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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수, 권력 앞에 원칙을 바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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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수 굴욕시대’가 계속되고 있다. 최근 한 초선 의원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강 장관에게 ‘레드카드’를 내밀며 퇴장을 요구하고 있다.

‘강만수 굴욕시대’가 계속되고 있다. 최근 한 초선 의원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강 장관에게 ‘레드카드’를 내밀며 퇴장을 요구하고 있다.

“토지가 싼 신개척지에는 거지도 없고 생활의 불평등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토지가 비싼 대도시에는 극단적인 빈곤과 사치가 동시에 존재한다… (중략)… 토지 투기는 토지 가격을 올리고 토지의 독과점을 낳았다. 토지의 독과점은 생산력이 증대됨에 따라 토지, 노동, 자본 간의 합리적인 분배를 파괴하고 지대가 임금과 이자에 비해 더 큰 비중으로 증대되어 진보와 빈곤이 함께 존재한다고 했다.”

얼핏 들으면 토지 공개념을 주장하는 어느 진보학자의 발언 같다. 하지만 이 글은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1997년 3월 5일 ‘중앙일보(27면)’에 기고한 글이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 선봉장으로 종합부동산세와 양도소득세를 인하하는 데 앞장서고 있는 지금과 10년 전 모습은 판이했다.

강 장관의 변신은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지난 7월 28일 국회 민생안정특별위에 출석한 그는 국회의원의 질의에 대해 “조세정책이 부동산 투기나 경기부양책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은 부적절하다”며 고유한 재정정책을 구사하는 게 바람직하고 답변했다. 하지만 그는 2005년 출간한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이라는 책에서 1970년대 후반부터 광풍처럼 일었던 부동산 투기와 관련된 세제정책을 수립하면서 “부동산 양도소득세에 대한 물가 상승률 공제제와 정부 시가표준액 기준 과세는 과세를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며 당시 강력한 부동산 투기 억제책으로 조세정책 수단을 주장했던 것을 회고했다.

경제부처 관료 시절 부동산 투기 억제 정책 수단 중 세법입안 실무 주역을 맡았던 강 장관의 이 같은 변화에 대해 “실용정부에 참여하면서 부동산 세제에 대한 철학이 달라진 게 아니냐”는 비난이 일고 있다. “물론 대내외적인 경제·사회적인 환경과 여건이 당시와는 ‘상전벽해’로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정통 경제 관료의 정책관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느냐”는 지적이다.

IMF 이후 야인생활, 10년 만에 발탁
강 장관은 1945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대학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강 장관은 1970년 행정고시(8회)를 통해 공직에 발을 디딘 후 재무부 보험국장, 국제금융국장, 주미대사관 재무관, 관세청장, 통상산업부 차관, 재정경제부 차관 등을 지내며 잘 나가는 경제관료로 통했다. 그는 1970~80년대 경제 정책입안자로, 혹은 정책결정자로 부가가치세부터 금융·부동산실명제, 보험·금융시장 개방까지 한국 경제의 중요 정책을 도입, 시행하는 현장에 참여했다. 하지만 1997년 몰아닥친 외환위기 이후 ‘IMF 주범’이라는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결국 공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무려 10년간 그는 ‘야인생활’을 했다. 차관까지 지냈으나 유관기관장이나 국책은행장으로 가는 ‘전관예우’를 받지 못했다. 잘 나가던 영남정권이 교체된 탓도 있지만 환란의 주범이라는 원죄가 꼬리표처럼 따라붙었기 때문이다.

그는 퇴임 이후 1년이 지나서야 한국무역협회 상근부회장으로 갔지만 재기하기 위한 그의 몸부림을 담기엔 작은 그릇이었는지, 2000년 한나라당 영입 제의를 받고 입당했다. 주변에서는 “정권교체로 받은 불이익의 한을 정치에 나서 풀겠다고 정계에 뛰어든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는 공천을 받지 못했다. 정치적 재기는 물거품이 됐고, 4년 후인 2004년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으며 다시 움직였으나 또다시 쓴잔을 마셔야 했다. 결국 디지털경제연구소 이사장,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는 등 그의 낭인 시절은 길어졌다.

