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업이 우선? 아니죠, 돈이 먼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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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복제약업체 란박시 사장 보유지분 매각… 할아버지가 창업한 기업 일본업체에 넘겨

인도의 기업은 M&A로 덩치를 키우기도 하지만 가업이라도 M&A를 통해 매각하기도 한다. 인도 뭄바이T의 전경.

인도의 기업은 M&A로 덩치를 키우기도 하지만 가업이라도 M&A를 통해 매각하기도 한다. 인도 뭄바이T의 전경.

지난 6월 11일, 인도는 놀라움에 휩싸였다. 인도 최대의 복제약 제조업체 란박시(Ranbaxy)의 사장이 자기 지분을 일본 제약업체 다이이치 산교(Daiichi Sankyo)에 넘겼다는 기사 때문이다. 란박시 창업자의 손자이자 사장 겸 최고경영자인 말빈더 모한 싱(35)은 자신이 보유한 지분 34.8% 전체를 다이이치 산교에 넘기는 대신, 최고경영자직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란박시는 인도에서 매우 잘 나가는 제약업체다. 지난해 연간 순매출이 10억 달러였고, 순이익만 1억4000만 달러를 기록했다. 순자산 가치는 6억5000만 달러로 세계 복제약 제조업체 중 7위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해외 제약업체를 활발히 인수하는 등 공격적인 경영을 펼쳐왔다. 이처럼 승승장구하던 기업의 주인이 갑자기 자기 회사를 외국인에게 팔아버리자 인도 사람들은 그 배경이 무엇인지 궁금해하고 언론사들도 추측 기사를 내놓고 있지만, 정작 당사자는 시원한 대답을 하지 않고 있다.

매각 배경 놓고 온갖 추측 떠돌아

[친디아 리포트]가업이 우선? 아니죠, 돈이 먼저죠

유추할 수 있는 매각 배경은 이렇다. 먼저 제약산업의 환경이 변했다. 2012년께 제약 특허가 만료되는 약이 36개 이상이다. 그중에는 콜레스테롤 저감 효과가 있는 리피토르(Lipitor)와 같이 대히트를 친 약을 포함해 수익이 되는 약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 약의 총 매출 규모는 약 700억 달러에 이른다. 특허가 만료되면 더 이상 개발업체가 특허권을 보호받지 못하고, 다른 회사들은 유사한 약을 만들어 시장에 팔 수 있다.

란박시 또한 이런 기회를 내다보고 해외 복제약 업체를 인수해왔다. 그러나 싱 사장은 700억 달러 시장이 환상이라고 판단한 듯하다. 특허로 보호받는 약은 대개 고가에 팔린다. 경쟁자가 없기 때문이다. 수요는 많은데 공급은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으니 업체가 정하는 가격이 바로 시장가격이다. 어떤 약은 제조원가의 10배 이상에 팔린다고도 한다.

하지만 특허가 풀리면 어떻게 될까? 누구든지 만료된 특허를 이용해 약을 생산할 수 있어 경쟁자가 넘쳐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가격은 점차 하락할 것이 뻔하다. 700억 달러 시장은 말 그대로 특허로 보호받는 업체가 그동안 누려왔던 전매권에 기초를 둔 시장이지 아무나 참여할 수 있는 완전경쟁 시장에서 보장된 수익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과도한 가격경쟁으로 치달아 생산 원가 이하에 약을 팔아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가격이 낮아지면서 그동안 약을 구매하지 못했던 소비자가 약을 살 수 있어 시장의 저변이 넓어질 수도 있겠지만 수익단가 측면에서 이롭지는 않을 것이다. 시장 규모가 커져도 각자가 낼 수 있는 이익은 얼마 안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주식 팔아도 최고경영자 지위는 유지
또 하나 매각의 배경이 된 것은 복제약 업체의 수익성이 점차 떨어진다는 점이다. 세계 각국에서 특허와 같은 지적재산권을 보호하는 장치를 강화하면서 복제약 업체가 초과 이윤을 얻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복제약 업체 간 경쟁도 격화하고 있다. 지금처럼 지적재산권이 강화되는 추세라면 순이익률은 앞으로 더 떨어질 수 있다. 이로 인해 많은 복제약 업체가 신약 개발에 참여하고 있으나, 신약 개발을 단기간에 달성하기도 어렵다. 인도에는 우수한 바이오 인력이 풍부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들 또한 신약을 자체 개발하기보다 발견한 신약 기술을 다국적 제약업체에 파는 방식을 택한다. 임상 실험에 너무 많은 돈이 들기 때문이다.

인도 최대 복제약 제조업체인 란박시의 주요 임원들. 말빈더 모한 싱 사장(오른쪽에서 일곱 번째)은 3대째 내려온 기업을 최근 매각했다.

인도 최대 복제약 제조업체인 란박시의 주요 임원들. 말빈더 모한 싱 사장(오른쪽에서 일곱 번째)은 3대째 내려온 기업을 최근 매각했다.

