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올림픽 선수단 ‘사상 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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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달 10개 이상 획득 목표… 유도 계순희에 금메달 기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베이징 올림픽 해외 성화 봉송이 끝났다. 남한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베이징 올림픽 성화 봉송 도중 크고 작은 사고가 발생했다. 특히 중국 당국의 티베트 사태 유혈 진압으로 인해 성화가 중도에 꺼지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남한에서도 일부 중국 유학생들의 폭력행사로 인해 양국의 정부 관계자들을 당혹케 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구 상에서 유일하게 성화 봉송 행사가 아무 탈 없이 끝난 나라가 있는데, 바로 북한이다.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평양에서 성화 봉송 행사가 이뤄졌다. 평양에서의 성화 봉송은 양국 국기가 게양되고 국가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성화 봉송 출발 행사가 진행됐다. 행사장인 주체사상탑 광장에는 북한의 인공기와 중국의 오성홍기, 베이징 올림픽기를 든 평양 시민, 중국 유학생, 화교 등 1만여 명의 인파가 운집했다. ‘형제의 나라’ 답게 북한 수뇌부도 총출동했다. 헌법상 최고 수반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비롯해 박학선 조선올림픽위원장, 박병종 평양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등이 모습을 보였다.

평양 시민 열렬한 환호 속 성화 봉송
남한의 인천공항에서 공수된 성화는 평양 시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봉송됐다. 성화 봉송의 첫 주자는 1966년 런던 월드컵 주역인 박두익이었다. 성화는 주체사상탑을 출발해 조중 우의탑→중국대사관→김일성 광장→천리마 동상→개선문을 거쳐 김일성 경기장에 도착했다. 1999년 세계육상선수권 여자 마라톤 우승자인 정성옥이 대미를 장식했다. 성화 봉송로 주변으로 환영을 나온 평양 시민들은 꽃술을 흔들며 성화 봉송 주자들을 응원했다. 성화 봉송이 성공리에 끝난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각별한 관심 덕분이었다. 김 위원장은 성화 봉송로를 아스팔트로 새로 포장하고 물청소까지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이 여세를 몰아 베이징 올림픽에 역대 올림픽 중 최대 규모의 선수단을 파견할 예정이다. 이와 관련해 리경일 북한 체육지도위원회 국장은 “현재 50여 명의 선수가 올림픽 출전권을 확보했고 5월 말이면 60명 이상이 출전 자격을 갖출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북한이 가장 많은 선수단을 내보낸 것은 1992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올림픽으로 선수 65명이 참가했다. 리 국장은 “평양과 베이징의 시차가 1시간밖에 나지 않아 유리하지만 33℃ 이상 높은 기온이 걱정”이라고 덧붙였다.

북한은 베이징 올림픽에서 메달 10개 이상 획득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특히 여자 유도 57㎏급의 계순희가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에 가장 가까이 가 있다. 계순희는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여자 48㎏급 결승에서 당시 84연승을 달리던 일본의 유도 영웅 다무라 료코를 꺾고 북한 유도 사상 처음으로 금메달을 땄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는 57㎏급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북한이 올림픽에 최초로 출전한 것은 1964년 도쿄 올림픽이지만 국가올림픽위원회(IOC)의 출전권 박탈로 실질적으로는 1972년 독일 뮌헨 올림픽부터 출전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은 뮌헨 올림픽 사격에서 금메달을 따내는 등 지금까지 많은 올림픽 영웅을 배출해왔다. 계순희를 비롯해 체조 안마의 배길수(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레슬링 자유형의 김일(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등이 그들이다.

북한이 세계 무대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체육을 통해 집단주의 정신을 함양하고 신체 발전을 통해 노동력과 국방력을 강화시킨다는 독특한 사회주의 논리에서 비롯했다. 하지만 지금은 점점 더 궁핍해지는 경제력 때문에 북한 체육의 위상이 많이 떨어져 있다. 남한이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 10개 이상을 따내 종합 10위권 이내를 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권순철 기자 i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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