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학계 거목 최장집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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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좌라니요? 저는 온건한 진보입니다”

[아주 특별한 인터뷰]진보학계 거목  최장집  교수

최장집(65) 고려대 교수는 진보학계의 거목이다. 정치학자인 그는 그동안 수많은 논문과 저서, 기고를 통해 한국이 처한 정치 현실과 노동 현안에 대해 날카로운 분석과 함께 매서운 회초리를 들이댔다. 그의 날선 목소리는 보수와 진보를 구분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양한 매체를 통해 사상과 철학은 잘 드러나지만 그의 개인사는 거의 알려진 게 없다. 기질적으로 언론 인터뷰나 TV 출연을 싫어하는 데다가 그 자신이 개인사를 공개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1998년 월간조선이 ‘친북좌파’로 몰아 고초를 겪기도 한 최장집 교수. 오늘날 그를 있게 한 토대는 무엇이었을까. 뉴스메이커 창간 16주년을 기념해 마련한 최 교수 인터뷰는 이런 작은 궁금증에서 출발했다.

5월 27일.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학교의 교정은 초여름의 기운이 완연하다. 따사로운 햇볕은 드넓은 캠퍼스를 고루 비추고,오가는 학생들의 표정엔 젊음의 활력이 물씬 풍긴다. 초록색 잔디에 누워 나뭇가지에 매달린 잎사귀 사이로 먼 하늘을 바라보면 지상낙원이 따로 없을 성싶다.

최장집 교수의 방은 정경대 건물 3층에 있다. 사진으로만 보면 키가 클 것 같지만 최 교수는 163㎝의 단신이다. 1980년대에 최 교수를 만난 제자들 중에는 최 교수가 의자 밑에 쌓아놓은 블록에 두 발을 얹어놓은 채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던 모습을 기억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책상의 높이가 그의 앉은 키와 맞지 않은 불편을 덜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검은 머리칼이 약간 섞인 은발, 두껍고 짙은 검은 눈썹, 큰 귀, 반듯한 콧날을 가진 최 교수는 의외로 잘 웃고 친절하기까지 한 초로의 신사다. 의외라는 표현은, 그의 정치적 성향에 대한 사회적 규정이나 항상 냉철함을 잃지 않는 그의 글을 통해 각인된 이미지 탓이다. 그는 말을 재미있게 하는 편은 아니지만, 기자가 몇 마디를 던지면 의중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야기를 술술 풀어냈다. 그는 ‘말하자면’ 이라는 부사를 자주 사용하는 습관이 있는 듯했다.

흥미로운 점은 주류 언론들이 그를 진보 지식인의 대명사로 부르는 것에 대해 정작 최 교수 자신은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실제로 내가 진보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이상은 이데올로기적으로 만들어진 나일 뿐이기 때문에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진보와 보수 또는 좌파와 우파는 굉장히 이데올로기적으로 호명됩니다. 이데올로기 갈등과 전쟁, 분단을 겪은 역사적 경험이 있기 때문이에요. 사실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라는 용어는 복잡하고 섬세한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식화된 이데올로기 틀로 이를 구분할 경우엔 그것이 지나치게 단순화하거나 도식화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전 그게 싫어요. 우리 현실에서 진보나 좌파는 묘한 뉘앙스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저를 가리켜 진보파의 대표라고 호명하는 건 부담스럽습니다.”

