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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총관 말하기를 “백두산은 조선인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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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정계비를 세울 때 역관으로 참여했던 김지남은 <북정록>에서 그 당시의 상황을 낱낱이 기록했다. <북정록>의 1712년 5월 8일자 일기에는 정계비를 세우러 떠나는 청의 책임자 목극등과 조선 역관 김지남의 대화가 상세하게 나타나 있다.

백두산 정계비를 세울 당시 청나라의 목극등과 동행한 화원이 그려 하나는 청 황제에게, 하나는 숙종에게 보내도록 한 <백두산 정계비도>. 위의 선은 목극등 일행이 지나간 길이며, 밑에 그은 선은 접반사 박권과 함경도 관찰사 이선부가 지나간 길이다. <규장각 소장>

백두산 정계비를 세울 당시 청나라의 목극등과 동행한 화원이 그려 하나는 청 황제에게, 하나는 숙종에게 보내도록 한 <백두산 정계비도>. 위의 선은 목극등 일행이 지나간 길이며, 밑에 그은 선은 접반사 박권과 함경도 관찰사 이선부가 지나간 길이다. <규장각 소장>

<숙정실록>과 <북정록>에 관련 기록
나(김지남)는 거연히 나아가 무릎을 꿇고 청하였다.
“소관이 절실히 우러러 청할 것이 있으나, 황송하여 감히 말씀드리지 못하고 지금까지 왔습니다.”
“자네가 나(목극등)에게 무슨 말하기 어려운 것이 있겠는가?” “소관은 조선의 백성이요, 백두산 또한 조선의 땅인데, 우리나라의 명산이라고 전해져 오고 있으므로, 원컨대 한 번 올라가 보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지만 길이 너무 멀어 이를 이룰 수 없었습니다. 대인(목극등)께서는 반드시 유윤길 화사원으로 하여금 산의 형세를 그림으로 그리게 하여 한 폭을 내려주신다면, 소관의 평생 소원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대인의 은덕을 어찌 다 헤아리겠습니까?” “대국의 산천은 그림으로 그려줄 수 없지만, 백두산은 이미 그대들 나라 땅이니 그림 한 폭 그려주는 것이 어찌 어렵겠는가?” “만약에 그것이 대국의 산이라면 어찌 감히 부탁할 마음이 생겼겠습니까?” “잘 알았네.” 나는 너무나 기쁘고 다행스러워서 어쩔 줄 모르고 물러나왔다. 숙소에 돌아와 두 사또에게 나아가 보고하였다. “오늘에야 비로소 좋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무슨 말인가?” 내가 총관(목극등)을 만나 주고받은 말을 아뢰자, “조정에서 염려하던 것이 오로지 그것이었는데, 총관이 ‘백두산은 그대들의 땅’이라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대가 계책을 써서 그들의 뜻을 탐색하고, 겉과 속을 꿰뚫어보니 참으로 일을 잘 한다고 하겠네.”
즉시 이상의 내용으로써 장계를 작성하여 보내고, 집에도 편지를 부쳤다.

여기에서 두 사또는 접반사 박권과 함경감사 이선부다. 접반사는 외교 사절을 맞이하는 조정의 관리 대표이니 사실상 정계비 획정의 책임자라 할 수 있다. 박권이 올린 장계는 조정에 도착한다. <숙종실록> 1712년 5월 15일에 이 내용이 나타난다.

접반사 박권과 함경감사 이선부가 13일에 치계(馳啓)하기를,
“역관이 백산 지도 1건을 얻기를 원하니, 총관이 말하기를 ‘대국의 산천은 그려 줄 수 없지만, 백산은 곧 그대의 나라이니 어찌 그려 주기 어려우랴’ 하였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백산 이남은 땅을 다툴 염려가 없을 듯합니다”하였다.

백산은 백두산을 말한다. <숙종실록>은 <북정록>에 나타난 사실의 연장선에 있다. 역관 김지남이 청나라와 관리와 대화한 사실을 접반사 박권에게 보고했고, 접반사 박권이 조정에 글을 올린 것이다. <숙종실록>에서도 백두산은 우리나라 땅이라고 청나라 관리가 인정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이렇게 본다면 두 기록에 나타난 역사적 사실은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진실임에 틀림없다. 어느 한 기록이 상황을 잘못 전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북정록>에 나타난 문맥 그대로의 의미라면 백두산 전체가 우리나라 땅이라는 것을 청나라 관리조차 인정했다고 볼 수 있다.

<윤호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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