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항쟁기념사업회 상임이사장 지선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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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은 이참에 스스로 물러나야”

[아주 특별한 인터뷰]6월항쟁기념사업회 상임이사장 지선 스님

지선(62·知詵) 스님은 1980~90년대 민주화운동의 중심에 선 불교계의 대표적 인사다. 6월항쟁이 절정에 달했던 1987년 6월 10일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 지명 무효 선언문을 낭독하면서 민주화운동 현장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한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재야활동을 멈추고, 조계종 제18교구본사인 고불총림 백양사에 칩거하면서 참선 정진하고 있다.

백양사의 유나(사찰의 수행을 총괄하는 큰스님)를 맡고 있는 지선 스님을 만나기 위해 전남 장성으로 향했다. 최근 전국적으로 일고 있는 촛불시위가 6·10 민주항쟁을 연상케 하는 일면이 있기 때문이다. 지선 스님은 현재 6월항쟁기념사업회 상임이사장이다.

이른 아침 서울에서 자동차를 타고 3시간가량 달려 도착한 전라남도 장성군. 고불총림 백양사 입구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좌우로 늘어서서 울창한 터널을 만든 아름드리 단풍나무와 벚나무들, 그리고 ‘좔좔좔’ 소리를 내며 다정하게 흐르는 쌍계수다. 물소리는 나뭇가지를 스치는 바람소리와, ‘삐비빅’ ‘뽀르르르륵’ 거리며 정겹게 주고받는 새들의 지저귐과 어우러져 운치를 더하고 있다.

조금 더 올라가니 학이 날개를 펴고 있는 듯한 모습이어서 ‘학바위’라고 불리는 백암산의 거대한 바위가 한눈에 들어온다. 새벽녘에 달이 저물면서 그 빛이 바위에 부딪히면 그 부위가 하얗게 발광해 신비한 기운을 띤다.

지선 스님은 1998년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곳 백양사 선방에서 10년 가까이 참선생활을 하고 있다. 날랜 걸음과 빠른 호남 사투리가 인상적인 지선 스님을 따라 백암산 꼭대기에 위치한 운문암(雲門庵)에 올랐다. 평지에서 2.7㎞ 올라야 다다르는 운문암을 지선 스님은 매일 한달음에 오르내린다고 한다. 운문암은 비가 오면 구름이 문을 만들고 그 밑으로 광주의 무등산, 광양의 백운산, 순천의 조계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명당 중 명당. 만암 대종사, 서옹 종정 등 이름난 스님들이 거쳐 간 곳이다.

암자에 앉자마자 가장 궁금한 질문부터 꺼냈다. 1980년대부터 불교계를 대표해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지선 스님은 과연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해 전국적으로 불붙은 촛불시위를 어떻게 볼까 하는 것이다. 그는 “역사가 거꾸로 가고 있다”면서 “촛불시위는 현상은 변했으나 본질이 변하지 않은 탓에 발생한 당연한 현상”이라고 해석했다.

“우리나라의 본질은 자주, 민주, 통일이에요. 우리나라가 현상적으로는 군사독재가 물러나고 민주화된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는 자주, 민주,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탓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4대 강국 속에서 우리나라는 자주적인 독립국가가 되기 어려워요. 또 완전한 민주주의를 이루려면 통일이 전제돼야 하고, 통일이 됐다는 말은 완전 민주화가 됐다는 말과 같아요. 물론 저도 급작스러운 통일을 하자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북한을 변화시켜서 정치·경제 모든 면에서 우리와 어느 정도 비슷한 수준까지 끌어올리면서 연방제식 통일을 이루자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명박씨는 우리 국민이 그동안 가꿔온 민주와 통일, 경제, 교육농사를 두루 다 망치면서 옛날 군부독재시대처럼 역사를 거꾸로 돌려놔 버렸어요.”

지선 스님의 발언은 거침이 없었다. 내친 김에 할 말은 해야겠다고 작심한 듯, “이명박 대통령은 ‘감’(대통령감)이 안 되기 때문에 이참에 스스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명박씨는 위장취업, 위장전입 등 애초부터 아주 부도덕한 사람이잖아요. 그런 부정한 사람을 당선시킨 국민의 책임도 커요. 이명박씨가 경제를 살릴 것이라는 희망 하나로 묻지마 투표를 하거나 ‘그 놈이 그 놈’이라며 기권한 국민이 많았잖아요. 이명박씨는 대통령으로서 아무런 준비도 안 된 사람이에요. 경험도 철학도 없어요. 그저 회사를 운영하는 식으로 나라를 운영하려고 하고 국민을 자기 회사 직원을 대하듯이 자기가 명령하면 무조건 따르라는 식이지요. 게다가 한나라당 사람들은 과거 노무현 정부에 대해 온갖 욕을 다 했지만 오히려 이명박 정부 인사들이야말로 부정비리로 얼룩진 사기꾼들 아니에요?

