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경기침체로, 세금으로, 뇌물로…세 번 죽는 미술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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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어 터진 악재로 많은 화랑이 개점 휴업 중이다. 사진은 전군표 전 국세청장의 부인 이모씨가 상납받은 그림 <학동마을>의 판매를 의뢰받은 서울 평창동 가인갤러리 입구.  <경향신문>

연이어 터진 악재로 많은 화랑이 개점 휴업 중이다. 사진은 전군표 전 국세청장의 부인 이모씨가 상납받은 그림 <학동마을>의 판매를 의뢰받은 서울 평창동 가인갤러리 입구. <경향신문>

미술시장의 체감온도는 바닥이다. 세상이 온통 경제 한파로 꽁꽁 얼어붙는다지만 미술시장은 아예 쩍쩍 금이 가기 직전이다.

경기침체로 컬렉터의 발길이 뜸해지기 시작하더니, 양도세 과세로 큰손들이 먼저 떨어져나가고, 급기야는 ‘학동마을 뇌물 사건’으로 미술시장에 찬바람만 휑하니 불고 있다. 미술계는 이번 국세청장 사건을 다 죽어가는 미술시장에 확인 사살을 한 것이라며 절망감에 빠져 있다.

옥션 낙찰률을 보면 한때 평균 80%를 옷돌던 것이 60%대까지 떨어졌다. 2009년 경매시장의 테이프를 끊은 꼬모옥션의 첫 경매는 처참할 지경이다. 1월 13일 마감한 경매 결과, 출품작 62점 중 43점이 대거 유찰됐다. 온라인 경매기는 하지만 낙찰률 30%는 경매 사상 찾아보기 힘든 기록적인 일. 침체된 경기를 감안하여 일부러 가격을 낮췄음에도 그나마 낙찰작 19점 중 15점이 경쟁 없이 최초 시작가에서 팔렸다.

작품 가격 1년도 안돼 반 토막
작품 가격의 하락세도 급전직하다. 2008년 초 대비 연말 가격을 보면 반 토막은 기본이고 3분의 1 이상씩 곤두박칠치는 작가가 한둘이 아니다. 이우환의 그림을 보면 그 사태의 심각성을 상징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그의 그림은 2006년, 2007년만 해도 없어서 못 팔 정도로 부르는 게 값이었다. 시작가의 10배가 넘게 낙찰되면서 한국 미술시장의 르네상스를 주도하던 최우량주였다.

그런 그의 작품이 2008년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고개를 숙이더니, 예외없이 반 토막이 나 생존 국내 작가 중 최고라는 명성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대표작 <점으로부터>가 6월까지는 호당 2000만 원을 유지했으나 12월엔 1000만 원대로 떨어졌다.

이대원의 경우는 그 정도가 더 심하다. 2008년 초 서울옥션에서 10호짜리가 1억5000만 원에 낙찰되었는데 12월 같은 옥션에서 12호짜리가 4000만 원에도 유찰되는 수모를 겪었다. 이런 추세에 뇌물 사건까지 터지면서 봄시장을 준비 중이던 화랑가가 방향을 잃어버렸다.

‘신정아 사건’이 날 때도,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이 불행한 눈물을 찔끔거릴 때도 미술시장은 이 정도로 심각하지 않았다. 당시에도 마치 큰일이 일어난 듯 호들갑을 떨었지만, 실제 미술시장은 잠시 비틀거렸을 뿐 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 건재함을 과시했다.

신정아 파문에 이어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 미술품 관련 폭로가 터지자 화랑가 이곳저곳에서 한숨 소리가 새어나왔다. 서울올림픽 이후 10년 만에 살아난 미술시장이 얼어붙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미술시장의 큰손인 재계가 지갑을 닫아버리면 미술시장도 숨통이 막혀버리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 메이저 화랑이 한동안 타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유명 화가의 전시회 때 모 대기업 오너 부인이 다녀갔다는 소문만으로도 판매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던 만큼 큰손의 칩거는 직격탄이었다. VVIP고객에게 발송했던 전시 팸플릿이 반송 도장이 찍혀 되돌아오는 경우까지 발생했다.

