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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정비결 출판 양대산맥 명문당·남산당 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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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정비결은 대한민국 최대 스테디셀러”

토정비결은 필사본 성격으로 손에서 손으로 전래됐다. 얼마나 필사해 읽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이러던 토정비결이 대략 1910년부터 인쇄본으로 유통되기 시작됐다. 물론 많은 출판사에서 인쇄했고 요즘도 2개 출판사에서 발행, 매년 1만 권 정도 꾸준히 팔린다. 우리 서적사(史)에서 100년 동안 꾸준히 인쇄돼 팔린 책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대단한 ‘스테디셀러’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한 번에 수만 부씩 발행하는 여성지 별책 부록으로 유통된 것까지 합하면 아마 <토정비결>은 ‘훈민정음 창제 이래 베스트셀러’라고 할 수 있다.

재야 한학자 김혁제 선생이 설립한 명문당

80년이 넘은 역사를 대변하 듯 안국동에 있는 4층 건물의 명문당은 사무실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책으로 뒤덮여 있다.

80년이 넘은 역사를 대변하 듯 안국동에 있는 4층 건물의 명문당은 사무실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책으로 뒤덮여 있다.

토정비결을 본격적으로 출판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 때다. 당시 태화서관, 세창서관 등 3~4곳에서 토정비결이 나왔다. 하지만 지금까지 토정비결을 출판하는 곳은 명문당과 남산당 두 곳뿐이다. 명문당은 1930년대 <42구 토정비결>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토정비결>을 펴냈고, 남산당 역시 1950년대부터 <48구 토정비결>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두 출판사가 토정비결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는 셈이다.

현재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있는 명문당은 1903년생인 송정 김혁제 선생이 1923년 10월 설립한 출판사다(1970년대 후반 안국동에 터를 잡기 전에는 적선동에 있었다). 그 오래된 역사를 대변하듯이 보통의 출판사 건물과는 판이하다. 4층짜리 건물 곳곳이 온통 책으로 쌓여 있어 사무실로 들어가는 길을 찾기 힘들 정도. 명문당 배인준 이사는 “건물 전체가 온통 책이라서 예전에 나왔던 책을 정리하는 것도 힘들다”면서 “이곳 말고도 다른 곳에 책을 모아둔 창고가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명문당은 김혁제 선생의 아들인 김동구씨가 30여 년째 운영하고 있다. 김 대표는 “아버지는 재야 한학자로 한문에 관한 책을 많이 내셨다”면서 “명문당은 일제강점기 때 보통학교 교재·전과를 만들면서 번창했는데, 당시에는 만주까지 책을 팔 정도였다고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대표의 말대로 명문당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출판사였다. 김혁제 선생의 뛰어난 영업력과 출판기획 덕분이다.

명문당과 남산당에서 나오는 <토정비결>. 명문당은 <45구 토정비결>을, 남산당은 <48구 토정비결>을 펴내고 있다.

명문당과 남산당에서 나오는 <토정비결>. 명문당은 <45구 토정비결>을, 남산당은 <48구 토정비결>을 펴내고 있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명문당은 <각 학년별 보통학교 모범대전과 참고서> <각 학년별 보통학교 창가집 교과서생도용> <각 학년별 보통학교 조선어통해> 등을 펴내 큰 인기를 끌었다. 1950년대 이후에도 <영영사전> <명심보감> <명문세계문학전집> 등을 펴냈고, 특히 <사서오경>을 처음 완역해서 출간한 출판사라는 명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김혁제 선생은 <천기대요(天機大要)> <일년신수비결(一年身數秘訣)> <송정비결(松亭秘結)> <명자길흉자해법(名字吉凶自解法)> <해몽요결(解夢要結)> 등 수십 권의 역학책을 냈다.