복제약 업체가 직면한 환경 변화를 감안하면, 싱 사장은 미래를 내다보고 란박시를 아주 좋은 가격에 매각한 것이다. 이번 주식 매각을 통해 싱 사장 일가가 받는 현금은 20억~30억 달러에 달할 전망이다. 세금 및 이자를 공제하기 전 영업이익의 21배에 달하는 높은 가격으로 주식을 평가받았다고 한다. 이는 같은 복제약 업체인 멜크제네릭(Merck Generics)과 매트릭스(Matrix)가 밀란(Mylan)에 팔릴 때 받은 14배와 18배 평가에 비하면 아주 높은 수준이다.

주식은 전혀 보유하지 않지만 대표이사 사장 겸 최고경영자 직위를 유지할 수 있는 이득도 챙겼다. 뿐만 아니라 다이이치 산교는 추가로 신주인수권을 발행해 10억 달러의 현금을 차입하겠다고 약속해, 그동안 부담인 부채도 크게 준다. 이렇게 되면 란박시의 경영 안정성은 더욱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싱 사장이 주식 매각으로 받은 현금을 어디에 쓸 것인지 밝히지는 않았지만, 집안에서 운영 중인 병원과 금융업에 투자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매각에서는 인도인의 상인 기질이 다시 한 번 발휘된 것으로 보인다. 싱 사장의 조부인 바이 모한 싱 회장은 1960년대에 약품 유통 회사였던 란박시의 창업자 란지트 싱과 구르박스 싱에게 회사를 인수했다. 자신이 창업해 땀을 바쳐 키운 회사라기보다 채무 대신에 받은 회사인 셈이다. 하지만 1970년대에 약품 유통뿐 아니라 약품 제조까지 사업 영역을 넓히는 과정에서 란지트 싱 회장이 공을 많이 들였다.

“탈출이 아니라 합리적 경영판단”
1980년대에 바이 모한 싱 회장은 란박시를 아들인 파르빈더 싱에게 물려주었지만, 1990년대 말에 파르빈더 싱이 암 판정을 받자 후계자를 다시 선정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이후 D.S. 브라르(Brar)에게 경영권을 승계했다가 다시 3년 전에 말빈더 싱이 대표이사로 취임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싱 가문이 란박시와 맺은 인연은 40년에 달하지만, 35세에 불과한 말빈더 사장이 주식을 판 것을 보면 가업을 잇고 발전시킨다는 생각보다는 좋은 가격이라면 가업이라도 팔 수 있다는 인도인의 상인 기질이 앞선 것으로 보인다. 과거 MS에 팔린 핫메일의 창업자 가운데 한 사람인 인도인 사비르 바티아 역시 높은 가격에 팔 수 있다면 과감히 매각하고 다른 사업으로 이동하는 인도 상인 기질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정작 말빈더 싱 사장은 주식 매각에 대해 말을 아끼고 있지만, ‘비즈니스 월드’와 인터뷰에서 이번 주식 매각이 흔히 말하는 탈출 전략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다이이치 산교와는 처음에 사업 협력의 관점에서 얘기가 오갔는데, 그 쪽에서 50%를 초과하는 지분을 요구해 최대 지분이 아니라면 굳이 주식을 보유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 팔았다”는 것이다. 이번 매각을 사업 협력의 한 형태로 봐야 하며 탈출 개념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 발언이다.

주식을 한 주도 갖지 못한 상태에서 다이이치 산교와 통합 작업을 잘 진행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는 “전에는 소유주이자 경영자였지만, 지금은 순수한 경영자이므로 경영자의 관점에서 처리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고 답했다. 다른 가족들이 경영하는 사업은 자신의 주식 매각과는 상관없이 모두 독립적인 기업으로 운영할 것임을 밝혔다. 그는 자신의 주식 매각이 전환점에 서 있는 기업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거래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면서, 앞으로도 많은 기업이 자신과 같은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싱 사장은 이번 매각의 성과를 매우 자신하고 있지만, 회의적인 견해를 가진 이도 많다. 인수한 기업이 집단적 의사결정, 합의에 의한 의사결정으로 유명한 일본 기업이기 때문이다. 창업자의 손자로서 개인적인 의사결정에 많이 의존한 싱 사장이 전혀 다른 일본 문화에 적응해갈 수 있겠느냐는 점 때문이다.

이번 거래를 평가하기에 앞서, 인도의 젊은 경영자들의 경영철학을 다시 한 번 새겨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서구화된 경영을 펼치면서도 조상이 물려준 상인 기질을 여전히 계승하고 있는 듯하다. 동양의 일반 정서로서는 할아버지가 땀 흘려 육성한 기업을 쉽게 팔아치우는 것에 거부감이 있겠지만, 실크로드 상인의 전통을 이어 받은 인도인들에게는 다른 계산법이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이대우<포스코경영연구소 연구위원> Ldw@posri.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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