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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위기’는 글로벌 쓰나미 신호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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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악재보다 ‘미국 기축통화 위기’ 더 심각… 현재 ‘불신 공황’ 타개책은 시장 신뢰회복뿐

‘9월 위기설’은 외국인 투자자들의 ‘셀 코리아’로 더욱 증폭되고 있는 상태다. 서울 증권선물거래소에서 한 직원이 심각한 표정으로 주가 추이를 바라보고 있다. <김문석 기자>

‘9월 위기설’은 외국인 투자자들의 ‘셀 코리아’로 더욱 증폭되고 있는 상태다. 서울 증권선물거래소에서 한 직원이 심각한 표정으로 주가 추이를 바라보고 있다. <김문석 기자>

"정말 9월 위기설은 실체 없는 찻잔 속 태풍에 불과한데…. 이러다가 지금은 아니나 반년 후쯤 진짜 위기가 오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외환당국의 고위 관계자가 9월 들어 금융시장을 공황 상태로 몰아넣고 있는 패닉 상황을 지켜보고 한 말이다.

시장에선 한두 달 전부터 ‘9월 외환위기설’이 나돌아왔다. 9월에 67억 달러의 외국인 보유 채권 만기가 도래하기 때문이다. 특히 7월 들어 주식만 매도하던 외국인들이 채권까지 팔아치우면서 시장의 불안은 급속히 커졌다. 외국인은 7월 한 달 동안에만 무려 100억 달러어치의 주식과 채권을 팔아치웠다. 무서운 ‘셀 코리아’ 기세에 시장이 크게 불안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정부는 “끄떡없다”고 호언장담했다. 외국인이 채권을 팔 이유도 만무하며, 설령 팔더라도 총알(외환보유고)이 넉넉하다는 이유에서다.

찻잔 속 태풍이 찻잔 깰 판
하지만 9월 첫째 날인 1일, 주식·외환시장은 완전 공황 상태로 빠져들었다. 하루 사이에 주가는 59포인트나 폭락하고 원달러 환율은 27원이나 폭등했다. 2일도 마찬가지였다. 주가는 장중 1400선이 무너졌고 환율은 18원이 폭등했다. 이날 국민연금 등이 주식을 사들이지 않았다면 주가는 더 폭락했을 것이다. 이어 3일에도 국민연금의 매집으로 주가는 반등했으나 환율은 정부가 외환보유고 25억 달러를 쏟아부었음에도 또 14.5원이 올랐다. 4일 국민연금과 외환보유고를 추가 투자하면서 잠시 시장은 안정되는가 싶었으나, 미국 주가 폭락 소식에 5일 금융시장은 또다시 아노미 상태로 빨려들었다. 마치 1997년 외환위기 전야를 방불케 하는 상황이었다.

앞의 외환 당국자의 말마따나, ‘9월 외환위기설’은 분명 과잉 공포의 측면이 강하다. 환율 방어 등으로 외환보유고가 급속히 줄어들고 있으나 9월에 외환위기가 올 리는 만무하다. 무역적자, 경상적자, 자본적자가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으나 이 또한 9월에 나라가 절단 날 정도는 절대 아니다. 그런데도 원달러 환율은 연일 폭등하고 시장은 아노미 상태에 빠져들었다. 이에 모든 사람이 아연실색했다. 수입 기업은 말할 것도 없고 환율 폭등을 반겨야 할 수출 기업들까지 일손을 놓았다. 이렇게 환율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요동치는 상황에선 수입은 물론 수출계약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업계 일각에서는 헤지(위험 분산) 차원에서 사놓은 파생금융상품 KIKO 때문에 멀쩡한 수백 개 기업이 줄초상날 것이란 아우성도 터져나왔다.

이명박 대통령이 국가에너지위원회에서 한승수 총리와 함께 상의를 벗고 있다. ‘경제 성장 공약’으로 선거에 승리한 대통령이 어서 빨리 팔 걷고 경제 살리기에 나서기를 국민은 바라고 있다. <우철훈 기자>

이명박 대통령이 국가에너지위원회에서 한승수 총리와 함께 상의를 벗고 있다. ‘경제 성장 공약’으로 선거에 승리한 대통령이 어서 빨리 팔 걷고 경제 살리기에 나서기를 국민은 바라고 있다. <우철훈 기자>

시장을 더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외국인들의 차가운 반응이다. 정부는 외국인들이 한국 시장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월가의 금융위기 때문에 주식과 채권을 팔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일부 외국 투자자는 ‘로이터’ 등 외신과 인터뷰에서 “지금 누구도 한국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한 외국 투자기관은 “한국 보유 주식을 제로(0)로 만들 것”이란 얘기까지 공개적으로 했다. 영국 ‘더 타임스’는 “한국에 검은 9월이 오고 있다”는 상당히 악의적이고 의도적인 기사까지 썼다. 일본의 포털 ‘야후 저팬’에는 3일 “한국에 제2의 외환위기가 발발할 가능성이 있다”는 기사가 하루 종일 메인을 차지했고, 일본 네티즌은 “고소하다” “이번엔 도와줘선 안 된다”는 악의적 댓글을 달기도 했다.

