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로 변한 교정에 남은 거라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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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학교 건물 낡아 어린 학생들 많이 사망… 시간 지날수록‘애절한 사연’ 드러나

5월 12일 규모 8.0의 대지진이 중국 쓰촨성 원촨현에서 일어났다. 현재까지 4만여 명이 숨졌고, 3만여 명이 매몰된 상태다. 3000여 명은 다행히 구출됐지만 병원에서 숨졌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래 최대 지진으로 수많은 인명 피해를 냈다. 단 2초 만의 지진으로 하루아침에 사랑스러운 가족들과 헤어져 목숨을 잃은 수많은 영혼의 얘기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주인 잃은 휴대전화의 벨소리
‘川 A 05860’ 중국 인민해방군 청두군구 보병사단에서 직업군인 생활을 하고 있는 옌쿠이 대대장은 쓰촨성 소속의 이 관광버스 번호판를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고 증언했다. 5월 12일 밤, 그는 상부의 명령을 받고 주둔지인 충칭직할시를 떠나 대대원들을 이끌고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은 쓰촨성 마오현으로 출동하던 길이었다. 폭우가 내리고 깎아지른 절벽을 걸어가고 있는데, 산에서 갑자기 돌멩이가 우박처럼 내려왔다. 여진 때문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마오현에 들어서기 직전 그들은 집채 만한 돌덩이에 깔려 납작해진 대형 관광버스를 발견했다. 13일 오전 5시 10분. 채 동녘이 밝아오기 전이었다. 버스 앞에 두 다리가 잘린 채 신음하고 있는 관광객을 발견했다. 그는 “차 속에 37명이 있다”고 말하고는 기절했다. 병사들에게 관광객을 서둘러 후송시키고는 구조작업을 시작했다.

비가 내린 탓인지 버스 안은 피냄새가 진동했다. 동녘이 서서히 밝아왔다. 그때 갑자기 휴대전화 소리가 들렸다. 문 앞에 쓰러진 시체 안주머니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휴대전화는 피범벅이 돼 있었다. 그가 휴대전화를 켰다. “뭐하는 거야. 전화는 왜 안 받고 그래!” 청년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운명하셨습니다.” 전화 목소리가 일순 멈칫하더니 “그럴리가요”라고 받았다. “절대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제가 지금 현장에 있습니다.” 그러자 전화기 너머에서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한꺼번에 여러 사람의 울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전화가 끊겼다. 전화 주인은 20대 여성이었다. 피를 많이 흘린 탓인지 양장점의 마네킹같이 창백했다. 그는 버스 시트를 찢어서 시체를 덮어주었다. 마치 자신의 친척이 죽은 것처럼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병사들도 일제히 울음을 터뜨렸다.

시체들을 일일이 밖으로 들고 내려왔다. 어떤 사람은 상반신은 차장 밖에 걸려 있었고, 하반신은 차 내에 있었다. 지진이 일어났을 때 그는 창문을 통해 도망치려고 했으나 한순간에 돌덩이가 덮치자 졸지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학생들 구하고 목숨 잃은 교사 많아
이번 지진 피해자는 학생들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쓰촨성 내 7개 학교 건물이 무너져 학생과 교사 등 3000여 명이 매몰돼 대부분 숨졌다. 지진 발생 당시는 오후 수업 시간이었거나 유치원 등에서는 낮잠 시간이어서 학생들의 피해가 컸다.

이번 지진의 진앙지인 원촨현 잉슈진(진은 우리의 읍사무소에 해당하는 중국 지방행정 단위). 이곳의 중심부에 있던 잉슈 초등학교는 이번 지진으로 폐허로 변했다. 13개 학급, 학생 473명, 교사 47명이 있었지만 학생 72명이 숨지고 190명이 실종됐다. 선생님도 20명이 행방불명이다. 온전하게 남은 것은 운동장의 국기 게양대뿐이다.