이들이 나라를 다 망치고 있는 거예요. 앞날이 캄캄해요. 그러니까 한나라당 사람들도 빨리 정신 차려서 혁명적으로 다 갈아치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명박씨 집권 내내 불신, 불안, 불평등, 부조리, 부정, 이런 것만 횡행할 거예요.”

지선 스님은 위정자들은 ‘주권재민(主權在民: 나라의 주권이 국민에 있음)’을 망각해선 안 된다고 일갈했다. 이것이야말로 4·19, 5·18, 6·10을 거쳐 이번 촛불시위에도 도도히 흐르는 국민의 요구이자 정신이라는 것이다(관련 내용은 박스 안에).

그렇다면 1961년 백양사에서 득도한 지선 스님은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을까. 지선 스님은 1946년 1월 장성군 삼계면 상도리의 가난한 농가에서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속세에서의 이름이 최형술이던 지선 스님은 어려서 별명이 ‘욕보’였을 만큼 욕을 잘하는 개구쟁이였다고 한다.

재 너머 큰 마을에 다녀올 때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책을 사다줬다. ‘장화홍련전’ ‘홍길동전’ ‘유충렬전’ ‘서산대사전’ 등 주로 고전소설과 위인전이었다. 어린 형술은 늦은 밤 동네 어른들이 사랑방에 모여앉아 새끼를 꼬을 때마다 불려 갔다. 호롱불 밑에서 마치 창을 하듯 타령조로 책을 읽었다. 몇 시간씩 책을 읽다 보면 코밑이 시커멓게 얼룩졌다.

“읽다가 목이 아프고 피곤해 슬그머니 나가려고 하면 ‘야, 벌써 나가냐. 이도령 암행어사 되는 데까지 읽고 나가라’ 하며 붙잡곤 하셨어요. 그럼 또 졸린 눈을 억지로 뜬 채 책을 읽고 또 읽었지요.”

독서에 따른 조숙함 때문이었을까. 중학교 2학년 때, 그는 대학에 진학하기 어려운 가정 형편을 생각해 차라리 일찌감치 광주로 나가 돈을 벌자고 결심했다. 친구 두 명에게 “함께 무전여행을 하자”고 꼬드겨 길을 나서기로 했다. 부모님과 선생님 앞으로 편지를 남기고 어머니가 훗날 아들이 장가갈 때 양복을 해 입히려 모아둔 쌀 한 가마니도 등에 지고 나왔다. 그 쌀을 면사무소에서 팔아 여비를 마련했다. 희망에 들뜬 세 명의 까까머리 중학생은 버스 정류장에 섰다. 그때 백양사행이라고 쓴 버스가 오는 게 아닌가. 무작정 탔다. 절 구경 한 번 하고 광주로 나설 심사였다. 그런데 백양사에 들어서는 순간, 그는 기이한 느낌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아주 특별한 인터뷰]6월항쟁기념사업회 상임이사장 지선 스님

“절에 딱 들어서는데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옛날에 이곳에 살았던 것처럼 그렇게 마음이 편안할 수가 없는 거예요. 스님들이 목탁 치고 염불 하는 소리가 좋았어요. 여기서 스님 생활을 하자고 결심했죠. 사무실에 가서 이야기하니까 부모님 허락 받고 왔냐고 해요. 그래서 아니라고 하니까 그럼 곤란하다는 거예요. 한참 그러고 서 있는데 한 스님이 오시더니, 지금 수학여행철이라 손도 모자란데 일단 받아주자고 하시더라고요. 당시만 해도 중·고등학생들 수학여행은 다 절로 왔거든요. 그런데 친구 한 명이 절에 온 첫날밤 집에 가고 싶다고 울기에 차비를 줘서 보냈어요. 남은 두 사람은 수학여행 온 수백 명 학생에게 방 다 내주고 밥 지어주고 돌아갈 때 도시락까지 싸주는 일을 했지요. 헌데 그 친구도 몇 달 후 집에 돌아간 탓에 결국 나만 절에 남았어요. 몸은 힘든데, 이상하게 절을 떠나기 싫더라고요. 아마도 전생에 중이었나 봐요.”