역학자 김애영씨는 “한국역술인협회 회장직을 30년 이상 하셨던 지창용 선생께서 김혁제 선생이 뛰어난 분이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면서 “그분이 낸 책을 봐도 유식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중수 교수 역시 “그분에 대한 여러 가지 평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분 덕분에 역학의 자료가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는 것”이라며 “시절을 앞서 간 기업가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김혁제 선생은 1970년대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도대체 <토정비결>은 몇 부나 인쇄돼 얼마나 팔렸을까. 과거의 자료가 없기 때문에 추정치만 있을 뿐이다. 배인준 이사는 “<토정비결>의 판매 부수는 1970년대 이후로 좋지 않지만 명문당의 이름을 알리는 데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책자기 때문에 계속 출판하고 있다”면서 “짐작하건대 1930년대 출판 이후로 매년 1만~2만 권 팔린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한창 잘나갈 때는 2만 권을 넘은 적도 있다. 따라서 <토정비결>은 70여 년 동안 매년 인쇄하여 최소한 70쇄 이상이며 지금도 꾸준히 팔리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스테디셀러’인 것이다.

3대째 가업으로 내려오는 남산당

명문당과 남산당은 현재 아들과 손녀가 운영하고 있다. 명문당의 김동구 대표, 남산당의 권현진 대표(왼쪽부터).

명문당과 남산당은 현재 아들과 손녀가 운영하고 있다. 명문당의 김동구 대표, 남산당의 권현진 대표(왼쪽부터).

<토정비결> 출판사의 양대 산맥인 남산당은 현재 3대째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남산당은 권기주 선생이 1949년 설립했고, 아들을 거쳐 지금은 손녀인 권현진씨가 운영하고 있다. 설립자인 권기주 선생은 일제강점기 때 보통고시를 통과해 원산 가마원(현재의 소년원) 서무과장, 총독부 후생사회국장(원조물자를 취급하는 자리)을 지낸 공무원 출신이다. 권 선생은 운영이 힘든 소규모 출판사를 위해 을유문화사, 현암사 등 출판사와 함께 출판협동조합을 설립했고, 1·2·4대 조합장을 맡을 정도로 출판계에서도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다.

권 선생은 해방 후 공무원을 그만두고 출판사를 시작, 가마원 서무과장을 지내면서 경험했던 아이들의 심리를 정리한 <아동심리학>을 냈다. 당시 그의 집이 남산동에 있어 출판사 이름을 남산당이라 붙였다고 한다(지금은 서울 수유리로 자리를 옮겼다).

남산당은 1950년대부터 <토정비결>을 출판했다. 권 선생과 함께 남산당에서 일한 사위 이주성씨(1990년대 말까지 남산당 소장으로 일했다)는 “당시 어떤 분이 <토정비결> 지형(납 인쇄를 하기 위해 본을 뜬 두꺼운 종이)을 가지고 와 그 판권을 사 출판하기 시작했다”면서 “당시부터 명문당과 경쟁 관계였다”고 설명했다.

명문당과 남산당의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대한민력>이다. 민간달력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서점에 누가 먼저 배포하는지에 따라서 판매 부수가 확연히 달라졌다. 1950년대부터 두 출판사는 <대한민력>을 언제 인쇄하고 언제 서점에 배포하는지로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다. 남산당은 <대한민력>을 만드는 데 필요한 일출·일몰 시간 등 관련 자료를 관상대(현재 한국천문연구원)로부터 독점으로 제공받았다. 하지만 명문당이 영업력에서 앞섰기 때문에 남산당과 명문당은 자료를 공유해, 인쇄 시점과 배포 시점을 한날 한시에 하기로 하는 신사협정을 했는데 그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남산당의 <토정비결> 판매 집계 역시 과거의 자료는 남아 있지 않아서 추정만 할 뿐이다. 이주성씨는 “매년 1만~2만 권 팔린 것으로 기억한다”면서 “1970년대까지는 잘 팔렸는데, 그 이후는 내리막길”이라고 설명했다. 이곳 역시 50여 년 동안 50쇄를 거치며 70여만 권이 팔린 셈이다. 지금도 <토정비결>은 매년 2만 권 정도 인쇄하고 있다. 권현진 대표는 “요즘 <토정비결>의 인기가 떨어져서 운영하기 힘들지만, 한 권도 안 팔릴 때까지는 계속 낼 것”이라면서 “<토정비결>은 남산당의 자부심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글·사진 최영진 기자 c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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