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재야 다시 등장, 제2의 87년 되나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용산 참사 계기 야당·시민단체 결집… 제2촛불 타오를 가능성

1월 28일 밤 전국철거민연합 회원들이 용산 참사 현장에서 철거민 탄압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1월 28일 밤 전국철거민연합 회원들이 용산 참사 현장에서 철거민 탄압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인내의 비등점에 도달했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김인국 신부의 말이다. 사제단은 2월 2일 청계광장에서 또다시 시국미사를 열기로 결정했다. 김 신부는 “사제들이 침묵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 국민들의 정신적 공황과 영혼의 절망을 더 두고볼 수 없어 다시 나오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촛불정국 이후 침체 상태에 빠져 있던 시민사회 진영에 다시 재생의 바람이 불고 있다. 사실상 1987년 이후 사라진 재야의 재집결 형국이다. 물론 계기는 용산 참사다. 생존권을 박탈당한 세입자 5명과 경찰 특공대 대원 1명이 숨진 이 참혹한 사건은 정부와 시민사회 진영의 전면전을 예고하고 있다.

2월 1일 본격 장외투쟁 돌입
하지만 이번 재야의 재집결·재등장 기류에는 집회의 자유를 제약하는 집시법과 집단소송법,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인터넷 실명제법 등 민주주의 기본을 훼손하려는 정부의 반민주적 태도와 비정규직 계약 기간을 2년에서 4년으로 늘리는 비정규직법 개정안, 이에 반해 재벌에 방송과 은행을 허용하는 정부의 친재벌 정책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야당과 시민사회단체, 종교인 들은 용산 참사를 ‘생명과 인권에 저지른 폭력’이자 ‘MB정권의 일방적 정책이 낳은 필연적 귀결’로 규정했다. 김인국 신부는 “김주열 열사와 박종철 열사의 죽음이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의 민주주의 파괴가 빚은 결과이듯, 용산 참사도 MB정권 정책의 당연한 결과”라고 말했다. 김 신부는 “현 정권은 과거 독재정권의 온갖 악질적인 요소를 모두 종합한 완결판 정권”이라고 비판하고 “얼마 전 사제단 창립기념식에서 우리 사제들은 현 시국이 사제단 창립 당시의 절박한 상황으로 회귀했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고 말했다.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집행위원장 가섭 스님은 “용산이 아니라 그 어디에서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고 평가했다. 고계현 경실련 정책국장도 “공안에 의존하는 통치방식이 이런 일을 발생시켰다”고 진단했다.

촛불정국과 달리 이번에는 야당 정치인들도 시민사회와 적극적인 연대 의지를 밝히고 있다. 1월 29일 오전 11시 기독교회관 2층에서 열린 ‘제정당-시민사회단체-각계 인사 공동 기자회견’에 참석한 정세균 민주당 대표는 “공권력이 폭력이던 시절이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깨졌다”면서 “용산 참사는 공안통치가 만든 참사”라고 규탄했다. 이 자리에는 시민사회단체 대표만이 아니라 강기갑 민노당 의원, 안희정 민주당 최고위원, 진보신당 노회찬 전 의원 등이 참석해 본격적인 반MB 전선을 구축하겠다고 다짐했다.

2일 시국미사·5일 시국법회
정상호 한양대 제3섹터 연구소 교수는 이러한 야당과 시민사회단체의 공조에 대해 “촛불정국은 정당이 없는 시민사회만의 움직임이었다”면서 “이번 참사는 단순 사고가 아니라 정부 정책의 필연적 귀결이라는 점에서 정당과 시민사회단체의 연대는 좋은 선택”이라고 평가했다.

1월 29일 서울 종로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정당 시민사회단체 각계 인사 공동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용산 참사 진상 규명과 관련자 처벌 등을 요구하고 있다. <김문석 기자>

1월 29일 서울 종로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정당 시민사회단체 각계 인사 공동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용산 참사 진상 규명과 관련자 처벌 등을 요구하고 있다. <김문석 기자>

하승창 시민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과 안희정 최고위원이 함께 읽은 선언문의 어조는 사뭇 비장했다. 선언문은 “지금 민주주의와 인권, 대다수 국민의 생존이 갈수록 위험해지는 백척간두의 상황이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다. 이 중대한 위기 상황에서 시민사회단체와 정치권이 따로 있을 수 없다”고 규정한 후 “오늘 여기 모인 우리 모두는 국민의 이름으로 2월 1일의 정의로운 투쟁을 선포한다”고 말했다. 이 선언 그대로 야당과 시민사회단체는 2월 1일 청계광장에서 ‘폭력살인진압 규탄 및 MB 악법 저지를 위한 국민대회’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장외투쟁에 돌입한다.

촛불정국에서 시민들의 좌절감이 극점에 도달했을 때 거리로 나와 시민들의 마음을 달래주었던 종교인들도 다시 거리로 나올 예정이다. 2월 2일에는 사제단의 시국미사가 예정돼 있고 불교계는 2월 5일 용산 현장에서 시국법회를 열 계획이다. 원불교 사회개벽교무단과 기독교계는 촛불정국 때와 같은 수준의 법회나 기도회 일정을 잡아놓지는 않았다. 사회개벽교무단은 대신 현재 용산 참사 범대위 종교분과에서 논의 중인 4대 종단 합동위령제에 참여할 예정이다. 기독교계는 2월 2일 검찰청 앞에서 철저한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다음 날인 3일에는 경찰청 앞에서 강경진압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 계획이다. 진보적 기독교 단체인 예수살기 최헌국 목사는 “진상규명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시국기도회를 열 수도 있다”고 밝혔다.

