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성석제표 산문 읽기의 진수를 맛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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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cc6600"><b>농담하는 카메라</b></font><br> 성석제·문학동네·2008

농담하는 카메라
성석제·문학동네·2008

이것은 카메라 얘기가 아니다. 카메라로 멋진 사진을 찍는 법을 가르치는 책이 아니란 얘기다. 아니 카메라 얘기가 맞다.

“나는 존재와 삶 자체가 카메라인 동시에 필름, 혹은 메모리 카드, 인화지임을 명심하고 있다”고 할 때의 그 카메라 얘기다. 한 사람이 타고난 기질과 취향이 집약되고, 개성이 번쩍하고 작렬하는 그 작용점이 몸이라면, 몸은 세계와 삶이라는 피사체를 향해 열린 뷰파인더고 압축파일로 보존하는 저장매체인 셈이다.

성석제의 글에는 유독 식음(食飮)에 얽힌 얘기가 많다. 누런 해가 뜨고 흰 달이 지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데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일이 제 입으로 들어오는 밥과 그 밥이 거치는 경로의 윤리성에 대한 성찰임을 잘 아는 까닭이다. 이 산문집에도 막국수, 라면, 비빔밥, 자장면, ‘랭면’, 불고기, 쌈밥 따위에 대한 글들이 주르륵 이어진다. ‘농담 유전자’를 타고난 성석제가 몸으로 보고 겪은 것은 ‘독재나 탄압, 정경유착, 지역갈등, 무차별 개발’과 같은 큰 문제들이겠지만, 그는 큰 문제들에 대해 쓰지 않는다.

오히려 주변, 지나쳐도 좋은 작은 문제들, 부스러기로 흩어진 그것들의 사정과 곡절에 대해 시시콜콜하게 말하고 쓴다. 그는 막국수의 맛과 그것이 어떻게 몸을 길들이고 끌어당기는지에 대해, 처음 마셔본 생맥주와 그것이 몸 안에 들어와 일으킨 반응과 그 앞뒤 사정에 대해, 제 몸이 겪은 바와 머리가 아는 바를 버무려서 한 편의 글로 빚는다. 그 글을 따라가면 그 끝에 남는 것은 농담의 유쾌한 쓰디씀, 그 쓰디씀 끝에 따라오는 약간의 슬픔과 노스탤지어다. 성석제표 산문 읽기의 진수를 맛보는 일은 그 산문에 녹아 있는 농담을 제대로 음미하기에 달려 있다.

집에서 쓰는 도마까지 배낭에 짊어지고 나섰던 지리산 종주기가 됐든, 좌충우돌 바둑 교유기가 됐든, 난데없이 ‘동무생각’이란 노래가 가족의 축가로 울려퍼진 어머니의 칠순 잔치 때 얘기가 됐든, 책을 훔친 일의 고백이 됐든 성석제의 손을 거쳐 나오는 산문은 재미가 있다. 그 재미의 태반은 농담에서 나온다. 이를테면 “재능 있는 책도둑은 아무 책이나 훔치는 게 아니라 훔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훔친다. 다른 것이 아닌 책을 훔침으로써 문명과 역사에 대한 안목을 넓히며 지식과 감성의 이종교배로 유전자를 개량할 수 있다.”(‘책도둑의 변명’)라고 큰소리칠 때는 근엄한 사람일지라도 입가가 비틀리며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기 힘들 것이다.

농담이란 무엇인가. 농담은 도덕의 숭고한 표피를 뒤집어쓰고 위엄을 뿜어내는 것들을 향한 유쾌하고 경미한 말 폭력이다. 멀쩡한 것을 멀쩡하지 않은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실은 멀쩡한 것은 멀쩡한 것이 아니었으니 그 본디의 멀쩡하지 않음으로 돌려놓는 기술이 농담이다. 농담의 중요한 수법은 비틀기와 꼬집기다.

멀쩡한 것을 비틀고 꼬집어 그 멀쩡하지 않은 속내를 드러내보이는 게 농담이다. 농담은 정면으로 대거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비켜서서 가볍게 잽을 날리는 행위다. 잽도 반복해서 맞으면 맷집이 좋은 선수라도 상해를 입는다. 농담은 슬픔과 권태와 무뚝뚝함을 한데 뭉뚱그려 기쁨으로, 무관심과 냉소주의를 열정의 질료로 변환시키는 힘이 있다. 일찍이 한 선각은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 그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 (박인환, ‘목마와 숙녀’)한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니 농담은 모순과 상극으로 얽혀 있고, 통속으로 얼룩진 인생을 향해 떨어지는 신비로운 영약(靈藥)이다.

농담의 이면은 연민이다. 산 것들, 여린 것들, 신생의 삶이 낯설어 우는 것들에겐 따뜻한 관심과 연민이 필요하다. ‘선물’은 저 어린시절 아버지에게서 일평생 처음으로 받았던 선물에 대한 추억을 털어놓는다. 그 선물은 숨결을 가진 어린 것이다. 어린 ‘선물’은 낑낑대며 밤새 울었다. 어린 성석제는 큰맘 먹고 아껴 먹다 남겨둔 백설기와 접시에 담은 물을 어린 ‘선물’에게 주었다. 그러나 어린 ‘선물’은 그 선물에 관심이 없고, 그저 계속 낑낑대며 울어댔다. ‘선물’은 너무 어려서 백설기를 먹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린 ‘선물’은 머리를 쓰다듬자 비로소 울음을 그쳤다. 관심과 연민을 중단하면 어린 ‘선물’은 다시 울었다. 결국 어린 성석제는 어린 ‘선물’과 함께 밖에서 밝아오는 새벽을 맞았다. “아버지는 강아지를 선물했다. 나는 강아지에게 백설기를 선물했다. 밤이 아침을 선물하듯 강아지는 내게 난생 처음 경험하는 연민의 감성을 선물했다.”

