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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통화 스와프 ‘선물’만 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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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경제 의존도 더 높아질 수밖에… 체결 공로 둘러싼 논란도 씁쓸

이명박 정부의 경제 관료들에 따르면, 10월 30일 “IMF 외환위기 때보다 어렵다”던 한국 경제가 ‘제2 외환위기’ 공포에서 벗어났다. 이날 새벽 한·미 간 300억 달러 한도의 통화스와프 협정이 성사됐기 때문이다. 통화스와프 거래는 양 국가가 현재의 계약 환율에 따라 자국 통화를 상대방의 통화와 교환하고, 일정 기간이 지나고 나서 최초 계약 때 정한 환율에 따라 원금을 재교환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관련해 외화 유동성에 대한 우려를 일거에 날려버렸고, 신흥국 중에서는 처음으로 미국과 협정 체결에 성공함에 따라 한국의 국가 위상을 한 단계 높였다는 것이 정부의 평가다. 청와대에서는 “미국산 쇠고기 재협상, 독도 문제 해결, G20의 한국 참여에 이은 부시 미 대통령의 네 번째 선물”이라는 반응이 나왔고, 재정부에서는 ‘강만수 극본, 신재민 연출로 나온 작품’이라는 자화자찬이 이어졌다.

‘달러 패권’ 회복 위한 미국의 자구책
부시 대통령과 전혀 ‘다른’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가 새 대통령으로 당선했지만 이명박 정부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 분위기다. “오바마가 됐어도 통화스와프는 변함없다”는 것. 과연 정부의 주장대로 통화스와프는 한국, 특히 이명박 정부에 각별한 애정이 있는 미국의 ‘선물’일까?

미국이 지난 9월 투자은행 리먼 브러더스가 파산한 이후 한 달여 만에 통화스와프 협정 체결 국가를 2개국에서 빠르게 14개국으로 늘린 것은 분명 자국의 이해관계 때문이다. 이번 협상에서 한국이 미국을 움직일 수 있었던 가장 효과적인 카드는 ‘미국 국채 매각’이었다. 한국이 세계 6위의 외환보유고를 가진 나라지만 실제 달러를 공급하기 위해서는 미국 국채를 매각할 수밖에 없다. 4일 한국은행의 발표에 따르면, 10월 말 현재 2122억5000달러의 외환보유액 중 유가증권이 90.7%(1924억7000만 달러)다. 이 중 미국 국채가 차지하는 비중이 꽤 될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에 휘말려 한국 등 신흥국들이 달러를 조달하기 위해 미국 국채를 팔기 시작하면 미국의 달러 가치는 추락할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7000억 달러의 구제금융 등 금융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국채 발행을 늘려야 할 상황에 신흥국들이 국채를 내놓는 일은 막아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미국이 ‘통화스와프 동맹’을 한국을 포함해 14개국으로 확대한 것은 ‘달러 패권’을 회복하기 위한 자구책으로 봐야 한다.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불가피했다는 얘기다. 기축통화란 국제간의 결제나 금융 거래의 기본이 되는 화폐로, 예전에는 영국의 파운드를 사용했으나 현재는 미국의 달러와 일본의 엔, 독일의 마르크를 사용하고 있다.

어떤 통화를 마구 찍어내면 그 통화의 가치가 떨어져야 정상이다. 하지만 기축통화는 주요 경제국들에 확산될수록 오히려 ‘강한 통화’가 되는 효과가 있다. 미국이 레이건 정부 이래로 계속된 천문학적 규모의 ‘쌍둥이 적자’(재정적자와 무역수지 적자)에서도 ‘슈퍼 파워’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달러가 기축통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달러가 ‘기축통화’의 지위를 잃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이 확산됐다. 미국발 금융위기를 2년 전에 예고했던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 등은 미국의 ‘적자 경제’가 계속될 경우 달러는 장기적으로 ‘휴지 조각’으로 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실제로 최근 중국과 러시아는 달러를 배제한 통화스와프를 체결했고,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탈달러 동맹’을 구축해왔다. 미국이 한국을 ‘통화스와프 동맹’에 신속히 편입한 이유 중 하나는 동아시아에서도 이런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어서다. 이번 금융위기를 계기로 노무현 정부 때부터 추진하던 한·중·일과 아세안(동남아 국가연합)의 공동기금 조성에 속도가 붙고 있다.

