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포럼 공동대표 이영훈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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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적 소신인가, ‘일그러진 역사관’인가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그는 금성출판사 근현대사 교과서를 비판한 교과서포럼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경향신문>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그는 금성출판사 근현대사 교과서를 비판한 교과서포럼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경향신문>

"나는 잃을 게 없다. 만약 내가 정치인이라면 말을 가렸을 것이다. 교과서 포럼을 제외하고 어떠한 정치단체에도 가입한 적 없고, 정부위원회에도 참여한 적 없다. 나는 학자로서 양심에 바탕한 주장을 해왔다. 대중의 역사의식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연구자가 과감하게 해야 할 일은 있다. 그것이 지식인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물론 이영훈 교수가 이 정부에서 한자리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나름의 학문적 입장을 갖고 연구해왔다는 것은 믿어주고 싶지만, 지금 행태는 정치꾼이나 그런 ‘세력’들에 의해 아주 훌륭하게 이용되고 있지 않는가. 지금 역사교육과 역사학계에 쏟아지는 말도 안 되는 강압을, 그가 의도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주진오 상명대 사학과 교수)

“금성사 교과서는 반국가적 통일운동 교재”
근·현대사 역사교과서 논란이 다시 불꽃을 튀기고 있다. 국방부의 역사교과서 개정 ‘의견서’로 시작된 논란은 교육과학부가 국방부나 통일부 등 다른 부처뿐 아니라 상공회의소·교과서포럼 등 여러 단체에 개정 의견을 부탁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확전 양상이다. 지난 3월, 대안교과서를 펴내 물의를 빚었던 교과서포럼은 “지난 9월 17일 금성출판사 발간 고등학교 역사교과서 ‘한국근현대사’의 시정을 요구하는 민원을 냈다”고 밝혔다. 이들은 금성출판사의 2008년도 역사교과서가 ▲반제국주의 민족사관 또는 제3세계 혁명론의 역사관에 입각해 있으며 ▲1945년 이후의 미국은 제국주의 국가이고, 1948년 이후의 대한민국을 미국에 종속된 사회로 규정하면서 60년간 대한민국이 성취한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고 ▲북한 현대사에 대해서는 중립적이고 관대하게 서술하는 한편, 북한 체제의 야만적 반인권성에는 침묵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교과서포럼은 “요컨대 동 교과서는 반국가적 통일운동 교재로서의 특질을 강하게 띠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교과서포럼의 공동대표는 박효종 서울대 국민윤리교육과 교수, 차상철 충남대 사학과 교수·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3인이 맡고 있지만 이영훈 교수가 실질적으로 주도하고 있다.

인터넷 등에서 그는 ‘친일파 매국노’로 비난받고 있다. 그 근거는 정신대 발언이다. 이영훈 교수의 ‘말’은 2004년 9월 2일 MBC ‘100분 토론’에 출연한 자리에서 나왔다. 과거사진상규명 논란을 주제로 열린 이날 토론회에서 이 교수는 “조선총독부가 강제로 위안부를 동원하지 않았으며, 사료를 보면 범죄 행위는 권력뿐 아니라 많은 민간인 참여로 이뤄졌다”고 말했다. 설화(舌禍)가 커지자 이틀 뒤 이 교수는 “일본군 성노예가 사실상 ‘상업적 목적을 지닌 공창의 형태였다’라고 발언하지 않았고, 상대 측 패널이 멋대로 해석한 주장이 마치 내 발언인 것처럼 알려졌다”고 진화에 나섰다. 해명 다음 날 이영훈 교수는 경기 광주 나눔의 집을 방문, 정신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무릎을 꿇고 사과했다. 그러나 할머니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강주혜 정대협 사무처장은 “일제강점기에 이장이나 경찰서에서 일했던 사람이 일본 사람이 아니고, 식민권력의 하급관리로 조선 사람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책임성 문제에 대한 주장은 황당한 이야기였던 것이 사실”이라며 “당시 이 교수가 본인은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정신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사과했지만 지금도 이 교수를 비롯한 뉴라이트 진영의 역사인식 문제는 계속되는 것이 아니냐”고 말했다.