[아주 특별한 인터뷰]진보학계 거목  최장집  교수

실제 최 교수는 언론의 이데올로기적 단순 구분에 누구보다 피해를 본 인물이다. 최 교수가 김대중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하던 1998년, ‘월간조선’이 최 교수의 논문 ‘한국민주주의의 조건과 전망’에 실린 일부 문구를 인용해 그를 ‘친북적 전쟁관을 갖고 있다’며 공격한 것이다. ‘월간조선’은 그해 11월 ‘6·25는 김일성의 역사적 결단, 최장집 교수의 충격적 6·25 전쟁관’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으며 최 교수의 논문 중 “전쟁 초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인민군에 가담하거나 북한군의 남진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것도 사실이다”라는 부분을 인용했다. 하지만 조선일보에도 실린 이 기사는 원문의 전후맥락을 생략한 채 일부 부분만 발췌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이후 안티조선운동을 촉발했지만 이 기사로 인해 최 교수는 1년 만에 현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해당 사건은 이데올로기적 갈등을 겪은 한국의 역사적 특수조건이 만들어낸 산물입니다. 종래 냉전 반공주의적인 좁은 틀로 역사를 보는 게 정형화해 있다 보니, 분단의 원인과 분단, 그리고 전쟁의 과정을 학문적으로 연구해 발표한 논문이 정치적으로 문제가 된 것이지요. 저는 그 사건을 경험하면서 두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하나는 작금의 분단 상황에서는 객관적으로 현대사를 규명하기에는 학문적 제약이 많다는 것이고요. 또 하나는 분단과 전쟁을 경험한 지 반세기가 넘었는데도 여전히 우리 사회는 현대사를 자유롭게 연구하고 객관화할 수 있을 만큼 지적 풍토가 성숙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굳이 자신을 분류하자면 ‘극좌’ 또는 ‘급진 좌파’가 아닌 ‘온건한 진보’라고 설명했다.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범위에서 진보를 이야기하고 개혁을 주장하기 때문이란다. 그는 “한국의 이념적 지형이 그동안 극우에 치우쳐 있었던 탓에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온건한 진보나 자유주의 좌파 또는 중도좌파 정도의 사람들을 한국에서는 극좌로 분류해온 것”이라고 해석했다.

사실 출신 성분만 보면, 그는 결코 친북좌파가 될 수 없는 사람이다. 공산주의자들이 타도를 부르짖는 지주 집안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는 1943년 5월 강원도에서도 첫손에 꼽히는 강릉 대지주 집안의 장손이자 독자(獨子)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초기 500여 평(1650㎡)의 너른 대지 위에 지은 가옥은 전통적인 한옥과 현대적인 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형태로 영동지방에서 가장 큰 가옥의 하나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농사와 원양어업으로 큰돈을 벌었고 그의 아버지는 서울 경복고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유학, 릿쿄대(立敎大)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는데, 영화감독이 꿈이었다고 한다. 경남 밀양 출신인 어머니 집안도 부유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최 교수의 외조부는 양조장과 운송업으로 갑부가 된 신흥 상업 부르주아지였다. 고등학교가 드물던 시절 최 교수의 어머니는 동래일신여고(현 동래여고)와 중앙보육전문학교(현 중앙대 전신)를 졸업했다. 최 교수는 한국의 전통적인 지주 집안과 신흥 상업 부르주아지의 피를 나눠 받은 한국 사회의 최상류층 자제였던 것이다.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순) 5살 때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 어머니의 부산 동래일신여고 출신의 친구들과 그 자제, 그리고 선생님들. 최 교수(앞줄 맨 오른쪽)의 왼쪽 편으로 작곡가 고 금수현 선생(현재 경기필하모닉 지휘자 금난새씨 아버지) 부부와 최 교수의 어머니가 보이고, 어머니 친구의 자제인 정준성씨가 있다. 또 뒷줄 두 번째와 세번째는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대모로 불렸던 김한림 선생과 서양사학자 고 김성근씨다. 1980년대 말 강릉집에서 고려대 교수들과. 앞줄 맨오른쪽이 최장집 교수이고, 최 교수의 옆에 김우창 교수 부부와 김용옥 교수, 한양대 독문과 반성완 교수가 보인다.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순) 5살 때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 어머니의 부산 동래일신여고 출신의 친구들과 그 자제, 그리고 선생님들. 최 교수(앞줄 맨 오른쪽)의 왼쪽 편으로 작곡가 고 금수현 선생(현재 경기필하모닉 지휘자 금난새씨 아버지) 부부와 최 교수의 어머니가 보이고, 어머니 친구의 자제인 정준성씨가 있다. 또 뒷줄 두 번째와 세번째는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대모로 불렸던 김한림 선생과 서양사학자 고 김성근씨다. 1980년대 말 강릉집에서 고려대 교수들과. 앞줄 맨오른쪽이 최장집 교수이고, 최 교수의 옆에 김우창 교수 부부와 김용옥 교수, 한양대 독문과 반성완 교수가 보인다.

