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실패 쓴맛 본 디시인사이드 김유식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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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료 빡세게 내고 다시 제자리 왔어요”

[아주 특별한 인터뷰]사업실패 쓴맛 본 디시인사이드 김유식 대표

격식이 없다. 포장도 없다. 잘난 ‘척’, 있는 ‘척’은 그와 거리가 먼 얘기다. 디시인사이드(www.dcinside.com)를 운영하는 디지탈인사이드(www.digitalinside.co.kr) 김유식(38) 대표를 두고 하는 말이다. ‘놀고먹는 사주팔자’를 타고 났다는 그는 유머감각과 사업가적 ‘끼’ 덕분에 명성과 돈을 얻었지만, 바로 그 점으로 인해 만만찮은 전과 기록(?)도 가진 재미 있는 인물이다. PC통신 시절부터 입담과 장사꾼 기질을 발휘해 대박을 터뜨리더니, 1999년에 문을 연 디지털 카메라 커뮤니티인 디시인사이드는 댓글문화, 아햏햏 과 같은 인터넷 신조어 등 새로운 문화코드가 생성되는 곳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디시인사이드 게시판에서 ‘유식대장’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한국 인터넷 문화의 교주 김유식 대표를 만났다.

"아휴, 이제 한숨 돌렸어요. 지난 1년여간 정말 힘들었거든요. 송충이는 솔잎만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절감했어요.”
강남 교보생명 사거리 부근에 위치한 디지탈인사이드 사무실에서 만난 김유식 대표는 기자를 만나자마자 너스레를 떨었다. 사업을 확장할 욕심에서 2006년 11월 코스닥 상장 건설사인 IC코퍼레이션을 인수했던 것이 화근이라고 했다. 최근 그는 IC코퍼레이션의 대표직 중도 퇴임과 동시에 완전히 발을 뗌으로써 곁눈질 안 하고 본업에만 충실할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종전에 디지탈인사이드는 돈이 없어서 야후 서버를 사용하고 있었어요. 야후 서버를 쓰면 우리가 도메인으로 하는 서비스라기보다 모든 서비스 주소가 야후닷컴으로 끝나잖아요. 야후와 계약 종료를 앞둔 2006년 11월, 앞으로 독자적으로 서버를 구축할지 여부를 두고 심각하게 고민했어요. 그러던 차에 150억 원을 투자할 테니 170억 원의 채무를 승계하는 조건으로 320억 원에 IC코퍼레이션을 인수하라는 제의가 들어왔어요. 브로커들은 IC코퍼레이션을 인수하면 디시인사이드를 규모가 큰 포털사이트로 키울 수 있고 1년 후 합병을 통해 상장회사로 만들 수 있다는 거예요. 하지만 그들에겐 애초부터 디시인사이드를 포털사이트로 키우거나 합병하겠다는 생각이 없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김 대표는 자신이 IC코퍼레이션의 주가를 띄우는 ‘얼굴마담‘ 역으로 이용됐다고 믿고 있다. 실제 디지탈인사이드가 IC코퍼레이션을 인수한 직후 IC코퍼레이션의 주가는 3200원대까지 올랐다. 그러나 5월 15일 현재 이 회사의 주가는 385원으로 떨어졌다. 그는 “대표로 있었기 때문에 일말의 책임을 느껴 차마 말도 못했지만 지배구조 자체가 내가 IC코퍼레이션 운영에 관여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며 “결과적으로 디지탈인사이드는 우회상장도 하지 못했고 장부상이긴 하지만 회계적으로도 지난해 100억 원의 적자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순) 영국 런던전쟁기념관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긴급 구속된 후유증으로 영국으로 떠난 그는 그곳에서 카지노를 즐기는 동시에 컴퓨터를 손에서 놓치 않았다. 현지인들과 한때 유행했던 춤인 마케레나를 추는 모습.

(왼쪽부터 시계방향순) 영국 런던전쟁기념관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긴급 구속된 후유증으로 영국으로 떠난 그는 그곳에서 카지노를 즐기는 동시에 컴퓨터를 손에서 놓치 않았다. 현지인들과 한때 유행했던 춤인 마케레나를 추는 모습.

“제가 사업해서 망치면 억울하지 않을 텐데 동업해서 제 의지대로 사업을 이끌지 못하는 상황에서 속수무책으로 보고만 있으려니까 답답했어요. 앞으로는 절대 동업하거나 제 의지대로 할 수 없는 사업에는 손대지 않을 겁니다. 또 이 일을 계기로 사람을 못 믿게 됐어요.”