한국경제 버팀목 될지는 지켜봐야
이런 배경 때문에 장기적으로 볼 때 한·미 통화스와프가 결코 박수칠 일만은 아니라는 지적도 나온다. 미국 경제가 한국에 미치는 영향이 더 커졌다는 것이다. 금리정책을 포함해 일련의 금융시장 대응조치에서 미국과 보조를 맞출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실제로 한국은행은 미국을 포함한 7개국 중앙은행의 금리 인하 조치에 보조를 맞춰 10월 정기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기준 금리를 0.25% 포인트 낮춘 데 이어 지난달 27일 긴급 금통위를 소집해 다시 금리를 0.75%포인트 낮추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했다. 더군다나 미국 내에서 신용카드, 프라임 모기지 등 ‘제2의 부실 폭탄’이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른다는 우려가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 의존도가 높아졌다는 점은 결코 기뻐할 일만은 아니다.

이처럼 통화스와프 체결은 궁지에 몰린 한·미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성사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미 간 통화스와프가 없었던 것보다는 낫지만 정부 주장처럼 한국 경제에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있을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그럼에도 이번 협정이 한국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친 것만은 분명하다. 일주일 사이에 900선까지 떨어졌던 코스피지수가 1200선을 회복했고 1500원대를 위협하던 원-달러 환율도 안정세를 찾았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경질 위기에 몰렸던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통화스와프 체결의 공을 독차지하면서 다시 득세하게 됐다는 점이다. 재정부 한 관료는 강만수 장관을 지난 베이징 올림픽 때 이승엽 선수에 비유하기도 했다. 초판에 부진한 성적으로 수세에 몰리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홈런 한 방으로 국민들의 성원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던 이승엽 선수와 마찬가지로 강만수 장관도 통화스와프라는 ‘홈런 한 방’을 날렸다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도 직접 강만수 장관의 공을 챙기고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강 장관에게 모처럼 찾아온 호재가 길게 가지 못했다. 통화스와프 체결의 공로를 재정부가 독차지하려는 과욕이 문제였다. 이번 일로 강 장관이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에게 두 번이나 사과 전화를 했다는 사실이 지난 5일 뒤늦게 언론에 보도됐다. 일부 재정부 관료는 지난달 29일 오후 통화스와프 협상이 타결되기도 전에 미리 이 소식을 언론에 흘렸다. 재정부의 언론 플레이에 정작 협상의 주체이자 실무를 담당한 한국은행은 적잖이 당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최종 결정이 나지도 않은 상태였기 때문. 이 일로 강 장관은 이성태 총재에게 첫 번째 사과 전화를 했다.

또 대부분 언론은 스와프 협정 체결이 계약 당사자인 한국은행과 미 FRB를 배제하고 강 장관이 미국 재무부 인사와 접촉해 이뤄진 것처럼 보도했다. 특히 재정부가 브리핑 과정에서 강 장관이 씨티은행 부회장과 만나 부탁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주장하고, 이 내용을 일부 언론이 보도했다. 일개 상업은행 부회장이 독립성이 보장된 FRB을 움직인 것처럼 사실이 와전된 것은 협상 주체인 한은 입장에서는 매우 곤혹스러운 상황이다. 이에 강 장관이 두 번째 사과 전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

통화스와프 체결로 다시 힘을 얻은 강만수 장관이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정책은 수도권 규제 완화 등 부동산 경기부양책이다. 한계에 몰린 지방 경제도 대대적인 SOC사업을 추진해 다시 살리겠다고 한다. 추부길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 공성진 한나라당 의원 등 이명박 대통령 측근들이 한반도 대운하 카드를 다시 꺼낸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외국인 투자자 ‘셀 코리아’ 시간 벌어
문제는 이명박 정부의 이런 대응책이 한국이 직면하고 있는 위기를 더 심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가 폭락과 환율 급등을 가져왔던 외국인 투자자들의 ‘셀 코리아’의 근본 원인은 ‘유동성 부족’이 아니라 ‘거품’에 있다. 지금 한국 경제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부동산 거품’이다. 현 경제 위기가 이명박 정부가 주장하듯 단순히 외생 변수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점이 곪아터지고 있는 현상이라는 점을 많은 경제전문가가 지적하고 있다.

660조 원에 달하는 가계부채 문제, 사실상 20만 채가 넘는다는 미분양 아파트와 이로 인해 경영 위기에 봉착한 건설사들, 이 건설사들에게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등을 통해 돈을 빌려준 금융기관 등 현재 한국 경제의 ‘뇌관’이라고 지적되는 문제점을 꼽아보면 원인은 다 ‘부동산’이다. 정부가 애써 이를 외면하고 있지만 말이다. 거품 붕괴 국면에서 부동산 시장이 연착륙하지 못하고 경착륙하면, 한국 경제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큰 태풍이 불어닥칠 것이다. 일부 전문가는 이미 연착륙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라는 부정적 전망을 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300억 달러 규모의 한·미 간 통화스와프를 통한 일시적 반등은 결과적으로 부동산 거품의 붕괴가 자산 붕괴로 이어질까 두려워하는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한국 주식을 팔고 나갈 시간을 벌어주는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

전홍기혜<프레시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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