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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0대 장년층, 아고리언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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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성이 큰 무기… 운동 경험 없어 시행착오도

촛불시위가 시작된 5월 2일, 청계광장에 모인 여학생들이 가면을 쓰고 촛불을 들고 있다. <정지윤 기자>

촛불시위가 시작된 5월 2일, 청계광장에 모인 여학생들이 가면을 쓰고 촛불을 들고 있다. <정지윤 기자>

Carpediem이라는 닉네임을 쓰고 있는 최진현(27·휴학생·경기 부천)씨는 요즘도 하루에 1~2시간씩 아고라에 들러 글을 읽는다. 글을 많이 쓰는 편은 아니지만, 촛불 연행자와 관련한 게시글이 올라오면 아는 범위에서 댓글을 단다. 고등학생 ‘안단테’가 올린 이명박 탄핵 요구 청원 글이 그가 아고라에서 처음 봤던 글이다. 그는 쇠고기 협상 관련 글을 계속 ‘눈팅’하다가 5월 초에서 중순께부터 촛불시위에 나갔다.

“일단 많은 사람이 모였다는 것을 뉴스에서 확인했기 때문에 두려운 마음은 없었습니다. 운동권 친구들은 공안 탄압을 주장했는데, 제가 전형적인 운동권은 아니었기 때문에 두려움은 적었던 것 같아요.”

미네르바가 누군지 아무도 몰라
2008년 5~6월에 벌어진 촛불시위는 그의 인생에서 전환점이 됐다. 5월 31일부터 6월 1일 심야, 그는 경찰에 연행됐다. 그는 거의 48시간이 지나서야 풀려났다. 난생 처음 경찰서 유치장을 구경했다. 그는 “그 뒤 가진 자들의 정권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서민이나 한국 사회의 현실을 다룬 책도 찾아 읽었습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카페 형태로 개설되어 있는 촛불연행자모임의 대표를 맡고 있다.

최씨처럼 연행까지 경험하진 않았더라도 많은 시민이 촛불시위 국면에서 아고라를 주목했다. 첫 촛불시위가 벌어지던 5월 2일. ‘스무 살의 대학 새내기’라고 밝힌 닉네임 sKUISYs이 올린 ‘광우병에 대한 관심이 흐지부지 사그라들지 않길’이라는 제목의 글이 아고라 자유토론방에서 가장 많이 읽은 게시글로 선정됐다. 조회 수는 16만7161회. 전날까지 가장 많이 읽은 글의 10배다. 광우병의 위험성을 역설한 그는 “한 명 한 명의 힘이 소중한 때”라며 “나 하나쯤 빠진다고 뭐 티나겠어? 이런 생각하시는 분들도 집회에 참가하길 바란다”고 적었다. 이 글에 달린 댓글은 무려 3002건. 닉네임 puruna가 올린 “청계천 시위 정말 세계 최고 수준이었습니다”라는 제목의 집회 참가 후기도 버금가는 주목을 받았다.

sKUISYs처럼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는 한 그가 누구인지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sKUISYs가 밝힌 ‘스무 살 대학 새내기’가 진짜인지도 알 수 없다. 로그인을 해야 글을 쓸 수 있지만 아고라의 토론은 철저하게 익명을 바탕으로 이뤄진다. 이메일조차 스스로 공개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하지만 ‘익명’은 때로는 진솔하고 때로는 날카롭게, 자신의 의견을 가감 없이 밝힐 수 있는 수단이다. puruna가 자신이 누군지 밝히진 않았지만 그날 열린 첫 촛불집회에 참석한 뒤 글을 남겼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익명성은 사회적 약자의 무기”라고 말했다.

오프라인에서 수십 년간 형성된 권위는 아고라 내에서 통용되지 않는다.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오직 실력과 진정성으로 평가받는다. 보수매체도 거부당했지만, 지난 촛불시위 과정에서 광우병대책위로 대표되는 기존의 민주화·시민운동의 의제 설정이나 조정에 대해서도 많은 누리꾼은 비판적이었다.