훗날 집안 어른들은 그의 3~5대조 할아버지의 묘가 한자로 중 승(僧), 통달할 달(達)자를 쓰는 전남 무안의 승달산에 모셔져 있으니 그가 승려가 된 것이 그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해석했다.

백양사에 들어온 지 1년이 지나 은사인 석산 스님에게서 사미계를 받은 그는 ‘지선’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그 길로 부모님을 찾아갔다. 몰려든 동네 사람들은 “욕보가 스님이 돼 왔네” 하며 신기해했다고 한다. 그러나 평소 말수가 없는 아버지는 담배만 뻑뻑 펴대고, 어머니는 눈물을 흘렸다.

지선 스님은 스물한 살에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백양사로 수련회를 온 대학생들이 법문을 듣고 나서 질문을 하는데 칸트가 어쩌고 하면서 모르는 말을 하는 거예요. 법문만 알아서는 안 되겠구나 싶더라고요. 뒤늦게 고등학교에 갔고 대학에도 진학했지요.”

1967년 경기대 국문학과에 들어간 그는 이듬해 군대에 갔다. 하지만 1년여 만에 위천공으로 수술을 받고 의병제대해야 했다. 특수훈련을 받던 중 조교가 배를 밟았는데 위장이 파열된 것이다. 그 후유증으로 1999년 위암수술을 받기도 했다. 제대 후 지선 스님은 1970년 석산 스님의 권유로 서옹 스님 밑으로 갔다. 대학은 1968년 복학한 후 얼마 안 돼 그만뒀다.

그가 민주화운동에 뛰어든 것은 1981년이다. 그 전해인 1980년 5·18 광주항쟁과 같은 해 발생한 10·27 법란이 그를 민주화운동으로 이끈 계기가 됐다. 10·27 법란은 1980년 10월 27일 새벽 4시에 전두환 쿠데타 군부가 전국 사찰에 계엄군을 투입해 스님과 재가신도들을 강제로 연행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군부는 불순분자와 유랑잡승, 군 기피자를 색출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진짜 이유는 5·18 광주항쟁과 관련한 국민의 따가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함이었다. 당시 계엄군에 끌려간 스님 중 상당수는 무차별 폭력과 고문을 받았고 죽임을 당한 이도 있었다.

“제주도 관음사에서 주지를 하고 있을 때였어요. 당시 난 일주일에 한 번씩은 광주에 오갔지요. 그런데 5월 18일을 전후해 광주 지역으로 전화 연락이 전혀 안 되는 거예요. 나중에 인편을 통해 들으니까 광주가 암흑 세상이 됐다고 해요. 그로부터 얼마 후 광주 무등산 밑 문빈정사에서 정진하시던 은사 스님(석산 스님)이 병환이 생겨 위문차 며칠간 그곳에 머물렀어요. 그런데 산에서 내려오는 광주 시민들이 절 문을 발로 차고, 침을 뱉고 심지어 절 문 앞에 소변까지 보면서 욕을 해대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는 얘기가 ‘어용불교냐. 스님들이 전두환 잘되라고 조찬기도회나 해주면 쓰겠냐’는 거예요. 저는 나가서 ‘그게 아니다. 일부 스님이 그러는 것이다’라고 해명했죠. 그렇게 불교계의 입장을 대변하는 일이 반복되고, 감옥에 갇힌 신도들의 자녀 면회를 쫓아다니고, 10·27 법란까지 경험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민주화운동에 나서게 된 것이지요.”

지선 스님은 1985년 광주 무등민족문화회 의장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재야활동을 시작했다. 같은 해 민중불교운동연합 지도위원, 이듬해인 1986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부위장 등을 거쳐 1987년에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로 활약했다.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는 전국 900여 개 단체가 참여, 공동대표만 60여 명이었기 때문에 다시 상임대표 10명을 뽑았다. 지선 스님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이 단체는 1987년 6월 10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 지명에 대한 무효 선언을 성공회 성당 꼭대기에서 낭독함으로써 6·10 민주항쟁을 촉발했다. 당시 성명서를 낭독한 사람이 바로 지선 스님이었다. 당일 체포돼 그가 끌려간 곳은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이었다.

오랜만에 달마를 그리기 위해 붓을 든 지선 스님. 지선 스님이 그린 달마는 힘차다.

오랜만에 달마를 그리기 위해 붓을 든 지선 스님. 지선 스님이 그린 달마는 힘차다.

