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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터의 마법’ 중동평화 불러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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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중재 나서… 하마스 지도자 만나 공존방법 모색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또 한 번 ‘일’을 낼 것인가. 전 세계 갈등이 있는 곳마다 달려가 ‘해결사’ 역할을 해온 카터 전 대통령이 최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의 중재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4월 13~21일 중동을 순방한 그는 18~19일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에서 팔레스타인 하마스의 최고 지도자인 칼리드 마샬을 만났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저항조직이던 하마스가 2006년 총선을 통해 제도권에 진입한 뒤에도 ‘테러 단체’라는 낙인을 거두지 않은 채 대화를 거부하고 있다. 그 때문에 카터가 하마스 지도자와 만난 것은 하나의 ‘사건’이다. 카터는 마샬과 면담하기 전에 미국이 ‘폭정의 전초기지’로 규정하고 있는 시리아의 바샤르 아사드 대통령과도 회동했다.

AP통신에 따르면 카터는 순방 마지막 날인 21일 예루살렘에서 “하마스가 1967년 3차 중동전 당시의 국경을 기준으로 요르단강 서안 및 가자 지구에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방안을 수용했고,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인정할 용의도 밝혔다”고 말했다. 하마스가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불구대천)’ 관계로 여겨오던 이스라엘을 ‘현존하는 실체’로 받아들이겠다고 했다는 얘기다. 칼리드 마샬은 별도 기자회견에서 “이스라엘을 국가로 승인할 수는 없다”면서도 “(하마스와 이스라엘이) 휴전을 통해 공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과 이스라엘 반응은 냉담
하지만 회담 결과에 대해 미국과 이스라엘의 반응은 싸늘하다. AFP통신에 따르면 데이너 페리노 백악관 대변인은 “하마스가 내놓은 대외적 발언과 실제 행위를 살펴봐야 한다. 실천이 말보다 중요하다”고 잘랐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도 “우리는 카터 전 대통령에게 하마스와 접촉하지 말라고 요청했다”면서 “미국은 하마스와 거래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카터가 호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버락 오바마 민주당 상원의원조차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인정하고 테러를 중단하지 않는 한 이들과의 만남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에후드 올메르트 이스라엘 총리는 아예 카터의 면담 요청을 거절했다.

그렇다고 우군이 없는 것은 아니다.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은 “카터는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에 유지되는 평화협정(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이끌어낸 유일한 미국 대통령”이라며 “우리는 평화 중재의 출발점에 선 그가 이뤄낸 진전을 의미 있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카터 편에 섰다. 카터 본인은 “문제는 내가 하마스를 만난 게 아니라 미국과 이스라엘이 반드시 대화해야 할 사람들과 만나기를 거부하는 것”이라며 이·팔 분쟁 중재를 계속할 것임을 시사했다.

카터의 중동 문제 해법이 실질적 효과로 이어질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하마스는 이스라엘이 1967년 점령한 동예루살렘을 포함해 전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땅의 22%를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의 영토로 인정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지금도 팔레스타인 점령지 안에서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할 정도로 점령지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따라서 당장은 이·팔 협상이 획기적 돌파구를 찾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그럼에도 카터의 하마스 지도자 면담이 의미를 갖는 것은 그 상징성 때문이다. 국제 사회에 하마스의 정치적 실체를 인식하게 하는 한편, 미국·이스라엘의 대팔레스타인 정책이 갖는 협소함을 환기시켰다는 점이다.

20여 년간 전 세계 누비며 평화활동
카터는 ‘가장 성공적인 전직 대통령’ ‘퇴임 이후가 더 아름다운 전직 대통령’으로 불린다. 땅콩 농장 주인에서 조지아 주지사를 거쳐 1976년 대통령에 당선한 그의 백악관 생활은 그다지 순탄치 못했다. 의회는 카터가 내놓은 조세 개혁안과 장기적 에너지 정책을 무시했고 유가가 두 배로 급등하자 미국민 대부분은 그에게 인플레이션의 책임을 돌렸다(NYT Guide to Essential Knowledge의 분석). 이란의 이슬람 혁명 이후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의 인질 위기는 그에게 결정타가 됐다. 억류된 대사관 직원들의 석방을 놓고 이란 정부와 굴욕적인 협상을 벌이다가 ‘최후의 카드’로 특공대 투입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만 것이다. 앞서 1978년 이스라엘·이집트 간 캠프 데이비드 협정 체결에 기여한 공로조차 그늘에 가렸다. 결국 그는 1980년 대선에서 로널드 레이건 공화당 후보에 참패하여 쓸쓸히 백악관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인생은 일직선이 아니다. 역사의 뒤편으로 조용히 퇴장하는 듯하던 카터는 1982년 비영리재단 ‘카터 센터’를 세워 무보수 이사장을 맡으면서 새로운 역할을 개척하기 시작한다. 이후 20여 년간 그는 전 세계를 누비며 국제 평화와 민주주의 확산, 인권 증진에 힘써왔다. 카터의 주된 활동 무대는 중남미와 중동의 분쟁 지역이나 ‘초보 민주 국가’들의 선거 현장이었다. 1988~89년 에티오피아 정부군과 반군 간 평화협상을 중재하고, 1990년에는 니카라과 좌파 정권과 담판을 지어 자유로운 총선의 계기를 마련했다. 1999년 우간다·수단 분쟁의 해결사로 나선 데 이어 2004년에는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소환투표 현장에서 감시활동을 벌였다.

한국과도 인연이 각별하다. 1994년 1차 북핵 위기 때 카터는 북한 방문을 감행했다. 당시 미국 정부가 영변 핵시설 공습을 적극 검토할 만큼 한반도에는 전운이 짙었다. 그는 김일성 북한 주석과 만나 남북 정상회담 개최 약속을 이끌어내며 위기 해결의 물꼬를 텄다. 정상회담은 김 주석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성사되지 못했지만, 카터의 노력은 그해 10월 영변 핵시설 동결 및 대북 경수로 제공을 뼈대로 하는 ‘제네바 합의’로 열매를 맺었다.

카터가 또 다른 족적을 남긴 분야는 제3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사랑의 집짓기 운동(Habitat for Humanity)’이다. 2002년 남아공에서 ‘지미 카터 특별건축사업(JCWP) 2002’ 사업을 출범시킨 그는 해비타트 활동의 일환으로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200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후에도 카터의 활동은 멈추지 않고 있다. 그는 4월에만 절반가량을 해외에서 보냈다. 네팔의 제헌의회 구성을 위한 총선(10일)에서 선거 감시 활동을 펼친 데 이어 9일간 중동을 순방한 것이다.

카터는 올해로 84세다. 그를 보면 어느 보험회사 광고에 나오는 ‘러브 에이지(Love Age)’란 카피가 떠오른다. 은퇴 이후 더 성장하고 원숙해진 카터야말로 ‘자신의 나이(또는 나이듦)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닐까.

<국제부┃김민아 기자 makim@kyunghyu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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