이 교수에게 곤혹스러운 사건은 2006년 11월 30일, 또 한 차례 터졌다. 이날 오후 서울대 사범대에서 열릴 예정이던 교과서포럼 6차 심포지엄은 끝내 열리지 못했다. 유영익 연세대 석좌교수가 발표자인 이 교수를 청중에게 소개하려는 순간, 심포지엄장 앞쪽 문이 열리며 일단의 사람이 몰려들었다. 4·19 관련 3개 단체 회원들이었다. 이들이 행사장에 난입한 까닭은 교과서포럼이 교과서 시안에서 ‘4·19혁명’을 학생운동으로 폄훼하면서, 4·19단체들의 의견수렴 과정도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이들 단체 회원은 단상으로 올라가 이 교수의 멱살을 잡고 항의했다. 이 교수의 양복 상의가 벗겨졌고 입술이 터져 피가 흘렀다. ‘사태’는 4·19단체와 교과서 포럼이 공동으로 유감 표명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 됐다.

교과서포럼에 관여하고 있는 한 인사는 자신의 발언을 인용하는 것을 거부했다. 정치적 논란에 휩쓸리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이영훈 교수가 소장으로 있는 낙성대경제연구소 관계자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이 연구소의 한 연구위원은 “낙성대경제연구소 회원 중에는 이영훈 교수의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도 있고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라며 “낙성대경제연구소와 이영훈 교수의 관련성은 단지 그가 소장을 맡고 있다는 것이며, 연구소와 특정 정치적 입장, 교과서포럼 등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전태일 분신에 운동권이 된 대학생 이영훈
교과서 수정을 요구하는 뉴라이트 진영의 핵심인물 이영훈. 한쪽에서는 일그러진 역사관의 소유자 혹은 또라이, 심지어 친일파로 규정하는 인물이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소신 있는 인물로 평가하기도 한다. 과연 그의 머릿속에는 어떤 역사관·역사인식이 자리 잡고 있을까.

1971년 대학가는 교련반대시위에 휩싸였다. 당시 서울대 교양학부생이던 이영훈도 이 시위에 적극 참여하다 같은 해 10월 위수령으로 제적된다. 사진은 1971년 6월 서울대 공릉동 캠퍼스에 붙은 휴강 공고문. <경향신문 자료사진>

1971년 대학가는 교련반대시위에 휩싸였다. 당시 서울대 교양학부생이던 이영훈도 이 시위에 적극 참여하다 같은 해 10월 위수령으로 제적된다. 사진은 1971년 6월 서울대 공릉동 캠퍼스에 붙은 휴강 공고문. <경향신문 자료사진>

먼저 38년 전, 이 교수의 대학 신입생 시절로 돌아가보자.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와 대담집인 ‘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도서출판 기파랑)에서 이 교수는 “전태일의 분신 현장을 돌아본 뒤 운동권 학생이 됐다”고 말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전태일이 분신한 날 오후, 고등학교 동기생인 박동현(현 장로회신학대 교수·구약학)의 제안으로 평화시장 일대를 돌아봤다. 당시 서울대 법대 1학년이던 박동현 교수는 “전태일의 분신 현장도 현장이었지만, 평화시장을 돌면서 닭장처럼 붙어 있는 열악한 작업장 시설을 보고 이영훈이 울분을 느끼며 돌아갔던 것을 기억한다”라고 회고했다. 박 교수의 기억에 따르면 그뒤 그와 이영훈은 당시 교양과정학부가 있던 공릉동 캠퍼스에 전태일의 분신을 알리는 벽보를 붙였다. 그러나 박 교수는 “이 교수의 친지이자 선배인 분이 책을 보내줬는데 그 뒤로는 거의 안 만났기 때문에 내 이름이 나와 있어서 의외였다”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자신은 현재의 이 교수 입장과 많이 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한문 공부를 열심히 해서 한국 경제사 연구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아는데, 언제부터인가 가치관·세계관이 변한 것 같아 솔직히 놀랐다”고 덧붙였다.