그러나 시장의 위축은 오래가지 않았다. ‘뇌물’의 여파는 도리어 미술시장의 구조를 긍정적으로 바꿔놓기도 했다. 그동안 고가의 그림과 큰손의 컬렉터, 그리고 대형 화랑이 좌지우지하던 메이저 시장 위주에서 마이너 시장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미술품도 중저가로 그 폭을 넓혀갔으며, 소비계층도 중산층까지 확대되면서 미술시장의 저변을 크게 넓히는 계기가 됐다. 2008년 8월 구서울역사에서 열린 아시아 대학생 청년작가 미술축제 ‘아시아프’를 보면 미술시장은 더 이상 특수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주었다. 몇십 만 원에서 비싸야 200만 원을 넘지 않는 행사장에 젊은 직장인은 물론 아주머니, 아가씨가 몰려들었다.

<행복한 눈물>(사진)이 화제가 되면서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은 물론, 국내 팝아트 작가들의 작품도 가격이 올랐다. 하지만 글로벌 경기침체와 국세청장 뇌물 사건은 미술시장을 그로기 상태로 만들었다. <경향신문>

<행복한 눈물>(사진)이 화제가 되면서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은 물론, 국내 팝아트 작가들의 작품도 가격이 올랐다. 하지만 글로벌 경기침체와 국세청장 뇌물 사건은 미술시장을 그로기 상태로 만들었다. <경향신문>

<행복한 눈물>이 화제가 되면서 강남 사모님들을 자극, 구매 취향을 바꿔놓았다. 너나 할 것 없이 ‘팝아트’를 외치면서 만화 같은 그림에 몰려들었다. <행복한 눈물>의 작가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은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덩달아 국내 팝아트 작가들의 작품도 몸값이 올랐다. 이동기, 권기수 등은 경매 때마다 낙찰가가 앞다퉈 올라갔다. 화랑 전시회에선 90% 넘게 팔려나갔다.

미술 역사상 유례 없는 절정기를 구가하던 시장이 글로벌 경기침체로 급격히 움츠러들더니, 양도세 과세로 균형감각을 잃는가 했는데, 숨도 고르기 전에 ‘국세청장 뇌물사건’의 결정타를 맞고는 그로기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미술계는 외부 환경의 변화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몸부림쳐왔다. 젊은 작가를 내세워 분위기 쇄신을 시도하는가 하면, 연말연시를 맞아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기획전을 열며 꺼져가는 불씨를 살려왔다.

특히 화랑마다 설날을 즈음해 나름의 특수를 기대하며 여러 가지 기획전을 준비했다. 그림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줄이고 부담 없이 찾아올 수 있도록 소품 위주 전시회를 마련했다. 선물로는 그림보다 나은 게 없다며 ‘그림색’을 바꾸고자 노력했다. 사실 그림은 100만 원 이하까지는 손비 처리하기 때문에 소품을 합법적으로 주고받을 수 있도록 인정받은 터다.

뇌물 파문 이후 거래시장 꽁꽁
그러나 국세청장 뇌물 사건이 미술계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행복한 그림 선물전’을 진행한 갤러리 포토하우스는 뇌물 파문 이후 한 건 거래하지 못했으며, 20일까지 열 계획이었던 갤러리 한국미술센터의 ‘용기백배-큰마음 작은 그림선물전’은 일정을 앞당겨 13일 셔터를 내려버렸다.

많은 화랑이 개점 휴업 중이다. 손님의 발길이 찾지 않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다. ‘선물’로 멋을 내려는 미술계의 노력에 ‘뇌물’로 먹칠을 해버린 셈이다. 미술계는 뇌물 불똥이 미술계에 튀는 것에 억울해한다. 당장의 발길이 끊긴 것도 답답하지만 미술품=뇌물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힐까 봐 더 걱정이다.

그러나 먼저 남을 탓하기 전에 자업자득은 아닌지 반성부터 해볼 일이다. ‘신정아 사건’ 때도 그렇고, ‘행복한 눈물’ 때도 그렇고, 이번 국세청장 뇌물건도 그렇다. 사건의 한 축엔 늘 미술작품이 있고, 미술인이 있고, 화랑이 관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억울해하지 않으려면 미술계 스스로 이들과 연결고리를 끊으려는 마음가짐과 체질 개선을 우선해야 한다.

박상용<아트마켓 애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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