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성남모란민속시장 상인회장 전성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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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시장 개장수

[사람의 길]전 성남모란민속시장 상인회장 전성배

어린 시절에, 개들은 종자에 관계없이 모두 동작이 가볍고 장난을 좋아한다. 어린 개들은 잠시도 가만히 좌정하지 못한다. 애완견 철망 속에서 어린 개들은 쉴 새 없이 철망 밖을 향해 앞발을 내밀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혀를 날름거리며 교태를 보낸다. 오랫동안 식용견 철망 속에 갇혀 산 개들은 싸울 때 싸우더라도 싸우지 않을 때는 늘 조용히 늘어져 있다. 오래 산 것들과 아직 덜 산 것들의 몸놀림은 이처럼 확연히 다르다. 애완견 상가와 식용견 상가가 마주보면서 모란시장 개의 풍경을 이루고, 식용견의 생로병사와, 애완견의 생로병사와 인간의 생로병사가 공존하면서 한국 사회의 개 팔자의 풍경을 완성한다. - 김훈 ‘자전거 여행·2’ 중에서

복날이 다가오면서 이 땅의 개들이 떨고 있다. 날은 유별나게 덥고 사람들은 모두 혀를 빼물고 다닌다. 초복에 중복에 말복에 다들 어김없이 보신에 허겁지겁하리라. 게다가 바닷고기는 기름때에 쩌들고 닭과 오리는 조류인플루엔자로 살처분당하고 돼지고기는 여름철에 잘 먹어야 본전이고 쇠고기는 새삼 이를 것도 없으니 먹을 거라곤 오로지 개고기뿐이란다. 이는 모란시장 한 개장수의 과장 섞인 너스레지만 모란시장 개들에겐 결코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언젠가 B·B(브리짓 바르도)인가 뭔가 하는 프랑스의 흘러간 육체파 여배우가 ‘개고기’에 대해 딴지를 걸어왔을 때만 해도 모란시장 개들 사이에는 적이 어떤 기대가 일었다. 그러나 하릴없는 ‘개고기 논쟁’은 그냥 옥신각신으로 허무하게 끝이 나고 말았고, 이땅의 ‘자주파’들은 여전히 ‘개고기 예찬론’에 여념이 없다.

알다시피 모란장(4·9일장)의 명성은 아무래도 개시장에서 비롯된다. 모란시장에서 개를 사고파는 부서의 명칭은 ‘애견부’다. 애완견, 특수견, 잡견이 거래되며 원래 모란장의 주요 품목이었던 식용견들은 다른 가금류와 함께 장 하루 전날 따로 도매장이 형성되기도 한다. 전성배(56)씨가 처음 모란시장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개장수로서지만 그의 취급 품목은 식용견이 아니라 애완견이었다. 기실 성배씨는 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물론 그것이 고기였을 때는 다르지만). 어릴 적 오징어를 씹고 있다가 그를 탐낸 개에게 입을 물려 혼쭐이 난 ‘안 좋은 기억’도 있다. 그런 그가 개장수가 된 경유는 이렇다.

모란시장에선 애완견과 식용견이 마주 보면서 오래 산 것과 아직 덜 산 것의 경계를 보여준다.

모란시장에선 애완견과 식용견이 마주 보면서 오래 산 것과 아직 덜 산 것의 경계를 보여준다.

충남 부여에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일찌감치 장사의 길로 들어섰다. 무슨 역마살이 끼어서인지 어려서부터 객지를 떠돌며 장사를 배웠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공부는 하기 싫었고 그렇다고 농사를 짓기에는 도무지 적성이 맞지 않았다. 그는 중학교를 마치자마자 공부를 때려치우고 군산의 유리공장에서 일했다. 1년 후쯤 잠시 집에 들렀을 때 어머니는 자식의 온몸에 가득한 흉터를 보고 눈물로 하소연했다. 다시 학교로 가든가 아니면 몸을 다치지 않는 장사를 하라고. 그는 장사도 배울 겸 한 신발가게의 점원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성배씨는 그리 오래지 않아 그 집을 나왔다. 당시 신발가게에는 그 말고 다른 점원이 있었는데 그는 주인의 처남이었다. 추석 귀향을 앞두고였다. 주인은 처남에게는 옷 한 벌을 새로 사주면서도 성배씨에게는 자기가 입던 옷을 내주며 입고 가라지 않는가. 성배씨는 그 길로 신발가게를 나와 집 논을 얼마간 판 돈으로 군산에 만화가게를 차렸다. 그도 얼마 가지 않아 만화가게를 형에게 넘기고 친구와 함께 순천 일대를 떠돌며 이런저런 장사를 했다.