학교 소년선봉대(보이스카웃과 같은 중국의 조직) 대대장인 저우원(12·여)은 5학년이지만 키가 160㎝였다. 소수민족인 티베트족이지만 반장을 겸하면서 성적은 전교 1등이었다. 작문이면 작문, 운동이면 운동, 못 하는 게 없었다. 4월 말에 열린 현(우리의 군에 해당하는 지방행정단위) 주최 운동회에 학교 대표선수로 나가 100m 달리기와 200m 달리기에서 각각 5위를 차지했다. 지진 발생 소식을 듣고서도 그녀 부모는 그녀가 무사하리라고 확신했다. 운동신경이 발달해 설사 건물이 무너졌다고 해도 자기 몸 하나는 건사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진 발생 이틀 뒤인 14일 오후, 학교 건물 폐허 더미에서 시체를 찾아냈다. 아버지는 “걔가 반에서 제일 뒤에 있었고요. 반 친구 손을 잡고 부축하고 있었어요”라고 말했다. 원래 살 수 있었는데 친구를 챙기느라 변을 당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딸이 학교 건물이 너무 낡았다며 전학하고 싶다고 말했는데 미처 신경 써주지 못해 이런 일이 일어났다”며 말끝을 흐렸다.

교사들도 목숨을 많이 잃었다. 잉슈 초등학교 교사 쑨젠궈씨는 10m 깊이의 건물 더미에 깔려 있어 구조대원이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네 번이나 구조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현장에 달려왔던 쑨 교사 부친은 구조 환경이 워낙 열악해 가망이 없음을 알고는 구조대원들에게 아들을 포기하고 그 대신 학생들을 구하라고 울먹이면서 재촉했다. 16일 밤 여진으로 학교 건물이 다시 한 번 무너졌고, 17일 새벽 친척들이 폐허 더미를 향해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동안 희미하게나마 대답하던 쑨 교사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상당수 교사는 죽음을 앞두면서도 학생들을 챙기는 투철한 교사상을 보여주었다. 일부 학생은 그 덕분에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롄룽(26·여)씨는 잉슈 초등학교 미술 선생님이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학교 최고의 미녀 선생님이었다. 그녀는 6월 1일 아동절(중국은 6월 1일이 어린이의 날)을 앞두고 학생들의 그림 전시회 준비에 바빴다. 4월 말부터 수업을 마친 뒤 학생 예닐곱 명을 데리고 전시회를 준비했다. 그는 날이 어둡기 전에 아이들을 일일이 집까지 바래다준 뒤 자기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롄 교사는 지진 발생 3일이 지난 15일, 학교 건물 폐허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구조대원들이 그녀 시체를 조심스럽게 들어올리자 그녀 품 안에는 남자 학생 2명, 여자 학생 1명이 각각 있었다. 이중 남자 1명과 여자 1명은 다행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번 지진으로 롄룽 교사 혼자만 목숨을 잃은 게 아니었다. 딸을 챙겨주기 위해 왔던 친정아버지와 어머니도 함께 목숨을 잃었다. 그녀의 친정어머니는 마얼캉 현에서 보건소 의사를 지냈던 양윈펀(52). 양씨는 남편과 함께 아바주 교통경찰대 가족 기숙사에 묵고 있었다. 롄룽 교사 남편이 교통경찰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잉슈진은 지진으로 인한 산사태 때문에 외부와 연락이 전혀 되지 않을 때였다. 통신에다 교통 두절로 완전히 외딴 섬처럼 된 상태였다. 이틀 동안 아무런 외부의 지원이 없었다. 생존자들이 먼저 건물 더미를 뒤지며 매몰자들을 구출하기 시작했다. 발견 당시 양씨는 하체가 건물 더미에 깔려 있고 출혈은 계속했지만 머리와 어깨 등 상체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생존자들이 건네주는 우유를 마시면서 체력을 어느 정도 유지했다.

지진 발생 3일째인 15일 오후, 무장경찰 구조대가 마침내 도착했다. 30여 명의 구조대원들은 3개 팀으로 나뉘어 구조작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무너진 건물 구조가 이상하게 복잡했다. 무리하게 구조작업을 할 경우 구조대원들이 위험을 느낄 정도의 구조였다. 구조대원들이 어렵지만 조금씩 그녀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구조대 소속 여의사는 “조금만 참으면 구출될 수 있다”고 격려했고 그녀도 “여러분들이 힘내달라, 나도 협조하겠다”고 생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였다.

그러나 그날 오전 9시 40분쯤, 극심한 고통으로 정신과 기력이 쇠진해진 그녀가 갑자기 여의사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여기는 위험하니까 나를 포기하고 다른 사람들을 구하세요.” 여의사가 “우리는 절대 포기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지만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녀가 오른손으로 유리조각을 들고는 왼쪽 손목의 동맥을 끊어버린 것이다. 눈앞에 붉은 피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한쪽에 엎드린 여의사가 대성통곡을 했다. 여의사 눈앞에서 그녀는 다시 자신의 금반지를 삼켜버렸다. 그때 여진이 다시 시작됐고, 서서히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폐허 밖에서 그녀의 외손녀가 “엄마를 구해주세요, 할머니를 구해주세요”라고 울부짖었다. 구조대원들은 조금만 참았더라면 목숨을 건질 수도 있었다며 안타까워했다.

