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뉴먼이 우표에 나올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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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인물우표와 한국의 인물우표.

미국의 인물우표와 한국의 인물우표.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의 주연배우 폴 뉴먼이 눈을 감았다. 이 부음 소식을 전하는 세계의 매체들은 뉴먼에 대해 상찬을 아끼지 않는다. 할리우드 스타로서 화려한 삶을 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사회에 의미 있는 일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뉴스를 보면서 나는 폴 뉴먼이 언제 미국 우표에 등장할지를 예상해봤다. 그가 83세의 나이로 숨졌으니까 17년 뒤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가 되지 않을까 싶다. 미국에선 대통령은 사후 1년, 그 외 인물은 사후 10년이 돼야 우표에 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미국 우정청(USPS)은 ‘할리우드의 전설’ 시리즈로 ‘베티 데이비스 우표’를 발행했다. 데이비스 탄생 100년째 되는 해를 맞아 기념우표를 낸 것이다. 데이비스는 1930년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2번 수상했고, 10번 노미네이트된 당대 최고의 여배우다. 하지만 뉴먼이 데이비스에 뒤진다고 볼 수는 없으니 ‘폴 뉴먼 우표’가 나오는 것은 시간 문제라 할 것이다.

데이비스를 포함해 할리우드의 전설 우표는 그동안 14번 나왔다. 미국에선 연예인이 우표의 모델이 되는 데 차별이 없다는 뜻이다. 대중의 사랑을 받는 스타가 우표에 등장하면 오히려 우표 매출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지금까지 우표 모델이 된 할리우드 스타를 살펴보자. 시리즈 1호는 세기의 글래머 스타 마릴린 먼로다. 이어 반항아 스타 제임스 딘, 카사블랑카의 전설 험프리 보가트, 서스펜스의 천재 영화감독 앨프리드 히치콕이 있고, 화이트 히트의 제임스 카그니, 사랑의 별장의 캐리 그란트, 은막의 요정 오드리 헵번, 영원한 총잡이 존 웨인 등이 뒤를 잇는다.

할리우드 스타만 우표 모델이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마이 웨이를 부른 가수 프랭크 시나트라, 흑인문학가 찰스 체스넛, 현대 미술의 아이콘 앤디 워홀도 우표에 등장한다. 미국을 빛낸 과학자, 저명한 언론인도 시리즈로 우표에 소개된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를 망라하는 것이다. 발행량에 비해 사용하지 않은 비율이 가장 높아서 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우표로 꼽히는 것도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 우표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나라에선 인물 우표를 거의 구경할 수 없다. 대통령 아니면 교과서에 나오는 인물 정도는 되어야 우표 모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온 위인 우표만 보아도 우정의 창시자 홍영식을 비롯해 안창호·이순신·김구·류관순·세종대왕·정약용·안중근·이준·윤봉길·이봉창 선생 등이다. 모두 세기의 위인(偉人)이다.

대통령은 초대 이승만부터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에 이르기까지 윤보선을 빼고는 모두 우표에 실렸다. 이 중 이승만 우표는 7차례, 박정희 우표는 24차례 발행됐다. 가장 빈번하게 우표에 나온 사람은 전두환 대통령으로, 그가 외국 순방을 가거나 외국 원수가 방한할 때마다 축하 우표가 나왔다. 합계를 내보니 47차례다. 우표 수집에서는 희소성이 생명인데, 전두환 우표는 그 점에서 가장 가치가 떨어지는 셈이다. 김영삼 대통령 때부터는 ‘취임 때 한 번’ 발행한다는 원칙을 지켜오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상을 수상했을 때 김대중 우표를 한 번 더 발행한 게 유일한 예외다.

이렇게 인물이라고는 권력자 얼굴만 담다 보니 우리 우표에는 엄숙주의가 넘쳐난다. 마라톤의 황영조, 2002 월드컵 축구대표 선수들이 우표에 실린 적이 있으나 이는 극히 예외적일 뿐, 문화·예술분야의 인물을 담은 우표는 아예 없다. 시·소설·음악·영화·가요 등에서 아무리 훌륭한 업적을 쌓고 국민의 사랑을 받은 사람도 우표에는 등장하지 못한 것이다.

왜 그럴까. 미국과 달리 우리에겐 ‘우표 발행 세칙’이란 훈령이 있다. 이에 따르면 인물 우표는 ‘역사적으로 기념할 중요한 가치가 있는 인물·사건으로 50주년 또는 100주년 단위의 기념행사가 있을 때’만 발행이 가능하다. 원칙적으로 생존 인물과 정치적·종교적 논쟁의 소지가 있는 소재는 피한다는 규정도 있다. 인물 우표 발행을 사실상 원천봉쇄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규정이 왜 필요할까. 정치적 논란에 휘말리지 않겠다는 것은 이해되지만, 이상·김소월·박목월·황순원·나운규·김정구 같은 인물 우표를 낸다고 해서 무슨 논쟁이 있을 것인가. 케케묵은 우표 발행 세칙을 시대 상황에 맞게 전면 개정하기를 제안하고 싶다.

<이종탁 경향신문 논설위원> jt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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