군대를 다녀온 성배씨는 외국에나 나가려고 굴삭기 면허를 땄다. 그러나 어떡하다 결혼을 하게 되었고 아이까지 생기자 그냥 주저앉고 말았다. 그렇다고 농사나 짓고 살기는 죽어라고 싫었다. 1980년대 초 성배씨는 역시 집 땅마지기를 되는 대로 팔아서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먼저 상경한 친구의 도움으로 용산 농산물도매상가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차츰 주변 환경에 익숙해지면서 동업으로 농산물 위탁업을 시작해 그런대로 자리가 잡혀갔다. 그러나 농산물도매시장이 가락동으로 옮겨가면서 혼란과 무질서, 시행착오로 장사는 어려워졌고 게다가 동업했던 후배가 돈을 갖고 사라지는 바람에 장사를 정리하고 성남으로 이사해야만 했다.

성배씨는 사업의 실패보다도 믿었던 동업자의 배신에 더 큰 상처를 입었다. 술로 세월을 보내는 날들이 이어졌다. 생활이 그쯤되자 이제껏 말없이 지켜보던 아내가 파출부로 나섰다. 아내는 매일같이 뼈 빠지게 남의 집 일을 해서 받은 몇천 원 중 2000원을 성배씨에게 쥐어주면서 술을 먹더라도 끼니는 거르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그 돈으론 자신을 잊기 위해 고주망태가 되기에도 턱없이 부족하기만 했다. 아내를 처음 만난 건 군복무 때다. 거제의 한 여고 배구선수였던 아내는 키도 크고 얼굴도 예뻤다. 당시 아내가 다니던 학교가 새로 체육관을 짓느라 연습할 장소가 없자 성배씨가 근무하던 군부대 체육관을 이용하면서 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자신에게는 과분한 아내였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자신만 믿고 따르는 아내였다.

어느 날, 아내가 1000원짜리가 아니라 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을 터억 내밀며 말했다. 순식이 아빠, 그동안 남에게 얻어먹은 술 대신 점심이라도 대접하고 오세요. 순간 성배씨는 평소 아내가 자주 일을 나가던 집에 기만 원에서 많게는 기백만 원까지 굴러다녀도 털 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이 떠올랐다. 혹시 당신…. 아내는 도리질을 쳤다. 자신은 절대 남의 돈에는 10원짜리 한 장 욕심내지 않는다면서도 돈의 출처를 밝히기는 꺼렸다. 며칠 동안 추궁해 겨우 알아낸 사실이 성배씨가 오늘날까지 모란시장과 인연을 맺게 된 동기가 되었다.

당시 살던 집 이웃에 모란시장과 지방 5일장을 오가며 가축 장사를 하던 아주머니가 있었다. 그 아주머니는 새로 이사해온 성배씨 부부를 관심 있게 지켜봤단다. 남편이란 작자는 뚜렷한 직장도 없는 것 같은데 매일 고주망태가 되어서 돌아오고 그나마 젊은 마누라가 파출부라도 나가면서 살림을 꾸려가는 것이 대견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단다. 하루는 그 아주머니가 아내를 불러 자초지종을 듣고 난 후 파출부 일을 그만두고 자기가 하는 장사를 배울 생각은 없느냐고 하더란다. 그 장사를 하면 얼마나 벌 수 있느냐고 했더니 생각이 있으면 모란 장날 자기를 찾아오라고 했단다. 모란 장날 그 아주머니를 찾아갔더니 강아지 몇 마리를 주면서 옆에 가서 얼마에 팔아오라고 시키더란다. 시키는 대로 팔아오면 한 마리당 2000원에서 5000원까지 나누어주고 심지어 가격을 잘 받은 것 같으면 1만 원짜리를 쥐어주기도 해 하루 수입이 2만 원에서 5만 원까지 하더란다. 당시 파출부 일당이 고작 4000~5000원이었으니 그에 비하면 일도 편하면서 얼마나 큰 벌이였던가.

