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후에 재앙 부를 ‘석면 불감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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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석면 피해자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피해자 집회 모습. <환경연합>

정부의 석면 피해자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피해자 집회 모습. <환경연합>

검은 민들레 박길래씨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박씨는 2000년 4월 연탄공장 옆에서 살았다는 죄 아닌 죄 때문에 진폐증에 걸려 목숨을 잃었다. 몸과 영혼을 갉아먹는 고통과 싸우면서도 치열하게 환경운동에 앞장서던 그 모습이 선하다. 감기로만 알았던 병이 결핵으로 오진되고 결국 진폐증이라는 것이 밝혀졌어도 그녀의 병은 산업재해로 인정받지 못했다. 길고 긴 소송 끝에 겨우 주거력에 의한 공해병으로 인정받았을 뿐이다.

지금 그때와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번에는 집이 석면 취급공장 가까이에 있었거나 석면 자재로 만든 건물을 해체할 시점에 그 근처에 살던 주민이 피해자다. 일급 발암물질인 석면은 내년 1월 1일부터 제조와 사용이 전면적으로 금지된다. 잠복기가 10년에서 40년에 달해 질병을 앓아도 인과관계를 추적하는 건 하늘의 별따기다. 그 때문에 환자와 가족들은 경제적·신체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당하면서도 정부나 가해자들에게서 적절한 조처나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지난 10월 9일 시민환경연구소가 주최한 한 토론회에서 석면 피해자들이 쏟아낸 증언은 석면에 중독된 우리 사회의 단면을 가늠케 한다. 10년 전 주거개선사업이 대대적으로 벌어진 광명시 철산동에 거주했던 최형식씨는 악성중피종 환자로 살 날이 한 달이 채 남지 않았다는 선고를 받은 상태다. 그는 석면과 연관지을 만한 직업을 가진 적이 없다. 자신의 병이 주거력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도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도, 환경단체에 문의하면서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재건축·재개발 사업에서 노출 가능성 커
20년간 원인을 알 수 없는 질환으로 투병하는 부친을 수발하다가 부친의 사후에야 병인이 석면이며 병명도 늑막염이 아니라 악성중피종이었다는 사실을 안 원정율씨 같은 이도 있다. 그의 부친 역시 석면 관련 직업을 가진 적이 없고 석면제품 제조공장이 있는 부산 연산동에서 5년간 살았던 거주력만 있다. 문제의 석면공장과 1㎞ 정도 떨어진 한 초등학교에 다닌 원씨 자신도 현재 폐 질환으로 고통받고 있다. 그는 자신의 폐 질환이 석면 때문에 생긴 환경성 질병인지 정밀 검진을 받을 작정이다.

그런데 원씨 외에도 같은 초등학교 1회 졸업생인 한 여성 역시 폐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인 사실이 확인됐다. 그녀나 원씨의 질환이 모두 석면에서 비롯된 것으로 확인된다면, 연산초등학교를 다닌 모든 사람은 잠재적인 석면 피해자일 가능성이 크다. 서울의대 백도명 교수는 2040년에 우리나라에서 석면 피해가 최고조에 이를 것으로 예상했다. 석면 질환의 잠복기와 석면 건축물의 해체주기를 비교할 때, 앞으로 30여 년간 환경성 석면질환을 앓는 이가 많아질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환경성 석면 질환 증가를 부르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재개발사업이다. 서울시에서만 지난 5년간 12만 호의 뉴타운 건설이 있었고, 앞으로 2012년까지 18만5000여 채에 달하는 건물이 철거된다. 재건축과 재개발사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하면 건물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인근 주민과 건설 노동자 들이 석면에 노출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도 정부는 경기 부양을 위해 뉴타운 사업을 비롯한 재건축과 재개발사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겠다고 한다. 부족한 행정력을 이유로 석면 해체를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정부의 석면 불감증은 섬뜩할 정도다. 학교보건법과 다중이용시설 실내공기질 관리법의 관리 대상에 아직도 석면 항목이 없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경제가 어렵다고 환경복지예산을 줄이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 석면이 부르는 가공할 위험으로부터 국민 건강을 지키자면 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관련법을 대폭 정비하고 대책도 실효성 있게 가다듬어야 한다. 침묵의 살인자, 석면은 바로 우리 곁에 있다.

<환경연합 전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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