베이촨초등학교 저우윈 교사는 베이촨 중학교에 다니던 아들 리저우위(15)의 죽음을 아직도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그녀는 지진 당시 아들 학교로 즉각 달려가지 못한 것을 지금도 후회하고 있다. 당시 그녀 역시 46명의 자기 학급 어린 학생을 돌봐야 했던 것이다. 속으로는 아들 걱정이 태산이었지만 “선생님, 무서워요 가지 마세요”라는 아이들의 외침을 외면할 수 없었다.

어린 학생 5명 감싼 교사 시신 발견
아들은 초등학교 시절에는 아이들과 자주 다투고, 컴퓨터 오락 게임을 좋아하는 평범한 아이였다. 원래는 베이촨을 관할하는 시 소재지인  양제1 중학교에 진학시킬 예정이었는데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차라리 본인이 직접 챙겨야겠다 싶어 베이촨 중학교에 보냈다. 그러나 중학교에 들어가자 얘가 변했다. 말썽도 부리지 않고 이제는 용돈에서 얼마씩을 떼내 지난 음력 설날 때는 신부전증을 앓고 있는 외할아버지께 선물도 해드렸다. 치료비에 보태겠다고 새 옷도 필요 없다며 갑자기 어른스러워졌다. 그녀는 “꿈에서라도 아들을 한 번 만나보고 싶다. 아이가 ‘그곳’에서도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두장옌의 쥐위안 중학교. 중2 지리교사였던 푸빈 선생님이 건물 더미에 깔린 것에 대해 처음 학교 관계자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지진이 일어났을 당시 수업을 하고 있던 2학년 7반 교실이 1층인데다, 교탁에서 교실 문까지 1m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날 밤 10시쯤, 구조대원이 건물 잔해에서 그를 발견했을 때 그는 미처 피하지 못했던 학생 5명을 품에 안고 있었다. 이들 학생도 모두 숨이 끊어져 있었다. 당시 푸빈 교사의 수업을 듣던 왕시는 “지진이 일어나고 난 뒤 교실이 아수라장이 되고 어디로 갈지 몰랐을 때 갑자기 뒤에서 탁 하고 미는 힘을 느껴 교실 밖으로 나왔다”면서 “나중에 다른 학생들이 푸빈 선생님이 밀었다고 전했다”고 말했다. 2학년 7반 담임인 왕쭤진 교사는 “우리 반 학생이 모두 76명이었는데 이 중 56명이 살았다”면서 “이들은 대부분 앞자리와 중간 자리에 앉았던 학생이니만큼, 푸빈 교사도 빠져나오려면 충분히 나올 수 있었는데 학생들을 챙기느라 변을 당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푸빈 교사는 지난해 9월 전근한 신참 교사였다. 평소에는 내성적이었지만 열정적인 수업으로 학생이 많이 따랐다. 그는 올해 초 펑저우중학교 영어교사와 결혼한 신혼 부부였다. 참변 소식을 듣고 푸빈 교사 부모와 아내가 두장옌으로 달려왔다. 자선단체에서 그의 부모에게 위로금으로 5000위안(약 65만 원)을 주었다. 그의 부모는 “아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우리 부부는 이미 은퇴해서 돈 쓸 곳이 없다”면서 구성충 교장에게 위로금 전액을 넘기면서 학교를 위해 써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모친은 지난 8일 모친절(중국은 8일을 어머니의 날로 지내고 있다)을 맞아 푸빈 교사가 미리 선물로 준 붉은색 외투가 담긴 선물을 들고 왔다. 그러나 그녀는 가슴이 아파 아들이 준 선물 포장지를 차마 뜯지 못한 상태였다.

중국 내에서도 학교 건물이 많이 무너진 것에 대해 말이 많다. 지진이라는 천재인 탓도 있지만 부실공사라는 인재 때문에 희생자를 많이 냈다는 지적이다. 중국 당국은 지진 구호작업이 끝나는 대로 학교 건물 부실 공사에 대해 전면 감사에 나서 시시비비를 가릴 계획이다.

홍인표<경향신문 베이징 특파원·중문학 박사>ipho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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