수를 둔 것은 표면적으로는 부당 징계에 대한 반발이다. 그러나 내부를 들여다보면 이병순 사장 취임 이후 달라진 조직 분위기에 대한 구성원의 위기의식이 중징계를 계기로 밖으로 터져나온 것으로 보는 게 맞다. 김덕재 PD협회장은 “강력한 투쟁 동력이 모인 것은 일차적으로는 회사 쪽의 중징계 때문이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달라진 사내 분위기”라면서 “이병순 사장 취임 이후 강압적인 분위기가 조직을 지배하면서 사원들의 불만이 누적됐다”고 말했다.

KBS 구성원들의 위기의식은 심각한 수준이다. 특히 사내 어떤 직능 단체보다 비판정신을 곧추세워야 하는 기자들이 느끼는 불만과 자괴감은 비등점을 넘어서고 있다. 특히 코비스라는 이름의 사내게시판과 달리 익명 게시가 가능한 KBS 기자게시판에 올라온 글에는 이병순 사장 취임 이후 KBS 뉴스가 어떤 식으로 왜곡되고 있는지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작년 연말 글을 올린 한 기자는 12월 4일 <뉴스9>에서 보도한 포항 지역 SOC 예산 증액 관련 보도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 기자는 당시 취재 기자가 작성한 “대통령 고향인 포항과 경북에 건설 예산이 대폭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라는 앵커 멘트가 실제 뉴스에서 “지역 편중 현상이 뚜렷했습니다. 특히 포항 등 경북 지역의 예산이 대폭 늘었습니다”라고 바뀌었다고 지적했다. ‘대통령 고향에 대한 지원 증액’이라는 뉴스의 핵심을 희석시켰다는 것이다. 이 기자는 또 원래 리포트에 들어 있던 “대통령의 고향에 예산을 우선 지원한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라는 내용은 실제 뉴스에서는 아예 통째로 빠져버렸다고 지적하고, “뉴스를 갖고 장난치는 것은 우리 조직의 근본을 허무는 중차대한 일”이라고 비판했다.

또 다른 기자는 연말 방송법을 둘러싸고 벌어진 여야 공방을 다룬 보도에 대해 “참담함을 이길 수 없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해당 보도가 ‘기계적 균형’에 치우친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KBS 뉴스를 보면 국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게 뭔지 알 수 없다. 이게 9시 뉴스에서 단신으로 방송해야 할 뉴스인가”라고 비판했다. 다른 한 기자는 “조금이라도 비판성 아이템이 올라오면 오전엔 9시로 잡았다 오후엔 소리소문 없이 빼고… 너무 속보이는 일이 매일 반복된다”고 자괴감을 토로했다.

용산 참사와 관련한 보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민주당이 공개한 진압 당시 경찰의 무전녹취록에 관한 보도를 비판한 한 기자는 KBS 보도가 사안의 진위를 가리는 대신 문제의 본질을 여야 공방으로 변질시켰다고 지적했다. 이 기자는 “이래서는 안 된다. 이런 일이 쌓이고 쌓이면 결국 우리 뉴스는 죽는다”면서 “요즘 본업 외에 일거리가 하나 더 늘었다. 상식이 예사로 짓밟히고 온갖 왜곡과 비틀기, 물타기가 횡행하는 이 불의한 언론의 기록을 모아 나중에 백서로 출간하려 한다”고 밝혔다.

기자·PD들 “제작 거부” 초강수

1월 29일 김덕재 KBS PD협회장(왼쪽)이 중징계를 받고 농성 중인 양승동 사원행동 공동대표(중앙), 김현석 대변인(오른쪽)과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남호진 기자>

1월 29일 김덕재 KBS PD협회장(왼쪽)이 중징계를 받고 농성 중인 양승동 사원행동 공동대표(중앙), 김현석 대변인(오른쪽)과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남호진 기자>

이 같은 KBS 뉴스의 공정성 훼손은 지난해 8월 말부터 이병순 사장이 단행한 일련의 인사 및 조직 개편이 낳은 필연적 결과물이다. 이 사장은 작년 9월과 12월 두 차례 인사를 통해 정부에 비판적인 시사 보도 프로그램을 제작한 기자와 PD, 이병순 사장 취임을 반대한 사원행동 소속 사원들을 대거 한직으로 발령냈다. 특히 12월 29일 단행한 인사는 ‘친한나라당 반정연주’ 세력의 전면 부상으로 평가된다. 2006년 한나라당 의원 등과 집권 후 언론 장악 시나리오를 논의한 ‘강동순 녹취록’ 파문의 주역인 윤명식 PD는 외주제작국장으로 임명됐다. 이병순 사장 취임 이후 KBS 뉴스의 친정부화를 총지휘한 고대영 보도총괄팀장은 보도국장으로 승진했다. 조직도 ‘게이트키핑’을 강화한다는 명목으로 기존의 팀제를 ‘대국소팀제’로 바꿨다. 양승동 사원행동 대표는 “명분은 게이트키핑 강화지만 실제로는 이 사장의 조직 장악이다. 데스크나 선임을 모두 자기 사람들로 채웠다”고 평가했다.

이병순 사장이 취임 이후 넉 달 동안 친정 체제를 강화하면서 KBS의 비판적 분위기를 질식시키고 있지만,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1월 29일 KBS 경영진은 양승동 PD, 김현석 기자, 성재호 기자에 대한 징계 수준을 파면 해임에서 정직으로 크게 낮췄다. 민필규 KBS 기자협회장은 “회사가 사실상 사원들에게 굴복한 것”이라면서 “앞으로는 회사가 일방적으로 독주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향후 뉴스 공영성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면서 이번 투쟁의 동력을 발판삼아 2월 방송법 투쟁으로 동력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KBS는 지금 관제방송으로 가느냐, 공영방송의 위상을 다시 회복하느냐 갈림길에 서 있다. 몇 가지 불안 요소는 여전히 남아 있다. 제작 거부 투쟁을 통해 이병순 사장의 일방 독주를 막아내기는 했지만 보도와 제작의 핵심에는 여전히 이병순의 사람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간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던 노조는 이번에도 사원들의 전폭적인 신뢰를 회복하는 데는 실패했다. 노조가 업무 복귀 지침을 내린 1월 28일 KBS 구성원 사이에서는 “노조가 우리를 배신했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노조 집행부에 사원행동 구성원들이 참가하는 문제도 마무리되지 않았다.

양문석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총장은 “지금 정국에서 반MB 진영이 MB 진영과 힘의 균형을 맞추려면 언론노조가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고, 그러자면 KBS가 전면에 나와야 한다”면서 “KBS의 싸움은 KBS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정국과 관련해서도 매우 중요하다”고 평가했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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