그는 성장 과정에서 누구보다 어머니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가 돌이 될 무렵 아버지가 복막염으로 급작스럽게 타계하면서 홀로 된 어머니 손에 컸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지주 집안의 생활방식을 싫어하셨어요. 밤새도록 놀음하고 해가 중천에 뜬 후에야 일어나면서 하인이나 소작인들을 위압적으로 부리는 게으름뱅이라고 여기셨거든요. 그 때문에 삼촌들과 갈등이 많았지요. 어머니는 부지런한 분이셨습니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저 역시 일하지 않는 게으른 사람을 싫어합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비판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한 것도 결정적으로 그 같은 어머니의 가치관과 행동규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정치의식이 높았던 어머니는 미 군정과 좌우 이데올로기 투쟁 등 해방 후 한국 사회에서 발생한 많은 일을 아직 초등학생밖에 안 된 어린 아들에게 자주 들려주었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워주기라도 하듯, 어머니는 아들이 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독려했다. 그래도 아버지의 부재는 소년의 가슴을 허전하고 서글프게 했다. 천재 소리를 듣던 그는 문학서적을 읽고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이따금씩 찾아오는 서러움을 다독였다.

실제로 최 교수는 지금도 매우 예민하고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다. 클래식 음악과 오페라에 관한한 전문가 뺨칠 정도로 조예가 깊고, 영화와 드라마도 좋아한다. 프로축구와 프로농구 마니아이기도 하다(영화는 정의감이 불타올라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악당을 물리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액션물을 좋아하는데, 특히 경찰 영화를 선호한다고 한다. 또 요즘 빼놓지 않고 챙겨 보는 드라마는 MBC 주말드라마 ‘천하일색 박정금’으로 극중 주인공인 배종옥의 열성 팬이라고).

“저 자신도 예술적 감수성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제 성장환경과 결부돼 있다고 봅니다. 슬픔이라든가 인간의 예민한 감성이 어려서부터 발달한 것 같거든요. 아버지가 영화감독을 하려고 생각했다지만 제가 아버지의 예술적 감성을 물려받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버지의 얼굴은 기억할 수 없으니까요.”

중학교 졸업 후 소년은 서울 경동고등학교로 유학을 갔다. 서울에는 어머니의 동창이 많이 살고 있었다. 윤보선 전 대통령 부인인 공덕귀 여사, 1950년대 민주당 대표였던 박순천 여사,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대모로 불렸던 김한림 여사, 작곡가 금수현 선생의 부인인 전혜금 여사 등이 모두 동래여고 출신이고, 어머니의 선배이자 친구들이다. 소년은 또래의 아들을 둔 어머니의 친구 집에 기거하며 학교에 다녔다. 그 집은 1960년 4·19혁명 때 데모에 참가한 고등학생들의 아지트였다.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던 최 교수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어머니나 어머니 친구분들은 모두 의식이 깨어 있던 분들이셨습니다. 4·19 때 우리는 고등학생 신분으로 각 고등학교의 학생회장과 네트워크를 만들어 데모를 했지요. 아들들이 광화문에서 데모를 하면 그 어머니들도 그 부근 어딘가에서 데모대를 성원하셨습니다.”

4·19혁명은 최장집 교수로 하여금 민족의식과 정치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한 직접적 계기가 됐다. 애초 물리학을 꿈꿔 이과를 지망할 생각이었지만 정치외교학으로 진로를 바꾸면서 문과를 선택한 것이나, 민족주의 정신이 강한 고려대에 입학한 것도 그 연장선상에서였다.

1961년 대학생이 된 최 교수는 운동권 동아리에 들어갔고 1964년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정에 반대해 학생들이 들고 일어난 6·3운동을 조직했다. 그는 학생운동의 이론가로 활동했다. 최 교수와 마찬가지로 고려대 61학번인 이명박 대통령도 당시 상과대(현 경영대) 학생회장의 신분으로 6·3운동에 가담했다.