한국을 보는 시선이 싸늘해진 것이다. 이렇게 시선이 싸늘하다 보니, 우리 정부가 발행한 국채 스프레드(가산금리)는 급속히 높아져 어느 새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국가 수준이 됐다.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때 경험했듯, 또다시 동남아 반열로 격하된 형국이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앞의 외환 당국자의 우려처럼, 반년 뒤엔 ‘진짜 위기’가 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자칫 ‘찻잔 속 태풍’이 찻잔을 깰지도 모를 판이다. 상황이 심각하게 전개되는 것이다.

그러나 ‘9월 위기설’의 본질은 외환뿐이 아니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악몽의 1997년, 한보를 신호탄으로 기아·한라·삼미·진로·해태·대농 등 30대 그룹 중 무려 10개 그룹이 줄줄이 쓰러졌다. 그 후 살아남은 기업은 다시는 같은 위기를 맞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부채 비율을 끌어내려 지금은 정부가 “왜 투자하지 않느냐”고 질타할 정도로 다수 그룹이 수백조 원 규모의 엄청난 현금을 비축하고 있다.

그런데 8월 말부터 내로라하는 굴지의 기업들이 시장의 도마 위에 오르며 주가가 대폭락했다. 금호아시아나를 시작으로 두산·STX·코오롱·동부·동양·한화 등 증권시장에선 “내일 오를 기업은 어디냐”는 얘기가 나돌고 금융감독원이 악성 루머를 발본색원하겠다고 나설 정도로 분위기는 흉흉하다.

한국경제의 최대 시한폭탄 ‘부동산 거품’
이들이 도마 위에 오른 것은 ‘9월 외환위기설’과는 무관하다. 본질은 ‘유동성 위기설’이다. 이들은 상당수가 지난 수년간 기업 사냥에 전력투구해 덩치를 부풀려온 그룹이다. 이미 지난해부터 외국 투자자들 사이에서 ‘요주의 대상’으로 꼽힌 그룹이다. 그러나 당시 이들을 보던 국내 시각은 정반대였다. 자신보다 큰 기업들까지 재주 좋게 인수하며 욱일승천, 잘 나가는 전도양양한 그룹이었다. 그러던 것이 최근 갑자기 시장의 시각이 180도 바뀌었다. 세칭 ‘살생부’에 오르기만 하면 앞 다퉈 묻지마 투매를 하고 있다. 해당 기업들 입장에서 보면 시장의 변덕에 환장할 일이다.

아직 도마 위에 오르지 않은 그룹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특히 최근 자동차·반도체·가전·컴퓨터 등의 수출이 전년동기대비 마이너스로 돌아서고 조선·석유화학·철강 등도 세계경기 침체로 앞날이 밝지 않다는 전망이 나오면서 투자자들의 불안감은 굴지의 대그룹으로 확산되고 있다. 한 그룹 임원이 “이런 식으로 계속 가면 성할 기업이 어디 있겠냐”고 개탄할 정도다. 그는 “나쁜 면만 보면 삼성전자나 현대차, 포스코, 현대중공업인들 문제가 없겠냐”고 반문한 뒤 “좀 실적이 나빠지더라도 최악의 경제상황 속에서도 선방하는 면을 봐야지, 이런 식으로 가다간 진짜 ‘어게인 1997’이 될 수도 있다”고 극심한 우려를 토로했다.

시장 심리가 이렇게 극도로 불안정하다 보니, 미분양 대란으로 극한 위기에 몰린 중견 건설사나 신규 지방조선소 하나만 쓰러져도 시장은 패닉 상태에 빠져들 것 같은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다. 최근의 위기 상황이 단순히 ‘외환위기설’ 때문만은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다.

