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민주주의의 희망’이 동트고 있었다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6·10 촛불문화제 밤샘 르포, ‘명박산성’도 민심의 새 흐름 막지 못해

6월 10일 세종로에 모인 40만 시민이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

6월 10일 세종로에 모인 40만 시민이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

6·10항쟁 21주년 기념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시작은 참담했다. 정부는 시민들에게 컨테이너 장벽을 선사했다. 2단으로 쌓아올린 약 3m 높이의 컨테이너 20개가 세종로 네거리를 차단했다. 장벽 양쪽 끝단의 빈틈에는 전경 버스가 세로로 주차해 있었다. 장벽이 정부의 두려움 위에 쌓여진 것인지, 정부의 폭력 위에 쌓여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시민들은 장벽을 ‘명박산성’이라고 불렀고, 진중권 교수는 ‘미니멀리즘’이라고 말했다. 40만 촛불의 행렬은 장벽 너머로 나아갈 수 없었고, 경찰은 다음날 오전 6시까지 장벽 안에서 웅크렸다.

시청 앞 서울광장에는 애드벌룬에 매달린 펼침막이 나부꼈다. 붉은 바탕 위에 ‘법질서수호 FTA 비준 촉구 국민대회’라는 글자가 펄럭였다. 연단에 선 행사 진행자는 “모든 촛불의 배후에는 KBS와 MBC가 있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9년 반 동안 저질 쇠고기를 먹었다”는 한 보수단체의 대표는 “이명박 정권을 도구로 삼고 공권력을 철퇴로 삼아 좌익 선동세력을 처단할 것”이라고 기염을 토했다. 경찰은 서울광장 테두리에 폴리스라인을 쳤다. 폴리스라인 밖 한 진보단체의 천막에서 흘러나온 ‘광야에서’의 노랫말이 “전교조 교사를 색출하고 처단하자”는 보수의 목소리와 뒤섞였다. 소음 때문인지 초여름의 열기 때문인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정장과 캐주얼, 넥타이 등 어우러져
화가 이선일(36)씨와 손승화(31)씨는 광장 한켠에서 시민들에게 페이스 페인팅을 해주고 있었다. 이씨는 “(보수단체 사람들도) 나라를 위해 나왔을 것이다. 다양성은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손씨는 컨테이너를 두고 “여전히 소통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어느 40대 남자가 원하는 문구를 팔뚝에 그려달라며 이들에게 종이 쪽지를 내밀었다. 문구는 ‘MB=지진아 공교육 꼭 필요’였다.

5시 40분쯤, 동화면세점 앞 세종로에 수십 개의 깃발이 솟았다. 임시로 설치한 무대 위에 ‘공공운수노동자 총궐기대회’라는 펼침막이 걸렸다. 사회자는 “6월 16일에 총파업에 돌입하겠다”고 말했다. 진행을 맡은 여성이 마이크를 잡고 대열을 정리했다. 그는 “공공노조 깃발이 지나가는 좌우로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있게) 1m씩 장소를 확보해”달라고 말했다.

참여연대는 파이낸스센터 앞 인도에서 어청수 청장 파면촉구 서명운동을 벌였다. 근처에서 전국언론노동조합이 조·중·동 절독 서명을 받고 있었다. 이희진(30)씨는 “메이저 신문들은 ‘시민들의 도발이 경찰의 진압을 불러왔다’고도 하고 ‘배후가 있다’고도 한다”며 서명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세종로와 태평로로 몰려왔다. 선 채로 행렬의 끝을 가늠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인산인해였다. 거리는 성과 세대가 씨줄로 얽히고 개인과 단체가 날줄로 얽혀 그려내는 한국 사회의 축소판이었다. 청소년과 성인이 섞이고 가족끼리 나온 이들과 친구끼리 나온 이들이 섞였으며 대학생과 노동자들이 부대꼈다. 거리는 패션 전시장이었다. 넥타이와 미니스커트, 체육복과 작업복, 정장과 캐주얼이 현란한 모자이크를 이뤘다.