익명성으로 인한 역기능과 폐해도
미네르바는 아고라의 익명 시스템을 제대로 활용한 경우다. 경제 관료와 기성 언론에 대한 그의 비판은 가차없다. 한국 경제 위기에 대한 그의 경고는 불행히도 꽤 적중했다. 정부 당국이 어떤 식으로든 미네르바에 대한 개인 정보를 입수했으리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지만 익명성을 보장한 아고라 내에서 아직까지 미네르바가 누군지 아무도 모른다. 사실 미네르바나 경제방에서 활동하는 이른바 ‘고수’는 지금까지도 자유토론방의 핵심 토론 주제인 촛불시위와는 그다지 관계없다. 사회운동도 그렇지만 제도권 학계와 관계를 맺었을 가능성도 별로 없다.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미네르바를 아고라를 특징짓는 ‘시민지성’의 전형이라고 평가한다. “전통적인 지식분업 구도에서는 도저히 생산할 수 없는 지식과 담론을 만들어낼 능력을 가졌고, 그 역시 다년간에 걸쳐 보통 사람이 생업 현장에서 갈고 닦은 실력이라는 점에서 아고라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철저하게 익명성을 기반으로 한 공간이다 보니 역기능 혹은 폐해가 많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시위 진압 과정에서 경찰 폭력이 이슈가 되자, 시민들이 찍은 전경 사진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개하거나 관련 인터넷 자료를 뒤져 신상을 공개하는 등의 경우다. 일부 시위 참가자의 사진을 올려놓고 프락치 의혹을 제기했던 경우도 대표적이다. 조대엽 교수는 “익명성에서 오는 문제가 어느 정도 있는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실제 논의 과정에서 불확실하거나 정제되지 않은 의견을 배제하는 자정 능력을 보여주고 있는데도 일부 부정적인 측면을 과장하여 문제삼아 규제하려는 법을 만들려는 정부 당국의 태도가 더 문제”라고 말했다.

어쨌든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아고리언들이 온·오프를 넘나들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누리꾼 네트워크의 주축은 ‘경험적으로’ 3, 40대 장년층이 많다는 것이다(상자 기사 참조). 아고라 토론방에서 ‘권태로운창’이라는 필명으로 유명한 나명수씨는 1961년생이다. 그와 함께 <아고라> 책을 펴낸 채수범씨 역시 30대 후반이다. 채씨는 “거리에 나가면서 서로 안면이 익은 사람끼리 연락처를 주고받으면서 자연스럽게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는데, 그중에서도 나는 거의 막내뻘이었다”라고 말했다.
또 하나 공통점은 이들 온·오프 아고리언의 주축이 운동을 경험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 아고라 집회 공지를 도맡아했던 나씨도 환경 관련 동화를 쓰기는 했지만 대학 시절 운동권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촛불 이후’ 아고리언과 연계를 맺고 있는 커뮤니티들 내에서는 크고 작은 내홍이나 시행착오를 겪는 경우도 많다.

신 교수는 “기존의 권위가 무너지고 아고리언이 대안정치 세력으로 등장했지만 아직까지 아마추어리즘에 머무르다 보니 생기는 문제”라며 “아고리언의 정치적 열정·투쟁의지를 이끌어갈 수 있는 이념적·정치적 숙련 집단이 나와 스스로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10대 참여자 적고, 지역분포 차이 없어

[커버스토리]30~40대 장년층, 아고리언 이끈다

실제 다음 아고라를 주도하고 있는 사람의 성별이나 연령대는 어떻게 될까. 다음 측이 집계한 자료는 없다. 웹데이터 분석 통계기관 랭키닷컴 접속 자료에 따르면, 아고라에 접속하는 비율은 남성이 67.12~71.18%, 여성이 28.82~32.88%(2008년 5~11월 월별 통계)였다. 남성 대 여성의 비율은 얼추 7 대 3이다. 여기에 다시 연령대를 대입해보면 30대 남성>20대 남성>40대 남성>20대 여성>30대 여성 순이다.

특이한 것은 10대 비중이 작고 성인 사용자가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포털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나는 사용자들의 촛불집회에 대한 태도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 토론방에서 ‘지역논쟁’은 단골메뉴지만 지역분포에서 특이점은 없다. 아고라를 운영하는 미디어다음 뉴스팀 관계자는 “아고라 사용자도 다음 전체 사용자와 지역 분포에서는 딱히 차이가 없으며, 대체적으로 인구 분포와 일치한다”라고 덧붙였다. 적어도 통계상으로는 “촛불을 든 사람은 다 특정 지역 출신” 식의 주장이 바로 괴담이라는 결론이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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