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낯설지만 묘하게 낯익은 호퍼의 그림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b>빈방의 빛</b> 마크 스트랜드·박상미 옮김·한길아트·2008

빈방의 빛 마크 스트랜드·박상미 옮김·한길아트·2008

에드워드 호퍼의 화집을 하나 구하고 싶었다. 마침 ‘빈방의 빛’이 나왔기에 반가운 마음으로 구입했다. 이 책은 호퍼의 그림이 있긴 하지만 화집은 아니다. 마크 스트랜드라는 시인이 호퍼의 그림에 붙인 짧은 비평을 모은 책이다.

호퍼의 그림은 명철하다. 사물들은 분명한 외관을 드러내고 모호한 구석이라고는 어디에도 없다. 호퍼의 그림에서 풍부한 서사성을 지우고 그 위에 오연하게 제 존재를 드러내는 빛과 고요는 얀 베르메르를, 그 명철함이 암시하는 피로, 감정의 메마름, 희망 없음은 빔 벤더스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호퍼의 그 견고한 명철함을 의심해야 한다.

스트랜드는 이렇게 쓴다. “우리는 그의 그림을 볼 때 그림이 드러내는 연속성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호퍼의 그림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삶의 사건으로 채워질 장소로서의 빈 공간이 아니다. 즉 실제의 삶을 그린 것이 아닌, 삶의 전과 후의 시간을 그린 빈 공간이다. 그 위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그 어두움은 그림을 보며 생각해낸 이야기들이 지나치게 감상적이거나 요점을 벗어나 있다고 말해준다.”

‘이른 일요일 아침’(1930)은 호퍼의 개성, 호퍼의 정서적 질감이 잘 드러나는 그림이다. 화면의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 채운 이층 건물. 건물은 붉은색을 머금은 어두운 고동색이다. 건물은 아름답지 않다. 오히려 무겁고 칙칙하다.

아래층 상점들의 문은 닫혀 있고, 윗층 창문들은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 위로 엷은 푸른색을 띤 하늘이 어떤 기미도 없이 떠 있다. 사람은 없고 길 위에 인공구조물들의 검은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평면성과 정면성이 두드러지는 이 그림에서 어떤 암시나 은유를 찾기는 어렵다. 호퍼는 그저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물을 하나 그려놓았을 뿐이다. 나는 이 그림을 한참 들여다본다.

아, 오래전에 지나간 사건은 그림 저 밑에 숨어 있고, 어딘가에 억제된 메마른 슬픔이 희미하게 비친다. 외부를 지배하는 것은 단호하고 무뚝뚝한 직선, 공간의 기하학적인 분할, 빛과 그림자, 그리고 불굴의 고요다. 고요는 평화롭지는 않다. 이 고요는 사건과 사건 사이에 끼어든 기묘한 침묵과 불안을 품은 고요이기 때문이다. 스트랜드는 이렇게 쓴다.

호퍼의 밤을 새는 사람들.

호퍼의 밤을 새는 사람들.

“호퍼의 그림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그림 밖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영역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해를 향해 몸을 기울이고, 길과 철길은 추측만 가능한 소실점으로 이어진다.”

호퍼의 그림에서는 인물들이 드문드문 나온다. 호퍼의 인물들은 살아 숨쉬기보다는 숨쉬는 것을 그치고 사물화된 정물에 가깝다.

그들 주변은 정적(靜寂)과 부동(不動)의 기운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집을 나와 떠도는 자의 애수를 상습화한다. 그들은 잠시 머물거나(극장·휴게실·간이식당·자동판매식 식당), 경유하고(주유소·상점·공항·역과 대합실), 임시 거주지에서 하룻밤이나 며칠 밤을 보낸다(모텔·호텔방). 그들은 오래된 풍속과 관습, 당면 문제, 혈연의 구속에서 자유롭지만 어딘가 모르게 그 자유는 무중력한 상태와 같다.

그들은 그 자유 속에서 오히려 피로, 감정의 메마름, 침울함에 깊이 가라앉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호퍼의 그림에서 여행자의 시선은 두드러진다. 호퍼의 인물들은 저를 둘러싼 문명적인 요소, 도시 건물이 드러내는 불가사의한 낯설음에 대해 아무런 감정의 동요를 드러내지 않는다. 마치 삶이 곧 여행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오히려 안심할 수 없는 것은 ‘오전 7시’(1948)나 ‘주유소’(1940)에서 단정하고 질서 있는 건물의 옆이나 배후에 나오는 어두운 숲이다. 조용한 숲, 어둠을 품은 숲은 잘 알 수 없고 불확실하고 위험한 그 무엇을 암시한다. 호퍼의 인물들이 침울한 순간에조차 정서적 안정감을 보일 때는 호텔이나 모텔의 방에 머물 때다(‘호텔방’, 1931). 방은 도시인에게 “욕망의 침울한 안식처”다. 호퍼의 인물들은 어쩔 수 없이 도시에서 나고 도시를 떠돌다 죽는 사람들인 까닭이다.