좋은 음식점에는 물론 좋은 재료로 정성껏 만든 음식이 있을 테고, 주인의 소박하고 진심을 다한 응대, 그밖에 “깨끗한 식탁이나 잘 배치된 소품, 오래된 서까래나 들보”도 있을 터다. 그런데 좋은 음식점이 되기 위해서 없어야 하는 것도 있다. 그것은 “식당을 식당답지 않게 하면서 어느 식당에나 흔히 있는 그 물건”, 즉 텔레비전을 없애는 것이다. 음식점마다 들여놓은 텔레비전을 두고 성석제는 이렇게 말한다. “지나가는 청둥오리, 비오리, 흰뺨검둥오리를 향해서는 ‘어서 오세요, 어서 오세요’ 하지만 정작 와준 집오리는 텔레비전이나 보고 앉아 있으라는 식이다.”

시킨 밥이 나오는 짧지 않은 동안 우두커니 들여다보는 텔레비전은 그 식당을 찾은 ‘집오리’를 제대로 대접하는 일이 아니다. 주인이 해야 할 친절한 응대와 서비스를 그 방자하고 제멋대로인 텔레비전에 맡긴 꼴이니, 주인은 코빼기도 안 보이는 홀 안에서 그저 텔레비전이나 보고 앉아 있는 ‘집오리’는 기분이 나쁘다(‘좋은 음식점에 없는 것들’).

성석제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꼬치꼬치 따지고 되새긴다. 지난 세기의 전부를 속도를 높이고 성장을 흠모하며 달려오느라 우리는 깊이를 잃었다. 속도를 높이는 일은 곧 빠른 성장의 효율을 높이는 일이니 둘은 깊이 상관된다. 좁은 길, 가는 길, 젖은 길, 무너진 길, 오래된 길, 풀이 우거진 길은 속도를 낼 수 없는 비효율의 표상이다. 그 길들을 기어코 넓은 직선 길로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필경 그 길의 고즈넉함, 고요, 그윽함은 사라진다. “속도는 보이는 모든 것을 2차원의 평면으로 낮추고 깊이를 앗아간다.”(‘길 끝에서 만나고 싶은 것들’) 깊이를 잃어버린 세상은 좋은 세상이 아니다. 거기에는 예의와 상식, 나와 다른 남에 대한 배려가 사라지고, 그 대신 들뜸, 큰 목소리, 뻔뻔함이 활개를 친다. 그런 세상은 나쁜 세상이다. “결국 좋은 세상은 다른 사람이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사람이 사람을 존중하는 세상이다.”(‘세상이 좋아진다는 것’)
이 나라에서 비경이라고 여겨지는 계곡이나 산자락 밑에는 예외 없이 음식점, 민박집, 펜션, 별장 들이 들어 서 있다.

그것들은 비경을 사유화함으로써 망치는 행위다. 이를테면 “모퉁이를 돌자 푸른 물과 녹색의 숲, 흰 바위가 이뤄내는 심미적 균형을 산산조각 내는 뻘건 철제 주택이 나타났다. 통유리로 창을 낸 방이 십여 개는 되어 보여서 흔한 펜션인가 싶었지만 아무런 표시가 없는 것이 개인이 주말에나 들르는 별장이었다.” (‘비경의 사유화’) 비경에 홀린 사람이 남과 더불어 눈으로 보고 즐길 것이 아니라 재빨리 돈벌이의 수단, 혹은 나만 즐기는 것으로 사유화해버린다. 자연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만인의 것이다.

그것을 사유화하는 자들은 남에 대한 배려나 사려 깊음 따위와는 담 쌓고 사는 사람들이다. 성석제는 그들에게 따지고 묻는다.

“당신들, 그렇게 해서 재미있고 행복하시오?”
‘농담하는 카메라’에는 유쾌한 농담이 활개를 친다.
포복절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몇 번은 크게 웃을 수 있다.

성석제는 제 카메라를 보기 드문 비경에만 들이댄 게 아니라 일상의 구석구석을 훑는다. 비경은 밖에 있는 게 아니라 저마다 튀는 성깔과 개성을 가진 우리 이웃들 속에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치열한 키 크기 경쟁을 통해 햇빛을 독과점하려는 큰키나무 숲, 그 아래쪽에 무성히 자라나는 풀과 관목은 그 아래 부엽토 속에 우리 삶에 윤기를 가져다주는 것이 훨씬 많다고 나는 믿는다.”

(‘잡학을 위한 변명’) 우리는 흔히 빛을 독과점하는 큰키나무만 보는 경우가 있다. 그 그늘에 풀과 관목들이 자란다. 돌이켜보면 장삼이사의 삶에 활력을 주고 윤기를 가져다주는 것은 큰키나무들이 아니라 작아서 눈에 잘 띄지 않는 그런 것들이다.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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