김유식이라는 이름 석 자가 온라인 상에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은 1990년 PC통신에서다. 하이텔 ‘유머란’과 ‘횡설수설란’에 흥미로운 글을 올리면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종전까지만 해도 ‘최불암 시리즈’ 류의 유머만 유행하다가 그가 기상천외하고 코믹만 이야기를 만들어 올리자 PC통신 이용자들은 열광했다. 당시 그의 경쟁자는 장편 PC통신 유머의 대가로 ‘사이버폐인’으로 유명했던 김현국 현(現) 판도라TV 이사다. 김유식 대표는 “그때 많은 이용자가 들어오는 PC통신을 이용하면 돈벌이가 되겠다고 판단했다”고 회고했다.

1992년 가을 후배와 함께 서울 용산전자상가에 놀러갔다가 그는 눈이 번쩍 띄는 ‘금맥’을 발견했다. 후배는 알고 지내던 한 업자로부터 386메인보드를 14만 원에 구입했는데 PC통신 상에서 판매되는 가격은 17만~20만 원이었던 것이다. 그는 당장 업자에게 14만 원에 지속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도록 구두 계약을 하고 PC통신 하이텔의 ‘팝니다’ 게시판에 15만5000원에 판매 게시물을 올렸다. 또 소비자 가격은 3만 원선이었는데 딜러들 사이에서 10개씩 포장된 한 상자에 5만5000원씩 거래되던 보안기를 개당 9900원에 내놓으면서 히트했다.

“당시 현대전자에 입사한 친구의 초봉이 35만 원이었던 시절이었는데 전 매일 아침 빈 쇼핑백을 들고 나갔다가 저녁에는 쇼핑백 가득 만 원짜리 지폐를 담아 집에 돌아왔어요. 거기에 얼마가 들어 있는지 세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경쟁자가 많이 생겼어요. 그래서 후배에게 일을 물려주고 일본으로 유학을 갔지요.”

일본 신주쿠정보비즈니스전문학교 국제경영과에 입학했으나 1년6개월 만에 그만뒀다. 네트워크를 배우기 위해 유학을 떠났는데 학교에서는 XT-8비트 컴퓨터로 일본어 워드프로세서만 가르치더라는 것. 그 대신 전력(?)을 살려 1994년부터 일본에서 컴퓨터와 모니터, 워크맨 등 전자제품과 게임 및 영화 CD 등을 구입해 한국 PC통신 하이텔에서 판매했다. 한국 소비자가 주문 메일을 보내면 일본 도쿄의 아키하바라 전자상가 거래처를 통해 물건을 받아 포장 후 배송했던 것이다. 같은 제품을 일본에서는 한국보다 싸게 판매하고 있었고, 특히 시간이 지날수록 일본 내 판매 가격이 현격히 떨어졌던 것이다. 주문이 쏟아지면서 그는 하루 2시간밖에 잠을 자지 못할 만큼 바쁜 나날을 보냈다. 수입도 많았다. 한 달 평균 1000만 원씩 벌었다. 그는 “이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치열했던 시기”라고 말했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일이 터졌다. 주문을 받아 국내로 들여온 가와자리 요지야키 감독의 성인 애니메이션 ‘수병위인풍첩’이 음란물로 걸린 것이다. 수병(獸兵)이라고 해 동물 병정이 나와 아기자기하게 싸우는 내용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1996년 음비법(음반·비디오 및 게임물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구속돼 25일간 영등포구치소에서 지내야 했다. 그는 “구치소에서는 잠을 충분히 자게 해줘 알토란 같은 사업을 접어야 한 게 서운하지만은 않았다(웃음)”고 말했다.

그러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에게 잇따라 또 다른 시련(?)이 닥쳤다. 듣고 보면 황당한 이야기다. 그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긴급 구속된 것이다. 이번엔 그가 PC통신에 올린 글이 문제가 됐다. 강릉 무장 잠수함 사건이 터졌을 때인데, 공중파 방송 3사가 앵무새처럼 똑같은 내용으로 방송하는 것을 보고, 이게 정부가 조작한 일이 아니냐고 의구심을 표한 글을 썼던 것이다. 보안수사대 형사들은 그를 두 달간 미행한 후 서울 옥인동 대공분실로 끌고 가 이틀간 심문했다. 1996년 8월의 일이다.

디시인사이드는 인터넷 신조어와 댓글문화를 양산하고 폐인문화와 악플문화의 진원지라는 평가를 듣고 있다.

디시인사이드는 인터넷 신조어와 댓글문화를 양산하고 폐인문화와 악플문화의 진원지라는 평가를 듣고 있다.