“가린 눈을 푸니 벽면은 온통 빨간색이고 바닥은 노란색인 방이었어요. 한쪽 구석엔 물을 넘실거리게 담아놓은 큰 욕조가 있었고요. ‘아, 박종철이 여기서 물고문을 당해 죽었구나’ 싶더라고요. 머리카락도 없는데 머리가 쭈뼛 섰어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엄습했죠. 몇날 며칠을 잠을 재우지 않고 계속 그 안에서 빙빙 돌며 걷게 하더라고요. 시간이 흐를수록 정신이 없어지면서 귀가 먹먹해지고 눈도 흐릿해졌어요. 그때 깨달았어요. 신도들에게 삶과 죽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고 떠들었는데 그게 순 사기였다는 것을. 부끄러웠죠. 내가 불교계를 대신해서 죽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그 순간,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어요. 바닥에 앉아 2시간 정도 참선을 하는데 덩치가 산만한 놈이 들어왔어요. 밤새도록 무자비하게 발로 짓밟고 인격적으로 모욕을 주더군요.”

그해 6월 29일 마침내 노태우 대통령 후보가 대통령 직선제로 헌법을 고치겠다며 6·29 선언을 하면서 지선 스님은 석방됐다. 스님은 “전날 나 홀로 산을 넘어 아무도 가지 않은 하얀 길을 걷는 꿈을 꾸어, 그게 저승 가는 꿈인 줄 알았더니 사는 꿈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1987년 말 YS와 DJ의 후보 단일화 실패는 군사정권이 연장되는 결과를 낳았다. 지선 스님은 “양 김의 분열은 재야의 책임이 크다”고 말했다. 재야인사들이 김대중파, 김영삼파로 분열돼 양 김의 분열을 부추겼다는 것이다.

이후 지선 스님은 민주화운동의 현장마다 모습을 드러냈다. 1989년에는 고 이철규 열사 고문살인진상규명 범국민회의 상임공동의장을 맡으면서 이철규 열사 의문사 진상 교명 건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생명의 위협까지 감수하며 투신한 민주화운동이었지만, 불교계 내부에서조차 지선 스님을 오해하는 시선이 있었던 것도 사실. 심지어 TV에 출연한 스님으로부터 ‘사자신중충(獅子身中蟲: 사자의 몸에 기생하면서 그 살을 뜯어먹는 벌레라는 뜻으로, 불교 교단에 있으면서 불법을 해치는 악한 비구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불교 용어)’이라는 폭언까지 들었다. 지선 스님은 “불교계 스님들이 나를 가리키며 불교계 빨갱이라고 할 때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지선 스님이 백양사에 칩거하며 정진하는 화두는 ‘이 뭣고’라고 한다. ‘이 뭣고’는 백양사 사천왕문 앞에 있는 만암 대종사의 기념비에 적힌 글귀로,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에 나의 참 모습은 무엇인가를 늘 의심하며 진리를 구하라고 던진 화두다.

하안거(夏安居: 승려가 여름 장마철 90일 동안 밖에 나가지 않고 한곳에 모여 수행함)에 들어간 지선 스님은 매일 새벽 2시에 일어나 요가를 한 뒤 3시부터 새벽 예불을 모시고 참선을 시작한다. 하루 네 차례 총 10시간을 정진한다고 한다.

지선 스님께 중생에 해주고 싶은 말씀을 청했다. 스님은 1950년대 함석헌 선생이 ‘생각하는 국민이어야 산다’고 한 유명한 말로 당신의 뜻을 대신했다.

“국민들도 정신을 차려야 해요. 국민도 때로는 어리석은 군중일 수 있어요. 이번 쇠고기 파동은 투표를 등한시해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킨 국민이 만든 인과응보예요. 또 아무리 경제성장이 된다고 해도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이 없으면 나라가 발전할 수 없어요. 이번 일을 계기로 국민들도 많이 깨달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촛불은 10대 아이들의 순수한 열정서 비롯”

민주화운동 전면에 나선 이유는 무엇입니까.
“지금 10대 아이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자는 순수한 생각으로 촛불을 들고 나선 거예요. 나도 마찬가지였어요. 백주에 군부독재정권이 사람들을 고문하고 죽이고 하니까 이제 그만하고 물러가라는 마음에서 시작한 거예요. 나 역시 생명 중시 차원에서 나선 것이고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도부까지 한 거예요.”

이번 촛불시위는 비폭력 시위를 표방합니다. 6·10 민주항쟁 때 지도부 내부에서는 폭력시위를 주장하는 측과 비폭력 시위를 주장하는 측의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요.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 서울시청 앞에 100만 군중이 모였다고 해요. 그때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의 일부는 이렇게 많은 군중이 모였으니 그대로 청와대로 밀고 가, 전두환 군부독재를 엎자고 했어요. 또 다른 측에서는 장례식이니까 거룩하고 장엄하게 치르자고 반대했어요. 그렇게 옥신각신하며 갈등이 심했지요. 결국 청와대로 밀고가자고 주장한 사람들이 양보해서 장례만 치렀어요. 하지만 그때 청와대로 가자고 한 사람들도 무장투쟁을 하자고 한 것은 아니에요.”

