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세잔은 왜 생트빅투아르 산에 그토록 집착했을까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b>세잔의 산을 찾아서</b><br>페터 한트케·이중수 옮김·아트북스·2006

세잔의 산을 찾아서
페터 한트케·이중수 옮김·아트북스·2006

1910년 12월에 열린 후기인상파전에 내놓은 폴 세잔의 그림들은 이제까지의 그림과는 다른, 아주 낯선 그림들이었다. 세잔의 그림에서 사물들은 검은 윤곽선도 없이 모호하게 엉긴 색채의 덩어리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캔버스 위에 여러 번 겹쳐진 붓자국들은 빛의 잔재들에 둘러싸인 사물들의 모호한 현존을 건져낸다. 그것은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마음이 포획한 사물들에 대한 인상들이다.

그 낯선 그림 앞에서 사람들은 당황하고, 나중에는 불같이 화를 냈다. 눈으로 보고, 인지(認知) 가능한 사물들의 유사과학적 충실성을 전혀 따르지 않은 세잔의 그림들을 언론과 비평가들은 맹렬하게 비난했다.

세잔은 인상주의 화풍의 연장선 위에 서 있었지만 “인상주의를 무언가 견고하고 항구적인 것”으로 세우고자 했다. 세잔은 이전까지 사물과 현실을 보는 방법을 넘고, “거세당한 후레자식들”을 넘고, 그리고 인상파 화가들이 일군 기교의 축제와 회화적 추상의 세계를 넘어 또 다른 경지로 들어간다. 세잔이 캔버스 위에 그린 것들은 덧없고, 찰나적이고, 우연적인 것들이 추는 춤이었다. 세잔은 눈에 비친 사물이나 풍경을 해체하고 그것을 그린 사람의 “존재의 가장 깊은 뿌리들과 엉켜” 있는 그 무엇을 그리려고 했다. 화가들은 무엇을 그리는가.

보는 것을 그린다면, 보는 것이란 무엇인가. 빛의 화소들, 그 속에서 드러나는 사물들과 그 음영들. 과연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바로 볼 수 있는가. 과학이 말하는 바는 다르다. 우리가 보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아니다.

우리가 사물을 볼 때, 우리는 착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 보는 것은 망막에 비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아니라 보고 싶은 바에 따라 의식에 의해 변조된 현실이다. 우리는 보기 원하는 것을 보고, 그 나머지는 무용한 것으로 여겨 버린다.

1978년 봄에 열린 세잔의 특별전이 주목할 만한 희곡을 써낸 오스트리아 출신의 명민한 작가인 페터 한트케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했다. 처음에 눈길을 끈 것은 ‘팔짱을 낀 남자’라는 작품이다. 한트케는 꽉 다문 입, 어두운 표정, 그리고 허공을 응시하는 듯한 눈을 가진 한 사내를 그린 그림을 본 순간 충격을 받고 그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이 전시회에 걸린 ‘생트빅투아르 산’은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실제의 생트빅투아르 산을 가까이에서 직접 보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혔다. 한트케는 “단 한 번도 무엇인가에 이끌려본 적이 없는 삶, 그러나 너무도 쉽사리 나를 이끈 것은 바로 산이었다”고 쓴다. 무엇인가에 이끌려본 적이 없는 삶을 그 무엇인가로 이끈 세잔의 인력은 바로 예술이 지닌 근원적인 힘을 보여준다. 예술은 무뚝뚝한 사람마저 신비의 느낌 속으로 이끌고, 경이로 가득 찬 눈빛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한다. 그게 바로 예술의 힘이다.

몇 년 뒤 그는 생트빅투아르 산을 보기 위해서 프로방스를 방문한다. 그는 ‘세잔의 길’을 걸어서 생트빅투아르 산을 보러 떠난다. 한트케가 이 산을 처음 보았을 때 세잔이 그린 것과 너무 달라 놀란다. 과연 세잔이 이 산을 그린 것이 맞는가, 하는 의구심을 가질 정도로 생트빅투아르 산은 다른 모습으로 서 있었다.

“실제로 앞에서 바라보면 생트빅투아르 산은 세잔이 그린 산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다. 그림과는 달리 너무도 기이하고 독특한 형상 탓인지 세잔이 정말 이 산을 그린 것인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생트빅투아르 산은 프랑스 남부의 프로방스 지방에 있다. 이 산은 백운석이 많이 섞인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위산이다. 해발 천 m에 조금 못 미치는 바위산의 정상은 수평을 이루는데, 그 아래로 납작하고 평평한 주름들은 비탈을 이룬 채 아래로 흘러내린다. 석회암의 주름진 습곡을 품고 있는 이 생트빅투아르 산은 백운석이 함유된 바위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석회암의 바위산은 밝은 대낮의 빛을 받으면 마치 “섬광과 불빛의 파편들”을 쏟아내는 듯하다. 말년의 세잔은 고향인 프로방스 지방에 있는 이 생트빅투아르 산을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여러 각도에서 다양한 형태로 그려냈다.