즉흥적 구호 만들어 모두 함께 외쳐

도로 위에 밝혀진 촛불을 따라 걷는 시민들. 이날 촛불은 끝내 컨테이너 장벽을 넘지 못했다.

도로 위에 밝혀진 촛불을 따라 걷는 시민들. 이날 촛불은 끝내 컨테이너 장벽을 넘지 못했다.

숨가쁘게 달리는 한국 사회에서 21년을 버텨내는 동안 머리가 희어진 ‘1987년 6·10 거리의 투사’들도 촛불을 들고 나왔다. 21년 전 대학 졸업반이었다는 오민환(45)씨는 “이 자유로운 해방의 공간은 명동성당을 기지삼아 게릴라전을 방불케 하는 싸움을 치르던 그때와 비교하면 모든 게 새롭다”고 말했다. 당시 한국은행에 재직 중이었던 오용석(54)씨는 “1987년에 우리가 독재권력에 대한 분노의 함성을 질렀다면 지금 시민들은 정권의 못남을 조롱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씨는 “오늘은 모두 모여 크게 하나가 되는 자리다. 역사의 물줄기가 앞으로 나아가는 용트림이 느껴진다”고 감동을 표현했다. 김영후(40)씨는 “87년과는 달리 절박함보다는 희망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고 말했다.

오후 7시 20분쯤. 박원석 광우병국민대책회의 상황실장은 시민들을 향해 “넥타이 부대” “어머님들” “청소년들” “초등학생들”을 차례로 부르며 “다 오셨냐”고 묻고는 “100만 촛불대행진을 시작하겠다”고 선포했다. 노래와 구호를 따라 부르는 시민들의 목소리는 스피커에 묻혀 거의 들리지 않았다. 가수 양희은씨가 ‘아침이슬’을 부르자, 그제야 양희은씨의 목소리만이 아니라 시민들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둠이 몰려왔다. 그러나 촛불은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세종로~태평로 거리는 촛불의 바다로 변했다. 시민들의 표정도 덩달아 생기를 띠기 시작했다. 9시 10분쯤 ‘임을 위한 행진곡’이 흐르는 가운데 거리행진이 시작됐다. 시민들은 일제히 일어나 촛불을 들었다. 교복 차림의 고등학생들이 근처 시민들이 깔고 앉았던 종이를 보이는 대로 주워 쓰레기봉투에 담았다. 한 40대 남자도 옆에서 거들었다.

대열은 세 방향으로 이동했다. 한 무리는 서대문으로, 다른 두 무리는 각각 남대문과 종로를 향해 움직였다. 종로 방향으로 이동하던 시민들은 도로의 중앙분리선을 따라 촛불을 세웠다. 도로 위에 세워진 촛불의 띠는 교보문고 앞에서 안국 네거리까지 이어졌다. 어느 여학생은 “마음 편히 마시고 싶다 합정동 주사파”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걸어갔다. 지금껏 거리행진에서 그래왔던 대로, 시민들은 누군가 즉흥적으로 구호를 만들면 그 구호를 함께 외쳤다. 어린아이와 여성들의 소프라노톤이 남자들의 굵은 목소리와 어울리며 발랄한 화음을 이뤘다. 안국 네거리를 향해 촛불을 들고 걷던 사회갈등연구소의 박태순 소장은 “이곳 현장에서 민주주의를 체험한 10대와 20대가 우리 사회의 주체가 된다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더욱 탄탄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10시 50분쯤 대열은 옛 한국일보 터에서 컨테이너 장벽에 가로막혔다. 시민들은 1시간가량 앉아 있다가 광화문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의 아스팔트는 대통령과 정부를 조롱하는 분필 낙서로 가득했다.

11일 오전 5시쯤 경찰이 설치한 컨테이너 장벽 위에서 깃발을 흔드는 시민들.