지난 독재정권 시기 해직된 언론인들도 결의를 다지고 있다. 정동익 동아투위 위원장은 “과거 전두환 정권 당시 민주화 운동을 함께한 조선투위, 동아투위, 해직언론인협회 세 단체가 그동안에는 만날 일이 없었지만 요즘 언론 상황을 보면서 ‘좌시할 수 없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조만간 현 시국과 언론 탄압에 대해 언론계 원로들이 발언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촛불시민들도 용산 참사 이후 정국을 주시하고 있다. 지난해 8월 15일 이후 386세대를 중심으로 꾸려진 애국촛불연대는 그동안 흩어진 촛불시민들을 다시 끌어모으기 위해 노력해왔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이번 참사를 계기로 촛불집회의 동력을 다시 모을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애국촛불연대는 “3월 전국적인 촛불집회를 열 계획을 갖고 있었으나 용산 참사를 계기로 시기가 좀 더 앞당겨질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용산 참사 현장에 내걸린 현수막. 시민들이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마음을 담은 문구가 적혀 있다. <정원식 기자>

용산 참사 현장에 내걸린 현수막. 시민들이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마음을 담은 문구가 적혀 있다. <정원식 기자>

한국대학생연합(한대련)은 2월 6일 5기 한대련 건설을 위한 대표자 대회를 연 후 7일에는 대학생 등록금 인하를 위한 투쟁결의대회와 용산 철거민 책임자 처벌을 위한 대학생대회를 열 계획이다. 등록금 인하 투쟁은 한대련이 자체적으로 추진하고 용산참사규탄대회는 한총련 등 다른 대학생 단체와 공동으로 주최한다.

관심의 초점은 야당과 시민사회단체가 손을 잡고 정권에 대한 투쟁 결의를 다지는 현 기류가 지난해 여름에 이어 제2의 촛불로 타오를 가능성은 얼마나 되는 것일까, 나아가 1987년 시민혁명을 기대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는 “이 문제 때문에 지난해와 같이 나올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연말부터 덕수궁 앞에서 촛불산책을 진행하고 있는 열린교회 정연길 목사도 “당장은 그렇게 크게 일어날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호기 교수는 “지난 촛불집회 이후 시민들이 지쳐 있고 정부에 대한 냉소적인 시각이 있다”면서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다. 장석준 진보신당 정책팀장은 조금 다른 시각에서 유보적인 전망을 했다. 장 팀장은 사견임을 전제로 “분노가 폭발하고 있지만 이해 당사자들의 범주를 벗어나면 절박성이 떨어지는 부분이 있다”면서 “지난해 촛불정국은 특정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문제였다는 점에서 지난해와 같은 수준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예측했다.

반면 정상호 교수는 “당장은 경제 위기 등 여파로 관망하고 있는 상황일 수 있다”면서 “지난해 촛불과 달리 중산층의 이해가 걸린 문제는 아니지만 우리 사회는 일정 수위 이상의 정권 폭력에 대해 국민의 저항이 분출한 역사가 있다”고 말했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1월 24일 그 추운 날씨에도 서울역에 상당수 시민이 참가한 것을 보고 놀랐다”면서 “87년에도 초기에는 몇천 명 규모를 넘어서지 않았다. 시민들의 참여는 갈수록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확산 여부는 정부 대응에 달려
현 시점에서 정당과 시민사회단체만 반MB 투쟁이 일반 시민들까지 참여하는 광범위한 촛불집회로 확산되느냐 여부는 향후 정부의 대응에 달려 있다. 제2의 촛불 가능성에 대해 유보적인 조국 교수도 “사회경제적 약자들에 대한 강경한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촛불시위를 스스로 초래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장석준 정책팀장도 “이 사안만으로 대규모 촛불이 점화될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비정규직 문제나 청년실업 문제 등이 겹칠 경우에는 시민들의 더 광범위한 직접행동을 부를 수 있다”고 말했다.

당장 촛불집회가 들불처럼 번지느냐와 관계없이 용산 참사가 현 정권에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지난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에서 터져나온 국민적 저항이 국민의 건강권에 대한 현 정권의 무지와 무시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용산 참사를 계기로 결집하고 있는 반정부 투쟁의 동력은 사회적 약자를 국민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정부의 정당성에 대한 전면적인 문제제기의 성격을 띠고 있다. 가섭 스님은 “성장만 생각하는 일방주의 정책에 던지는 강력한 경고음”이라고 지적했다. 오창익 사무국장도 “용산 참사는 이 정권이 돈을 기준으로 국민과 비국민으로 갈라놓고 있다는 걸 보여줬다”면서 “정부가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대응한다면 정권에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관련기사

바로가기

주간경향 댓글 정책에 따라
이 기사에서는 댓글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