화구를 멘 세잔의 서른 살 때 모습.

화구를 멘 세잔의 서른 살 때 모습.

세잔은 마치 구도자처럼 몇 달이 지나도록 장소를 옮기지 않고 보리수 그늘이 있는 한 자리에서 이 산을 바라보며 단지 각도만 달리 해서 그림을 그렸다. 세잔은 왜 생트빅투아르 산에 왜 그토록 집착했을까. 백운석이 함유된 석회암이 응고되어 만들어진 바위산은 정오의 햇빛을 받아 희고 밝은 섬광을 뿜어낸다. 한트케가 ‘세장의 길’을 거쳐 만난, 프로방스의 넓은 평지 위에서 우뚝 돌출한 이 생트빅투아르 산은 화가의 마음 속에 있던 바로 그 산, 마음의 영지(領地)였던 것이다. 이 완강하게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바위산은 덧없이 늙고 시드는 육체에 견주어 항구적인 존재다. 생트빅투아르 산은 찰나적으로 사라져가는 모든 것들에 비해 오직 신만이 누리는 영원성을 체현하고 그 아름다움을 늠름하게 뽐내는 실재인 것이다. 한트케는 자신도 모르게 세잔이 이끈대로 세잔의 성소(聖所), 세잔의 무릉도원 속으로 성큼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페터 한트케는 비로소 깨닫는다. 세잔이 그린 것은 생트빅투아르 산이라는 실재가 아니었음을. 그것은 세잔이 평생을 품고 있던 하나의 심상, 즉 불멸의 숭고함을 품고 있는 마음속의 영산(靈山)이며, 세잔이 평생을 찾아 헤맨 영원이라는 이데아였음을. 그것은 불행과 위험이 내재된 삶의 조건들 위로 우뚝 솟아 황금빛 섬광을 쏟아내며 빛난다. “좀처럼 풀리지 않는 숙제처럼, 세잔이 그린 산과 실제 생트빅투아르 산의 모습은 오로지 서로 다른 형상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실제 내 앞에 우뚝 선 생트빅투아르 산을 보자 이제까지와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세잔은 실제 산을 달리 그린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절묘하게 표현한 것이라는 사실, 상상이야말로 훨씬 더 논리적이지 않은가.”

우리는 이 책에서 세 개의 생트빅투아르 산을 만난다.
첫째는 세잔이 그린 산이고, 두 번째는 페터 한트케가 묘사한 산이고, 세 번째는 실제의 생트빅투아르 산이다. 그것들은 저마다 다르며 또 동일체이기도 하다. 한트케는 세잔의 그림 앞에서 미적인 것이 주는 내면의 법열감에 전율하고, 세잔의 그림에서 본 생트빅투아르 산을 직접 보기 위해서였다. 세잔의 감흥과 예술에 대한 탐색의 열정이 시킨 것이다. “서로 연관된 맥락에서 전체를 보려는 열망으로 나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아주 특별한 행적을 좇아 그 자취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 다만 그 형적이 내게 무엇을 가리키는지, 어디로 이끌지는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한트케를 몽환과 냉혹함 사이로 난 에움길로 내몬 것은 세잔의 예술에 대한 탐색의 열정과, 그 아래 소용돌이치는 절대의 미에 대한 흠모, 항구적인 것이 품고 있는 영성(靈性)을 향한 이끌림, 수진무구한 것에 대한 동경, 덧없이 소멸하는 것들에 대한 연민과 가여움이다.

한트케는 세잔의 자취를 찾아 떠난 여정에서 저 프로방스의 실편백나무들이 서 있는 ‘세잔의 길’ 위에 서려 있던 고요, 생트빅투아르 산의 고고함, 그리고 자연과 순수하게 교감하고 숙고하며 예술에 헌신한 거장 화가 세잔이 이룬 높은 예술적 성취를 만난다. 세잔 위에 페터 한트케가 겹쳐진다. 세잔의 그린다는 행위와 한트케의 글을 쓰는 행위는 휴머니즘이라는 하나의 맥락으로 연결되어 있다. 결국 세잔과 그의 예술에 대한 탐색은 곧 페터 한트케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탐색의 다른 여정이었음이 분명하다. 이 책은 한 위대한 화가에게 영감을 준 생트빅투아르 산을 찾는 예술 기행문이며, 단 한 번도 무엇인가에 이끌려본 적이 없는 사람이 이끌렸던 세잔의 그림을 매개로 펼친 예술론이다. 아울러 정신적 참 스승의 위대함, 즉 “오직 실재함과 충만함을 통해 유일한 것 또는 그와 같은 것에 귀기울인다”고 말한 세잔에게 페터 한트케가 바치는 오마주다.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독서일기바로가기

주간경향 댓글 정책에 따라
이 기사에서는 댓글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