이 대통령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안이 있습니까.
“그게 답답한 일이에요. 그래도 이명박 대통령은 준비가 안 된 사람이니 차선이라도 뽑아야지요. 김대중씨도 입만 열면 준비된 대통령이라고 말했지만 해놓은 게 아무것도 없었잖아요. 그 사람이 잘했으면 이렇게까지 안됐을 거예요. 김대중씨는 과거에 자기가 대통령이 되면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민주주의가 들꽃처럼 만발한다고 말했어요. 그러나 실제 정권을 잡은 후에는 국가보안법 철폐, 노동악법 철폐 등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몇 가지 일 중 어떤 것도 성과를 내지 못했어요. 6·15 남북공동성명이요? 햇볕정책이요? 잘했지요. 하지만 그것은 김대중씨가 아니더라도 민선정부가 들어서면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어요. 또 김대중씨 혼자 한 일이 아니고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과 함께 일군 성과지요. 그러니 노벨평화상도 두 사람이 공동으로 받았어야 했어요.”

지난 대선 때 이해찬씨에 이어 정동영씨를 지지하셨습니다.
“이해찬씨나 정동영씨나 내 이름을 가져다 써먹은 것이지, 내가 그 사람들을 위해 발 벗고 나선 게 아니에요. 경선 때 먼저 이해찬씨가 나를 고문으로 앉혔고, 경선 후에는 정동영씨가 나를 고문으로 앉힌 거예요. 두 사람이 나쁜 사람도 아니고, 특히 이해찬씨는 민통련 시절부터 절친했던 동지인데 어떻게 부탁을 거절하겠어요. 정동영씨의 경우는 내가 미국에 포교 활동하러 간 사이 내가 고문이 됐다고 신문에 낸 후, 전화로 후결제를 받았어요. 그래서 알아서 하라고 했지요.”

세속생활의 유혹을 느끼신 적은 없으셨습니까.
“왜 없었겠어요? 20대 젊은 시절에 그로 인한 번뇌가 치열했지요. 속세에 나가 살다 다시 들어올까 하는 생각도 많았고 승려가 된 것을 후회한 적도 있어요. 하지만 워낙 바쁘게 살다 보니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더라고요. 20대 중반부터 전남 영광 불갑사 주지를 하면서 고아들을 데려다 가르쳤고, 이후에는 재야활동하면서 한눈팔 여유가 없었지요.”

‘기(氣)’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고 ‘달마’ 그림을 그려 판매하는 동명이인(同名異人) 스님이 계십니다. 그로 인한 웃지 못할 일이 있을 것 같은데요.
“내게 찾아와 달마 그림을 사고 싶은데 얼마냐고 묻는 사람이 꽤 있었어요. 그 분이 조선일보에 광고를 하면서 그게 저인 줄 알고 문의가 많았거든요. 그래서 난 그 사람이 아니다. 그 분은 경상도에 계시는 분이고 나는 전남 백양사에 있다고 했지요. 그분에게 사람들이 자꾸 오해하니 이름을 한자로 써달라고 부탁한 일도 있어요.”

스님께서도 달마 그리기가 취미라고 들었습니다.
“요즘엔 좀처럼 안 그리지만 전에는 취미 삼아 그리곤 했지요.”

●약력

1946 전남 장성 출생.

1961 장성 백양사 득도

1976. 1~ 대한불교조계종 종정 사서실 실장

1976. 1~1980 대한불교조계종 중앙 종회의원

1976. 10~1980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 본사 관음사 주지

1986. 5~1989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부의장

1986. 6~ 불교정토구현 전국승가회 창립 및 지도위원

1987. 5~1989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

1990~1992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제2기 공동의장

1990. 6~ 불교정토구현 전국승가회 의장

1990. 10~ 광주5·18민중항쟁기념사업회 부의장

1993. 7~2000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종교인협의회
공동의장

1994. 4~ 불교조계종개혁회의 개혁위원 및 개혁위원회
상임부의장

1994. 10~ 대한불교조계종 백양사 주지

199. 2~ (현)실천불교전국승가회 상임고문

2007~ (현)6·10민주항쟁기념사업회 상임이사장.

2008. 4~ (현)5·18민중항쟁 28주년 행사위원장


<글·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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