“당시 학생운동은 두 축이 있었습니다. 한 축은 운동을 기획하고 조직하고 이론을 만들고 여러 형태의 팸플릿과 선언문을 쓰는 그룹이고, 또 다른 축은 각 단과대 학생회장으로 구성된 공식적인 학생조직이었지요. 전 전자였고, 이 대통령은 후자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개인적 친분이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당시 고려대 운동권의 중심은 정경대와 법대였고, 그 외곽에 상과대와 농과대가 있어서 그리 자주 만나지 못했거든요. 전 나름대로 핵심 그룹과 많이 움직였고, 다른 대학의 운동권 인사들과 교류가 잦았습니다. 김정남씨, 이부영씨, 현승일씨, 김학준 동아일보 회장 등이 저와 함께 뛴 타 대학 동기들입니다.”

고려대에서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은 최 교수는 1969년 졸업 후 ‘세대(世代)’라는 이름의 시사월간잡지사 기자로 취직했다. 이광훈 전 경향신문 논설위원이 창간한 이 잡지사에는 당시 이중한(전 서울신문주필)·권영빈(전 중앙일보 사장)·김종심(전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위원장)씨와 시인 최하림씨 등이 기자로 일했다. 최 교수는 “이곳에 1년 정도 다녔는데 원고를 받으러 다니고 번역도 하면서 아주 재미있게 보냈다”고 회고했다.

잡지사를 그만둔 후 최 교수는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에서 조교로 일하면서 미국 유학을 준비했다. 하지만 신원조회에서 대학시절 데모 경력이 문제가 돼 출국이 불가능했다. 그는 이후 대통령비서실 공보비서실 행정관으로 특채됐다. 1971년의 일이다. 박정희 정권에 반기를 들고 데모를 주동했고 그 때문에 유학길까지 막힌 그가 청와대에 입성한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세아문제연구소에서 조교로 있으면서 민주공화당 실력자였고 칠레 대사를 역임한 윤주영씨의 일을 도와준 일이 있습니다. 그분이 귀국 후 라틴아메리카와 관련한 책을 저술하는 것을 대필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얼마 후 윤주영씨가 청와대 대변인으로 들어가면서 제가 따라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저는 당시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상황이었는데 잡지사도 그만두고 유학 계획까지 좌절된 터라 당장 먹고사는 문제가 걸려 있었습니다. 솔직히 꺼리는 부분이 없지 않았습니다만 경제적인 문제 해결과 신분을 정상화해야 할 필요성도 있고 해서, 청와대에 들어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고도 몇 개월 동안 신원조회가 안 됐는데 윤주영씨가 경호실장, 비서실장에게 이야기를 해줘서 겨우 발령을 받을 수 있었지요.”

당시 최 교수의 역할은 외국 신문과 AP, UPI 등 외신을 요약 정리해 상부에 보고하고, 청와대 출입기자들에게 보도자료를 주는 일이었다. 이때 청와대 출입기자 중에는 훗날 민자당 사무총장과 한나라당 부총재 등을 역임한 고 김윤환(당시 조선일보 정치부장)씨도 있었다.