(왼쪽) 내리 다섯 차례 상인회장을 해온 그는 여전히 상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오른쪽) 성배씨의 든든한 배경, 아내는 여전히 모란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있다.

(왼쪽) 내리 다섯 차례 상인회장을 해온 그는 여전히 상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오른쪽) 성배씨의 든든한 배경, 아내는 여전히 모란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있다.

아내는 이왕 이리 된 김에 같이 장사를 하자고 했다. 아내의 손에 이끌려 성배씨는 가축 장사를 시작했다. 처음엔 도저히 못할 것 같았다. 어릴 적부터 강아지를 낳으면 이웃에 거저 나눠주던 것으로만 여겼던 탓에 강아지를 사고판다는 일이 영 어색하기만 했다. 게다가 모란시장은 가락시장과 지척이었다. 전에 같이 장사하던 친구들이 개고기 등을 사러 시장에 들르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그때마다 성배씨는 숨기에 바빴다. 지방 장을 돌 때는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박스에 담은 강아지가 심하게 낑낑거리거나 용변을 보는 바람에 눈총을 받고 쫓기듯 버스에서 내린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다시 장사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었다. 더구나 그의 곁에는 그보다 더 고생을 마다않는 아내가 있었다.

1994년, 성배씨는 모란시장이 생긴 이래 최초로 회원들이 직접 투표로 선출한 상인회 회장이 되었다. 금년 초까지 내리 다섯 차례 회장을 역임하면서 1000여 회원의 지지와 성원 속에 전국 최대의 민속장인 모란시장을 지켜왔다. 그는 시장을 탄천 주변으로 이주시키려는 움직임을 막아낸 것이나, 한걸음 더 나아가 2010년부터 현 시장 인근에 새로 장터를 조성하고 2단계 도약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것에 큰 보람을 느낀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꿋꿋이 자라준 아이들, 부모가 ‘개장수’라는 사실을 조금도 부끄럽지 않게 생각해준 아이들이 모두 어엿한 성인이 된 것은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자 자랑이다. 비록 회장 임기를 마쳤지만 성배씨는 장날이면 어김없이 시장으로 간다. 반평생 애환을 같이해온 상인들과 술잔을 나누며 모란시장의 꿈을 이야기한다. 더욱이 시장 한켠엔 아내가 여전히 장사를 하고 있다.

성배씨에게 개는 어떤 존재인가. 왜 사람 못된 건 개만도 못하다는 말이 있잖아요. 개는 주인이 아무리 술에 취해 들어와도, 사업에 실패해 들어와도 변함없이 반겨줍니다. 마누라는 그렇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성배씨는 옆에서 듣고 있던 아내의 눈총을 느끼곤 얼른 말을 돌린다. 개고기 좋아하십니까. 좋은 개고기를 사려면 우선 주인을 믿을 수 있어야지요. 사람들은 막연히 황구만을 찾는데, 도사견 같은 대형견이나 수입견과의 잡종만 아니라면 백구나 흑구도 맛에서 전혀 다를 바가 없어요. 굳이 색깔만 고집하지 않는다면 훨씬 싼값에 고기를 살 수 있지요. 근당 1000원 정도 차이가 나니까 많이 살 경우 한 마리 값이 빠지기도 합니다. 잘 아는 곳이 없다면 상인회를 찾아 도움을 얻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글·사진 유성문 편집위원 rotack@lyco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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