외국 언론은 “한국의 부동산 거품이 터지고 시작했다”고 연일 보도하고 있다.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을 겨냥한 분석이다. 서울 시내의 한 부동산중개업소에 매물이 많이 나와 있다. <경향신문사>

외국 언론은 “한국의 부동산 거품이 터지고 시작했다”고 연일 보도하고 있다.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을 겨냥한 분석이다. 서울 시내의 한 부동산중개업소에 매물이 많이 나와 있다. <경향신문사>

불안한 건 외환이나 기업뿐이 아니다. 국내외 투자자들을 진짜로 불안하게 하는 최대 폭탄은 부동산 거품이다. 미국발 세계경제 위기도 바로 부동산 거품이 터지면서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부동산 거품도 미국 못지않다. 노무현 정권이 민심 이반으로 이명박 정권에 정권을 넘겨준 것도 재임 기간 중 단군 이래 최대로 폭등한 부동산값을 제때 잡지 못해, 서민-중산층 등 지지기반이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니혼게이자이’가 보도했듯, 한국에서도 부동산 거품이 터지기 시작했다는 시각이 확산되고 있어 정부를 당황케 하고 있다. 정부가 지난 1일 부동산 경기 부양 목적의 양도소득세 대폭 인하 등을 포함한 26조 원의 감세안을 내놓고, 이명박 대통령이 직접 재건축·재개발 촉진 지시를 내리고, 정종환 국토해양부 장관이 한반도대운하 추진 의지를 연일 밝히고 있는 것도 어떻게 보면 부동산 거품의 파열을 막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냉랭하다. ‘지금은 현금을 쥐고 있을 때’라는 인식이 부유층 내에 확산돼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1997년 외환위기 사태 때 부동산에 돈이 묶여 고생한 경험을 갖고 있다. 위기 상황일 때는 현찰을 쥐고 있어야 그 후 주가가 반등할 때 목돈을 쥘 수 있다는 학습을 한 바 있다. 무엇보다 지금 집값은 거품이 잔뜩 끼어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렇듯 부유층이 부동산을 외면하니, 거품 파열은 시간 문제일 수도 있다. 쏟아지는 비난에도 금융감독원이 건설업체에 돈을 빌려준 저축은행 등의 건전성 통계를 지난 5월 이후 철저히 ‘극비’로 붙이고, 정부가 연일 어떻게 하면 부동산 경기를 띄울 수 있을까 골머리를 앓는 것 자체가 부동산 거품 파열이 임박했다는 신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는 외국인 투자자들 중 상당수가 ‘셀 코리아’를 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렇듯 국내에는 수많은 악재가 있다. 하나같이 간단치 않은 매가톤급 악재들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경제가 당면한 더 심각한 위기의 본질은 단순한 ‘국내 위기’만이 아니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글로벌 위기’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2차 세계대전 후 세계경제를 지탱해온 미국 기축통화 위기다.

지금 우리 경제가 직면한 위기는 단지 며칠 주가와 환율이 요동치는 차원의 위기가 아니다. 조지 소로스, 워런 버핏, 빌 그로스, 앨런 그린스펀 등 내로라하는 거물들이 한결같이 말하듯 1929년 대공황 이후 최악의 위기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글로벌 위기는 우리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다.

‘반 잔의 물’
그렇다고 손놓고 있을 때는 절대 아니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 바짝 차리고 살길을 찾아야 한다. 경제학에서 상투적으로 쓰는 비유 중 하나가 ‘반 잔의 물’이다. 물 컵에 물이 반 정도 차 있을 때, “아직 반이나 남아 있네”라고 생각하면 웬만한 악재도 맥을 못 추고 모든 게 좋은 쪽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어, 반밖에 안 남아 있네”라고 생각하면 모든 게 나쁜 쪽으로 돌아가며 위기가 위기를 낳으며 최악의 경우엔 공황까지 발생한다는 것이다.

지금 상황은 후자다. 관건은 어떻게 후자의 심리 상태를 전자의 심리 상태로 돌릴 것인지다. 지금 공황은 ‘불신 공황’이기 때문이다. 해법은 하나다. 대통령이 됐든, 기업총수가 됐든, 다시 시장의 신뢰를 되찾는 길밖에 없다. 우선 솔직해져야 한다. 지금의 위기를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시장의 신뢰를 되찾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해야 한다. 시장이 불신하는 각료도 바꾸고 잘못된 정책은 즉각 폐기해야 한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시장의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기업 사냥 등은 즉각 중단하고 앞으로 어떻게 ‘반 잔의 물’을 가득 채울 것인지 비전을 제시해야 하고 신성장 동력 찾기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

잃어버린 신뢰를 찾는 길은 물론 간단치 않다. “신뢰를 잃는 데는 5분이면 족하나, 되찾는 데는 5년이 걸린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그 길밖에 없다. ‘신즉생(信卽生)’의 비장한 각오가 필요한 때다. 이렇게 경제 주체가 똘똘 하나가 되도 헤쳐나가기 쉽지 않은 게 지금의 위기 상황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박태견<뷰스앤뉴스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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