“음비법 위반으로 사업을 접은 후 돈은 많은데 할 일은 없던 때였어요. 당시 전 하이텔의 ‘횡설수설’ 동호회 회장으로 규칙적인 생활을 했어요. 낮에는 집에서 PC통신에 글을 끄적이다가 저녁 7시가 되면 지갑에 30만~40만 원씩 넣고 집을 나섰죠. 8시 30분이 되면 서울 종로의 피맛골에서 술을 마셨거든요. 동호회 회원들과 함께요. 집에는 새벽 2시나 돼야 돌아왔고요. 이런 생활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어요. 나중에 옥인동 대공분실에서 심문을 받을 때 수사관들이 그러더라고요. 누구보다 미행이 편한 사람이었다고요. 늘 같은 시각에 피맛골에만 가면 저를 만날 수 있었으니까요(웃음).”

석방 후 그는 자신이 겪은 특별한 경험을 하이텔 게시판에 ‘대공분실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다. 그것도 코믹하게. 집에 이상한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전화를 받으면 수화기 저편에서 “김유식씨?”라고 물었고 그가 “네”라고 답하면 전화를 끊는 일이 반복됐다. 대공분실 일을 공개적으로 발설하는 행위에 대한 무언의 견제와 압력이었던 것이다. 그는 보따리를 싸 영국으로 도피 아닌 도피를 했다. 출국 때는 영어라도 확실하게 배우고 올 심산이었지만 카지노에 맛을 들이면서 호텔 카지노에 출근하다시피 했다(이후 그의 평생 꿈은 동남아지역에 부티크 호텔 겸 카지노를 세우는 것이 됐다).

여기서 잠깐. 기왕 카지노 이야기가 나온 김에 그의 성장기를 들여다보자. 그가 남들보다 컴퓨터에 일찍 눈을 뜬 데는 신문사에 근무한 아버지의 영향과 ‘도박’에 대한 남다른 흥미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세계일보와 서울신문 전산팀에서 근무한 아버지 덕분에 일찍 컴퓨터를 접할 수 있었다. 신문사들이 활판제작 체제에서 전산제작(CTS) 체제로 바뀌던 1980년대 초,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그는 아버지를 따라 서울 종로2가 동화서적 3층에 위치한 컴퓨터학원에서 컴퓨터를 배웠다. 소년 김유식의 목적은 금성 패미콤 FC 100 컴퓨터로 ‘벽돌깨기’ 등 게임을 하는 것이었다. 그의 이 같은 게임벽은 고등학생 때까지 이어졌다. 게임을 하느라 일본어를 완벽하게 깨우쳤을 정도. 중·고등학생 때 취미가 또 있었다. 고스톱 치기와 무협지 열독이었다. 그리고 각종 이슈를 내세운 신문을 제작하는 일도 즐겼다. 물론 정식으로 제작한 게 아니라 연습장에다 만든 것이다.

무협지 탐독을 통해 증폭된 발칙한 상상력과 신문 제작 경험을 통해 이슈를 발굴해 글을 쓰고 편집하는 재주, 그리고 컴퓨터를 능숙하게 다루는 실력은 훗날 그가 PC통신과 인터넷 문화를 이끌어가는 제왕의 자리에 오르는 데 디딤돌이 됐다.

이제 다시 그가 영국에서 귀국한 1997년 말로 시간을 건너뛰자. 한국에 돌아온 이듬해 8월 그는 베스트셀러 ‘일본인과 성문화’(학영사)를 출간했다. 영국 유학 중 일본인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를 취합해 낸 책이다. 하지만 출판사가 계약금과 6개월짜리 문방구 어음 45만 원 외에 인세를 일절 지불하지 않아 책으로 돈을 벌지는 못했다. 그리고 1999년 10월, 노트북인사이드와 디시인사이드(디지털카메라인사이드)를 오픈했다. 노트북과 디지털 카메라 제품에 대한 사양표 구성과 리뷰를 올리고 공동구매를 통해 수입, 판매하는 사이트다. 이듬해 3월엔 모 벤처캐피탈로부터 5억 원을 투자받아 2000년 디시인사이드와 노트북인사이드를 아우르는 디지탈인사이드를 창업했다.

특히 디시인사이드는 단순히 디지털 카메라의 기종 소개와 공동구매만 하는 사이트가 아니다. 커뮤니티 사이트로서 기능이 더 크다. 현재 디시인사이드는 디지털 카메라와 관련된 정보와 토론을 다루는 게시판을 비롯해 갤러리, 갤로그, 자동차, 여행, PC&디지털, 음식, 가격 비교 등 다양한 테마로 구성돼 있다. 이 중 지난해 오픈한 갤로그(gallog)는 갤러리와 로그(log)의 합성어로 블로그나 미니홈피와는 다른 개념의 개인화 서비스다. 갤로그를 이용하면 디시인사이드 이용자가 그동안 갤러리에서 활동하며 남긴 게시물과 댓글들을 모두 쉽게 볼 수 있고 다른 이용자들의 게시물과 사진들도 쉽게 스크랩할 수 있다.
디시인사이드가 주목을 끈 것은 이 사이트에서 ‘ 아햏햏 ’, ‘햏자’와 같은 인터넷 신조어가 많이 탄생하고 댓글문화가 꽃을 피웠기 때문이다. 또 폐인문화와 악플문화의 진원지라는 따가운 눈총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 그의 바람은 단기적으로는 디시인사이드를 국내 웹사이트 10위권 내로 진입시키는 것이다. 또 중장기적으로는 정상적으로 건실한 투자를 받아 코스닥시장에 상장하는 것이다. 물론 호텔&카지노 설립이라는 오랜 꿈을 함께 품으면서.