이런 그를 ‘구제’한 사람이 이명박 대통령이다. 강 장관은 1980년대 초반 소망교회에서 이 대통령을 처음 만난 뒤 30년 가까이 인연과 충성을 이어왔다. 2005년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은 서울시정개발연구원장에 그를 기용했다. 이후 강 장관은 2006년 경선 캠프에서 ‘7·4·7’정책 개발을 주도했고, 대선 때는 선대위 정책조정실장 겸 일류국가비전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내며 공약을 총괄했다. 대선 후 대통령직인수위에서는 경제1분과 간사를 맡았다. 당시에 이미 “경제부처 최고 수장은 강만수가 예약해놨다”는 얘기가 파다했다.

10년 전 감각 고수하는 관료주의자
최근 정부의 경제팀 교체론이 들끓을 때도 이 대통령은 “경제가 특히 어려운데 그때마다 책임을 물으면 한 달에 한 번씩 바꿔야 한다”며 강 장관 경질설을 일축했다. 강 장관이 모친상을 치르던 지난 6월 26일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빈소를 직접 방문해 두터운 신임을 보여주기도 했다. 강 장관에 대해 정치권에서 “죽어도 MB를 떠나지 않을 사람”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른바 ‘7·4·7’로 대변되는 이명박 대통령의 성장주의 경제 정책에 대한 강 장관의 맹신에 가까운 신념과 집행력은 대단하다. 오랜 야인생활을 접게 해준 은인에 대한 보답이 ‘주군과 신하’라는 전근대적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주변의 평가다.
하지만 결과는 이 대통령의 참담한 ‘자업자득’으로 나타나고 있다. 강 장관의 경제팀은 지난 5개월간 성장과 안정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였고, 그 결과 지지층까지 이탈하는 참담한 결과가 초래된 것. 대통령 선거에서 50%에 가깝던 이명박 정부의 지지율이 집권 5개월 만에 20% 밑으로 추락한 것이다.

경제 관료로서 강 장관은 원칙을 중요시하는 스타일로 알려져 있다. ‘소신을 잘 바꾸지 않고, 한 번 믿은 사람은 끝까지 믿는 스타일’이라는 게 그에 대한 경제 관련 부처의 평가다. 그는 재무부 과장 시절 장관의 지시에 오류가 있다며 4시간 동안 버티는가 하면, 재무부 이재국장 시절에는 정영의 당시 장관의 지시를 거부하다 국제금융국장, 공보관으로 좌천되기도 했다.

많은 사람은 강 장관의 ‘노후한’ 경제 관념과 무책임을 지적한다. 1970년 행정고시로 공직에 들어와 1997년 IMF 사태의 책임을 지고 물러날 때까지 한국경제의 고도 성장기를 직접 체험한 그가 아직도 과거 고도성장기의 경제 패러다임에 빠져 있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지난달 21일 발표된 ‘강만수 장관의 경질을 촉구하는 경제·경영학자들 118명의 공동성명서’를 주도한 양혁승 연세대 경영대 교수는 “우리 경제의 가용 자원을 풀가동했을 때 무리하지 않고 달성하는 성장률이 4.7% 전후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만수 장관은 7%를 고집하고 강행하고 있다”면서“그것을 위해 무리를 둔 핵심은 환율을 부추겨서 수출을 늘리겠다는 것으로, 이것은 1970~80년대 패러다임이며 그동안 경제 관료로 잔뼈가 굵은 강만수 장관의 과거 패러다임”이라고 주장했다.

자신의 저서에서 “불확실성의 증가는 경제 발전의 최대 적”이라고 주장했던 강만수 장관. 10년 전 IMF 사태의 책임을 지고 재경부 차관직에서 물러난 후 6년간 절치부심하며 썼다는 이 책의 과녁은, 역설적이게 지금 그 자신이다.

강만수의 인생유전

■출발 (1945~1970) : 경남고, 서울대 법학과 졸업. 제8회 행정고시 합격

■출세 (1970~1997) : 재정경제원 세제실장, 관세청장, 통상산업부 차관, 재경원 차관

■시련 (1998~2005) : 한국무역협회 상근부회장, 디지털경제연구소 이사장

■재기 (2005~2008) : 서울시정개발연구원 원장,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경제1분과위 간사

■부활 (2008~ ? ) : 기획재정부 장관


<조득진 기자 chodj21@kyum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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