11일 오전 5시쯤 경찰이 설치한 컨테이너 장벽 위에서 깃발을 흔드는 시민들.

11일 새벽 1시 30분쯤 광화문 교보문고 앞 컨테이너 장벽 아래 스티로폼 계단 주위에서는 격앙된 자유발언과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다. 조끼를 입은 인권단체 연석회의 봉사자들이 스티로폼 위로 올라서려는 시민들을 제지하는 가운데 한 여성이 계단 꼭대기에 올라섰다. 인권단체 연석회의의 박진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 여성은 “이 컨테이너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가로막은 폭력”이라면서 스티로폼 주위에 모인 수천 명의 시민을 향해 “우리는 토론을 통해 이 연단을 쌓았다. 이 자리는 시민들이 만든 직접민주주의의 현장이다”라고 말했다. 홍익대 85학번이라는 김귀정씨는 “우리의 싸움을 비폭력 무저항이라고 부른다. 비폭력은 맞지만 무저항은 아니다”라고 말해 박수를 받았다. 한 대학생은 “더 많이 토론하자, 더 많이 논쟁하자”고 말했다.

스티로폼 계단 주변서 격렬한 토론
스티로폼 계단 앞은 박수와 고성이 오가는 난장이었다. 스티로폼 계단을 컨테이너 장벽 앞에 쌓고 장벽을 넘어가자는 주장과 안전을 보장할 수 없으니 그냥 두자는 주장이 엇갈렸고, 장벽을 넘지는 않더라도 우리의 의지는 보여주어야 한다는 절충안이 다른 주장들과 맞부딪쳤다. 그러는 사이 일부 시민은 이미 스티로폼을 빼내 장벽 앞으로 옮기기도 했다. 연석회의 봉사자들은 “위험하다”며 말렸고, “웃기는 소리 마라”와 “내려와”라는 고함이 뒤섞였다. 토론은 그 뒤 4시간 가까이 더 이어졌다.

토론은 스티로폼 앞에서만이 아니라 앉아 있던 군중 사이에서도 벌어졌다. 한 40대 남성은 20대 남녀 대학생과 조용하지만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학생들은 “60만이 모인 것만으로도 변화의 동력은 충분히 결집됐다. 꼭 넘어가야 하나”라고 말했다.

40대 남성은 “나에게는 저 벽이 상처다. 넘어가자는 게 아니라 한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거다”라고 맞받았다. 40대 남성은 토론 내내 경어를 사용했고, 학생들도 나이를 의식하지 않았다. 또 다른 곳에서는 시민 세 사람이 토론을 벌였고, 10여 명의 시민이 옆에서 경청했다. 한 30대 남성은 “청와대 수석 몇 명 교체하고 흐지부지되면 어떻게 하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 30대 여성은 “술 마시고 연애하는 것이 뭐가 나쁜가. 나는 그런 것도 우리의 힘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지켜보던 다른 한 시민은 “나는 청와대로 가자는 입장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계속해서 모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토론은 격렬했지만, 그들의 눈빛은 더없이 고요하고 진지했다. 새벽별이 그들의 눈 속에서 빛나고 있는 듯했다.

11일 오전 4시 40분쯤 깃발을 든 이들이 하나 둘 컨테이너 장벽 위로 올라갔다. 깃발은 두 개에서 네 개로, 네 개에서 다시 그 배수로 늘었다. 밤을 꼬박 새며 이어간 토론의 결과였다. 컨테이너 위에 선 이들이 ‘소통의 정부, 이것이 MB식 소통인가’라는 커다란 펼침막을 들고 장벽 너머 경찰을 향해 돌아섰다. 시민들의 박수와 환호성이 울렸다. 정치인들이 내다버린 민주주의가 시민들의 손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글·사진 |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왼쪽_위_

바로가기

주간경향 댓글 정책에 따라
이 기사에서는 댓글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