[아주 특별한 인터뷰]진보학계 거목  최장집  교수

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한 번도 접지 않은 최 교수가 유학길에 오른 것은 1974년, 나이 서른둘의 일이다. 선경그룹이 설립한 한국고등교육재단의 장학금을 받아 미국 시카고대학교대학원에서 유학한 것이다.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두 딸을 한국에 둔 채 홀로 유학길에 오른 그는 미국에 온 지 얼마 안 돼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갈을 받았지만 돌아갈 수 없었다. 그가 돌아간들 어머니는 이미 땅에 묻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머나먼 이국에서 홀로 울었다고 한다. 임종도 지키지 못한 불효자라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던 것이다. 그 슬픔을 딛고 공부에 매달렸다. 뒤에 온 유학생들 사이에서 가장 열심히 공부한 선배로 소문이 났을 정도였다. 실제로 그는 “미국에서 미련 없이 공부했고, 그 시기는 저의 지적 성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회고했다.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83년 귀국해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된 그는 한국산업사회연구회와 한국정치연구회 회장을 잇따라 맡으며 사회·정치적 발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한국산업사회연구회는 김진균(전 서울대 교수)·김금수씨(전 KBS 이사장) 등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생이 주축이 된 학회인데, 최 교수가 ‘한국의 노동운동과 국가’로 박사학위를 받은 인연으로 합류하게 된 것이다. 또 한국정치연구회는 최 교수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한국현대사를 새로운 시각에서 보는 소장학자들의 정치연구모임이다.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직후 그가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이 된 것도 평소 김 전 대통령이 최 교수의 글을 좋아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서구학문을 공부한 그가 한국 현실을 주로 다루는 데 따른 괴리감은 없을까.
“괴리감이 있지요. 하지만 제가 추구하는 것은 한국 현실과 서구 학문을 결합하는 겁니다. 한국은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이어서 세계에서 고립돼 있거든요. 자유주의적 평등사상이나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중심이 되는 철학의 전통이 없고 보편적인 이성으로 문제를 보는 계몽사상의 전통도 없지요. 전 어떻게 하면 이 같은 서구사상을 한국 사회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인지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는 글을 쓸 때 무엇보다 객관성을 중시한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지나치게 급진적이거나 격정적인 글쓰기를 자제한다. 또 1990년대까지만 해도 그는 결론을 쓰기 직전까지 한번에 글을 써내려간 후 소진된 힘을 베토벤이나 브람스의 곡을 들으면서 충전하고, 그런 다음 차분하게 결론을 맺는 글쓰기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평소 제자들에게 “자기 주장이 너무 강한 것은 무지에서 비롯된다”는 말을 자주 들려준다. ‘아집’과 ‘독선’을 경계하라는 가르침이다. 즉 각자가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논의하고 그것이 만들어낸 결과를 존중하는 태도가 민주주의고, 사람이 생각한 것은 이성적으로 논의하는 과정에서 변하거나 발전할 수도 있다는 ‘열린 사고’를 지녀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인 것이다.

지루한 것을 못 견디고 고급호텔에서 폼 잡고 하는 식사를 싫어하는 최 교수는 올 8월 말 정년퇴임한다. 고려대에 부임한 지 올해로 25년. 퇴임 후 그는 어떤 새로운 인생을 계획하고 있을까.

“우선은 내년에 미국의 스탠퍼드대에, 내후년에는 콜롬비아대에서 한 학기씩 한국 정치에 관한 강의를 하게 될 겁니다. 그런 다음 귀국해 민주주의를 위한 연구소를 만들 계획이에요. 제자나 동료들과 그곳에서 공부하고 토의도 하면서 학자로서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할 생각입니다.”

이른 아침 시작한 최장집 교수와 인터뷰는 정오를 훌쩍 넘겨서야 마칠 수 있었다. 그의 삶은 곧 굴곡 많은 한국의 현대사와 맞물려 있고, 그 역사적 격랑에 몸을 실으며 단련되고 세공된 그의 사상은 묵직한 동시에 예리하다. 수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통해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노장 지식인의 고뇌를 조금은 엿볼 수 있었다.

“현정권, 지지기반 취약성 깨달아야”

[아주 특별한 인터뷰]진보학계 거목  최장집  교수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한국 정치는 냉전반공주의의 영향으로 민주주의가 만족스럽게 제도화되지 못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정당은 매우 약하고 국가는 몹시 강하며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지나치게 보수적이지요. 이제는 민주주의 제도를 통해 정당과 시민사회가 강해지는 변화가 필요합니다. 지금의 정당체제는 아주 좁은 보수이념적 틀 속에서 보수 양당체제 형식입니다. 진보정당이 있다고 해도 군소정당에 지나지 않고요. 이런 구조로는 우리 사회의 갈등이나 다양한 이익 또는 요구를 대표할 수 없는 탓에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좋은 정당체제는 어떤 것일까요.
“우리나라 정당체제의 가장 큰 문제는 외국에서는 가장 중요한 정치적 이슈가 되고 있는 노동 문제, 즉 사회·경제 문제가 정당의 이슈가 되지 못하고 다 빠져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면서도 한국 정당은 이데올로기적으로 격렬하기만 하고 민족 문제를 가지고 지나치게 갈등을 겪고 있지요. 저는 사회·경제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정당체제를 구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려면 노동 문제가 정치로 들어와서 정당의 스펙트럼을 넓혀야 합니다. 지금은 우파만 있는데, 좌파도 정당체제 속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사실 이것은 민주화 이후 일어났어야 하는 변화임에도 민주화운동 세력의 잘못으로 해결하지 못한 문제입니다.”