“폭탄주 40잔 끄덕없어요”

[아주 특별한 인터뷰]사업실패 쓴맛 본 디시인사이드 김유식 대표

주량은 어느 정도인가.
“지난해에는 한 자리에서 폭탄주 40잔을 마셨다. 양주와 맥주가 각 5부씩 들어간 폭탄주다. 그런데 배우 정준호씨가 각 10부로 제조한 폭탄주를 30잔 마시고, 추가로 양주를 스트레이트로 30잔 마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에 비하면 난 조족지혈(鳥足之血: 새발의 피)이다.”

취미는 무엇인가.
“컴퓨터 앞에서 찌질거리는 것과 여행하는 것이다. 지난 4월에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한 달간 머물면서 ‘산타루치아’를 불렀다.”

유흥갤러리, 은꼴사(은근히 흥분되는 사진), DDR갤러리, 막장갤러리 등을 통해 선정적인 글이나 사진이 올라오면서 디시인사이드가 음란물 유포에 책임이 있다는 지적에 대한 견해는.
“실질적으로 음란물이 많이 돌아다니는 곳은 다운로드 시장이다. 디시인사이드에서 선정적인 사진이 있는 곳은 18세 미만 이용 불가인 갤러리뿐이기 때문에 비교적 관리가 잘 되는 편이다. 우리 직원들이 깨끗하고 건전한 사이트를 만들려고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일부 악성 이용자들로 인해 디시인사이드를 보는 시선이 왜곡돼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치밀하고 철저하게 관리하지 못한 책임은 인정한다. 이번 달부터 새로 세팅해 욕설 없는 깨끗한 디시인사이드가 되도록 만들겠다.”

술값을 아끼기 위해 직접 차린 술집의 영업 실적은(한국의 접대문화와 룸살롱 술값에 질린 그는 접대비를 절약하는 차원에서 아예 강남에 여자 없는 술집을 차렸다).
“동업자와 몇천만 원씩 주고 차린 것인데 장사가 잘 안 된다. 겨우 유지하는 수준이다. 대신 내가 가면 30% 싼 가격에 술을 마실 수 있고 안주도 그냥 주니까 좋다.”

지난해 각 정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을 앞두고 손학규 현 통합민주당 대표를 공식적으로 지지했다. 손 대표를 지지하는 차원에서 전진코리아와 선진평화연대의 공동대표를 맡기도 했다. 정치에 뜻이 있는 것은 아닌가.
“전혀 없다. 전진코리아와 선진평화연대 공동대표 자리는 단지 손학규 대표를 돕는 일이라고 해서 맡았을 뿐이다. 난 장사꾼이고 앞으로도 장사꾼으로 남을 것이다.”

스스로 ‘극우’에 가깝다고 표현하며 ‘친재벌’ ‘친시장주의자’라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손학규 대표보다 이명박 대통령과 코드가 잘 맞을 것 같은데.
“이 대통령에게 우호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다만 손 대표 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어 잡은 것이다. 손 대표의 경우엔 인간적인 면모에 끌렸다. 통합민주당으로 가신 것이 안타깝기도 했지만 사람이 곧으면 당도 변화시킬 것으로 믿고 있다.”


<글·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hyang.com>

●약력

1971년 2월 17일 서울 출생

1989년 서울 한영고등학교 졸업

1999년 폭스미디어 대표

2000년~현재 디지탈인사이드 대표이사 사장

2004년 디시인사이드피큐 이사

2006년 IC코퍼레이션 대표이사

●저서

1998년 인문서 ‘일본인과 성문화’(학영사)

1999년 인문서 ‘나는 일본 성문화가 두렵다’(하늘빛)

1999년 에세이집 ‘김유식의 원조횡수’(문화사랑)

1999년 유머집 ‘금테두른 브라자’(멀티미지)

2000년 소설 ‘맥주전쟁’(인화)

2000년 유머 에세이집 ‘심심할 때 읽는 책’(인화)

2004년 에세이집 ‘개죽아, 대한민국을 지켜라’(랜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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