소속 단과대는 다르지만 ‘운동권 이영훈’에 대한 기억은 손호철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도 갖고 있다. 손 교수는 “운동권인 것은 맞는데, 이영훈을 굳이 분류해본다면 ‘행동파’라기보다 ‘이론파’에 가까웠던 걸로 기억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대학 2학년인 1971년 봄, 대학가에서는 교련반대운동이 벌어졌다. ‘데모’를 열심히 하던 이영훈은 상대 선배인 김근태(전 통합민주당 국회의원)에게 방학 때 농촌봉사활동이 아니라 공장에 들어가라는 말을 듣는다. 이영훈은 페인트 공장에 한 달 반 동안 위장 취업한다. 그해 10월, 위수령이 발동되면서 전국적으로 200~300명의 학생이 제적됐다. 손 교수는 “당시 문리대에서 2학년에서는 나만 짤리고, 상대에서는 김문수(현 경기도지사), 이영훈, 이채언(전남대 경영학부 경제학과 교수) 등이 제적된 걸로 안다”며 “3, 4학년의 경우 강제징집이 됐지만 2학년은 나이가 어려 군대를 안 가고 남아 있던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안병직 교수와 대담집에 따르면, 이때 이 교수는 김문수와 함께 안 교수의 집으로 찾아가 “노동운동에 투신하라”는 말을 듣는다.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한 1976년, 진로를 고민하던 이 교수는 다시 안병직 교수를 찾아가고 그의 권유로 대학원에 진학한다. 안 교수를 지도교수로 그가 박사학위를 받은 것은 1984년 2월. ‘조선후기 토지소유와 농업경영’이라는 주제였다. 그해 9월, 이영훈은 한신대학교 경제학과 전임대우교수로 취직했다. 1980년대 중·후반을 풍미한 사회구성체 논쟁에 그는 뛰어들지 않았다. 이 교수는 “사회구성체 논쟁에 아주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모두 현실과 동떨어진 공리공담이었다”라고 회고했다.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근대 해석이 아닌 사료를 통한 실증이 이 교수의 주된 관심사였다.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이영훈 교수 비난게시물.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이영훈 교수 비난게시물.

논쟁은 엉뚱한 데서 촉발했다. 이영훈의 박사논문 지도를 끝으로 일본으로 출국했던 안병직 교수가 ‘중진자본주의론’이라는 새로운 입장을 가져온 것이다. 일본으로 가기 전 식민지반봉건사회론자였던 안 교수가 당시 일본 석학인 나카무라 사토루의 한국 사회 해석 입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1987년 ‘이론보다 실증’을 주장하던 안 교수는 낙성대경제연구소를 설립했고, 이영훈도 동참했다. 낙성대경제연구소는 그후 소위 식민지근대화론의 메카가 된다. 일제시기 공업화나 경제 성장에 대한 실증연구 프로젝트를 독보적으로 진행하는 연구기관이 됐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안병직 교수의 뒤를 이어 이 교수가 있었다. 이 교수는 1989년부터 2002년까지 성균관대에 적을 두다 2002년 서울대 교수로 옮겼다.

‘연구자로서 이영훈’은 조선시대 후기의 농업·촌락 사회의 변동 문제를 천착하는 한편 그 연장선에서 일제시대 농촌 문제를 연구했다. 이 교수 등의 연구에 따르면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 농업 생산의 감소와 환경 파괴로 인한 위기가 극대화됐다.

그 결과 19세기 후반 조선왕조는 멸망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고, 동학농민전쟁 등 민란의 빈발도 그 맥락에서 해석된다는 것이다. 종전 역사학계는 상업 확대 등을 예시하면서 소위 ‘자본주의 맹아론’을 주장하지만 이 교수는 자주적 근대화는 불가능할 정도로 총체적인 쇠퇴를 거듭했고, 일제는 ‘영구병합’을 목적으로 식민 지배를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종전 역사학계는 수탈론, 즉 일제가 식민지 조선의 발전을 가로막았다는 주장이 지배적이었지만 그와 낙성대경제연구소는 각종 통계자료와 실증 연구를 바탕으로 수탈론은 민족주의에 의해 조작된 기억이며, 실제 일제시대에 근대화는 꾸준히 진행되었을 뿐 아니라 경제 성장도 지속적으로 일어났다고 주장하고 있다.