지난 18대 총선에서 손학규 통합민주당 대표, 심상정·노회찬 진보신당 공동대표, 무소속으로 출마한 임종인 전 의원을 지지하셨습니다. 왜 서로 다른 당의 후보들을 지지하신 겁니까.
“전 당이 달라도 야당과 진보정당이 큰 차이가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한나라당에 반대하는 것 외에는 특정 정당에 개입하지 않고, 등거리를 갖는 무당파예요. 지난 총선에서는 당이 아니라 순전히 개인을 보고 지지한 겁니다. 심상정·노회찬 의원은 앞으로 잘 성장해 진보정당을 키워주기 바라는 기대에서 도움을 주고자 한 것이고, 손 대표는 같은 정치학자로서 오랜 친분을 나눈 20년지기인데다 제1야당인 통합민주당이 제 역할을 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또 임종인씨는 국회의원으로서 보기 드물게 원칙을 가지고 행동하는 분이기에 평소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요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로 국민들이 연일 거리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제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책에서 ‘열망·실망의 사이클’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즉 민주화 이후 대통령 선거는 제도권 밖에서 개혁을 요구하는 운동의 집단적 힘이 선거 영역으로 들어와 대통령을 당선시켰습니다. 대선이 곧 열망을 분출하는 계기가 된 것지요. 하지만 국정 운영이 기대에 못 미쳐 국민이 실망하고 나면 실망 곡선이 그려집니다. 그런데 다음 대선 시기가 되면 국민은 뭔가 또 다른 기대를 하고, 열망이 분출해 새로운 정권을 창출합니다. 이게 바로 열망·실망의 사이클인데요. 이런 사이클을 통해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하지만 2007년 12월 한나라당의 집권은 그 사이클이 아닙니다. 투표율이 매우 낮았다는 것은 정책에 대한 기대나 열망이 소멸했다는 반증이기 때문입니다. 열망·실망의 사이클이 끝났다는 것은 곧 민주 대 반민주, 보수 대 진보의 경쟁축이 해체됐다고 볼 수 있는 거지요. 그러면서도 노무현 정부에 대한 심판은 확실히 한, 좀 이상한 선거였습니다. 그 때문에 한나라당과 보수 언론은 이명박씨의 당선을 압승이라고 하지만 그건 전혀 압승이 아닙니다. 실제로 국민의 30% 지지만으로 대통령이 된 사람은 지금껏 없었거든요. 굉장히 취약한 정치적 기반인 것입니다.

현 정부가 이 같은 구조적 문제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급진적인 시장중심적 정책으로 밀고나가니까 문제가 발생하는 겁니다. 쇠고기 수입, FTA, 영어 몰입 교육, 한반도 대운하 추진, 민영화 정책 등 한 정권이 하기엔 너무나 많고 엄청난 충격을 가져오는 정책들을 한꺼번에 쏟아내는데, 저는 과연 지지기반이 취약한 현 정부가 집권 기간 내에 그것들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구심을 품었습니다. 그런데 예상보다 빨리 난관에 봉착하면서 현 정부의 위기가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향후 5년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하기 어려운, 매우 심각한 위기의 국면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보수신문에 대한 반발도 거센데요.
“전 요즘 사태를 보면서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이라는 것이 한국 사회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있고, 이것은 한꺼번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운동의 여파가 시간이 흐르면서도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중·동과 같은 보수신문의 영향력도 적어질 수밖에 없을 것으로 봅니다. 민주화되고 개방되고 자유주의적이 된 시민사회 젊은 세대의 가치관을 낡은 매체인 조·중·동이 대변하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약력

1943년 5월 24일 강원 강릉 출생

1961년 경동고 졸업

1965년 고려대 정치외교학 학사학위 취득

1969년 고려대대학원 정치외교학 석사학위 취득

1971~73년 대통령비서실 공보비서실 행정관

1977년 미국 시카고대학교대학원 정치학 석사학위 취득

1983년 미국 시카고대학교대학원 정치학 박사학위 취득

1983~ (현)고려대 정경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1986~88년 한국산업연구회 회장

1990~91년 한국정치연구회 회장

1995년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대 교환교수

1996년 일본 동경 아시아경제연구소 연구원

1997년 노동아카데미 회장

1998~99년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

1999년 미국 코넬대 정치학과 초빙교수

2000년~2007년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소장


<글·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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