‘철학으로의 소풍’(1959)에서 창은 열려 있고, 한 방에 남자와 여자가 있다. 등을 보이고 누운 여자는 벌거벗은 엉덩이를 그대로 드러낸 채 간이침대 위에서 잠들어 있다. 누운 여자를 등지고 아무 장식이 없는 침대에 걸터앉은 남자가 있고, 그 옆에는 한 권의 책이 펼쳐져 있다. 남자는 벌어진 무릎 안쪽으로 두 팔을 떨어뜨린 채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하다. 구두를 신은 남자의 발밑에는 빛이 직사각형으로 제자리를 만들고 있다. 두 사람은 방금 섹스를 나눈 것처럼 보인다. 발밑에 무심히 떨어져 빛나는 양지는 남자의 메마르고 근심이 서린 표정과 대조를 이룬다. 그림에는 어떤 추상적인 요소가 없다. 그럼에도 이 그림은 알 수 없는 추상과 관념으로 가득 차 있다. 호퍼의 증언에 따르면 펼쳐진 책은 플라톤이라고 한다. 왜 플라톤일까? 왜 남자의 표정은 밝지 않고 어두울까? 이 그림에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이야기는 그림 바깥에 있다. 그림은 침상에 수평으로 누운 여자와 그 여자와 수직으로 가로지른 형태로 앉은 남자만 보여준다. 이 말없는 드라마에 중요한 배역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은 빛과 그림자다.

에드워드 호퍼의 공안(公案)은 고립과 외로움이다. 그들은 어딘가에서 떠나왔고, 다시 어딘가로 떠날 사람들로 보인다. 그들 주변에 떨어지는 빛은 아주 견고하게 사물화되어 있다.

‘좌석차’에 나오는 중앙에 배치된, 일렬로 된 창문을 통해 들어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노란빛의 토막들을 보라. 마치 그 빛은 행복의 기억을 저 멀리 두고 떠나온 자의 쓸쓸함을 기념하는 듯 보인다.

호퍼가 언제나 공들여 묘사하는 것은 빛이다. 빛에 대한 호퍼의 집착은 쉽게 드러난다. 빛은 빛으로써 환하게 제 존재를 드러낼 뿐 아니라 빛 속에 드러나는 육체의 삶에 대한 은유로 빛난다. 빛은 저를 드러내면서 빛 저 너머에 뭔가 숨어 있다고 가리킨다. 빛은 삶에 대한 명철한 해석과 함께 불가피하게 그것이 저 표면 아래로 숨긴 그 무엇이 있음을 암시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숨겨진 것의 존재감, 확실히 있긴 하지만 드러나지 않는 것의 존재감”이다. 호퍼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을 묘사할 때조차 그것이 많은 사건과 이야기를 품고 있는 듯한 것은 그 때문이다.

‘바다 옆의 방’(1951)에서 화면은 여러 개로 조각나 있다. 왼쪽에 열린 문의 프레임 안쪽을 채운 것은 하늘과 바다다. 하늘과 바다는 프레임 안의 좁은 공간을 둘로 분할하는데, 하늘은 옅은 파란색이고 바다는 짙은 푸른색이다. 하늘과 바다는 견고한 문의 프레임 안에 갇혀 있다. 오른쪽은 가구가 있는 내실의 일부가 드러나는데, 소파와 옷장이 있고, 벽에는 액자가 하나 걸려 있다.

그 사이에 문의 프레임 안쪽으로 넓은 빈 벽이 이어지지고, 화면의 중앙을 거의 차지한다. 열린 문을 통해서 쏟아져 들어온 햇빛으로 물들어 있다. 밖에서 쏟아져 들어온 빛으로 공간을 기하학적으로 분할하며 극단적으로 환하게 도드라진 벽과 바닥의 일부는 마음의 어두운 부분에 대한 보상인 듯 느껴진다. 이 공간 안에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실내는 빛과 엷은 그늘, 그리고 가구로만 채워져 있다. 그 실내 바로 바깥에 비현실적으로 떠 있는 하늘과 바다… 현실 속에 이런 공간이 실재할까? 아마 없을 것이다.

호퍼는 내가 좋아하는 화가다. 북미에 추상표현주의가 타오를 때 홀로 도시 공간들을 차갑게 그린 구상화가다. 호퍼가 즐겨 그리는 공간은 간이식당, 상점 입구, 빈 계단, 주유소, 정류장, 모텔, 극장, 휴게실, 도시의 방들… 이다. 호퍼가 그리는 이 외부들은 우리 내면의 어떤 부분과 상호 조응한다.

그래서인가. 호퍼의 그림은 분명 낯선데 한참 들여다보면 묘하게 낯익은 구석이 있다. 세계의 무뚝뚝함과 암울함에 맞서는 연약한 내면. 은닉된 슬픔과 상처, 부재가 만든 공허와 덧없음으로 덧칠된 내면. 이 내면은 너무 연약해서 피난처가 되지 못하지만 어쩌겠는가. 호퍼의 그림은 우리에게 속삭인다, 세상이 두렵거나 환멸스러울 때 숨고 웅크릴 수밖에 없는 오직 하나는 이 내면뿐이라고.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독서일기바로가기

주간경향 댓글 정책에 따라
이 기사에서는 댓글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