비판 진영에서는 대체적으로 이 교수의 ‘학자로의 진정성’은 인정하지만 이데올로그로 변신은 비판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윤해동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는 “이영훈 교수의 한국 경제사 연구는 1980년대 후반부터 나름의 독자적인 체계를 구축해온 측면이 있고, 특히 조선 후기 시기까지의 농업사와 관련한 실증 연구는 독보적인 성과를 쌓아왔다고 봐야 한다”라면서도 “그러나 본인은 자신의 전근대시대의 작업과 자신의 발언을 연속성이 있는 것으로 보는 것 같지만 그의 ‘정치적 발언’은 이전까지 학문 작업과 괴리된 측면도 있다”라고 지적했다. 조선 후기 시대와 관련된 연구는 학문적 논의 대상으로 인정할 수 있지만, 일제시대 즉 식민지시대 근대화나 연속해서 건국·이승만과 박정희 체제의 평가와 관련된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주진오 상명대 사학과 교수는 “이 교수의 입장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근대사 연구자로서 역량이나 자세는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한다”라며 “몇 년 전부터 왜 저렇게 극단으로 가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렇게 열심히 진지하게 연구했는데도 불구하고 역사학계로부터 무시·매도당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상처받아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라고 말했다.

주 교수에 따르면 현재 역사학계에서 이 교수의 입장을 취하는 이는 거의 없다. 반면, 서울대 경제학과 및 낙성대경제연구소를 중심으로 경제사 영역에서는 이 교수의 입장을 중심으로 하나의 학파가 형성되어 있는 형국이다. 주 교수는 “원래 자신의 영역에서는 진지한 학자였는데 자기 영역도 아닌 곳에서 정치적이고 정제되지 않은 이야기를 왜 그리 쏟아내는지 안타깝다”라고 덧붙였다.

“나는 변했지만 그들은 과거에 사로잡혔다”
이 교수를 비판하는 입장에서는 이 교수의 지도교수였던 안병직 교수의 ‘뉴라이트로의 변신’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윤 교수는 “원래 안병직 교수의 입장이던 식반사회론은 1920~30년대 일본 마르크스주의 강좌파까지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이론으로 신고전파 경제학 이론과 연결될 여지가 있었다”라며 “이영훈 교수의 변화나 노동운동하던 김문수가 한나라당에 입당한 것도 안 교수의 입장 변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손호철 교수는 “과거 학문적 활동이 나름의 튼튼한 학문적 기초에 근거한 것이라면 최근 이 교수의 주장은 옳고 그름을 떠나 어떻게 보면 1980~90년대 운동권보다 더 관념적이지 않나 생각한다”라며 “1980~90년대 운동권이 경험에 근거하지 않은 추상적인 테제만 나열했던 모습보다 교과서포럼 등의 활동이나 뉴라이트 등의 주장을 보면 일방적 선언이라는 점에서 더 심한 것 같다”라고 말했다.

과거 동료의 비판에 대해 이영훈 교수는 “이미 세월이 얼마나 흘렀고, 또 세상이 얼마나 달라졌나”라고 반문하며 “나는 끊임없이 현실과 역사를 알면서 생각이 바뀌어왔지만 그 사람들은 1930년대 이래 물려받은 낡은 역사의식에 갇혀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이 교수의 주장이 일제시대를 미화한다는 비판에 대해 그는 “(거꾸로 비난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인 줄 알고 식민지적 전통에서 해방되지 못한 담론체계에 사로잡힌 데서 오는 폐해”라며 “시간이 없어 대응을 안 하고 있지만 (인터넷 등에서 친일파라는 등의 비난이) 도를 넘어도 한참 넘고 있어 어떤 조치가 필요하지 않나 심각하게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조선시대 후기를 넘어선 근·현대사와 관련된 연구가 이데올로기에 가깝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그는 “내 연구 목록이라도 제대로 검토했다면 그렇게 경솔한 말은 못할 것”이라며 “한국 지식사회의 위선적 정치 혐오주의도 벗어날 필요가 있다”라고 덧붙였다.

이 교수의 주장에 대해 주진오 교수는 “지난 20~30년 동안 나 자신을 포함해 입장이 바뀌지 않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라며 “다만 남이 변화한 것은 인정하지 않고, 자신만 옳다는 오만이 문제”라고 꼬집었다. 주 교수는 “대한민국 건국에서 이승만의 역할이나 박정희 독재 체제가 성장에 기여했다는 이 교수의 주장이야말로 과연 학문적 성찰에 기반한 것인지 이 교수가 스스로 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라고 반박했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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