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노당 당선자 강기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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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 다윗이 여당 골리앗을 무너뜨리다

[인물연구]민노당  당선자 강기갑

“18대 국회에서도 험난한 길을 피해가지 않겠습니다!”
두루마기, 단식투쟁, 구레나룻으로 상징되는 민주노동당 강기갑(54·경남 사천) 후보. 그가 대형 사고를 친 상대는 한나라당의 실세이자 여당의 선거 콘트롤 타워 이방호(63) 후보였다. 전국은 사천에서 전해온 이 ‘뒤집어지는 소식’에 경악했다. 이슈가 부족했던 밋밋한 총선에서 그의 당선은 박하사탕처럼 신선했다.

두루마기 벗고 청바지 유세로 눈길 끌어
2004년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의원으로 의정활동을 시작한 강 당선자는 이번 총선에서 고향 사천에 출마, 재선의 이방호 후보와 정면승부를 펼쳤다. 당초 그의 당선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고, 상대 골리앗은 너무도 크고 단단했다.

이방호 후보는 한나라당의 심볼까지는 아니더라도 당의 총선 동력을 공급하는 발전기 역할을 했던 인물 아닌가. 그 발전기가 고장 나 덜덜거리는 사이, 이 민활한 다윗이 비틀거리는 골리앗에게 강한 어퍼컷을 내지른 것이다. 골리앗은 ‘어이쿠’ 하는 둔중한 신음 소리와 함께 중앙 정치 무대에서 사라졌다.

선거 운동 과정부터 심상치 않은 조짐이 벌어졌다. 강 당선자는 두루마기를 벗어던지고 청바지를 입고 유세를 벌였다. 청바지를 입는 데 그치지 않고 그는 ‘텔미춤’까지 추며 선거 마당에 화려한 리듬과 색조를 입히는 데 성공했다. 그의 칙칙한 이미지를 반전시킨 경쾌한 유세는 곰처럼 둔중한 여당 사무총장의 행보를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가벼움이 무거움을 이겼고, 로마시대 전투로 비유하자면 경보병이 중무장 기병을 함몰시킨 격전이었다.

그의 승리는 176표에 불과한 박빙의 차이를 극복한 결과다. 이렇듯 간발의 차로 승리한 데는 적어도 20가지 이상의 요인이 등장한다. 여러 가지 요소가 절묘한 콤비네이션을 이뤄내지 않고는 승리할 수 없는 게임이었다.

‘승리의 싹수’가 보이는 순간, 당이 강 당선자 지역구를 집중 지원한 것이 우선 주효했다. 일부 박근혜 지지자(박사모)의 지지 선언도 그에게는 큰 힘이 됐다. 역설적이지만 강 후보의 당선은 박근혜의 위력을 보여준 사건이다. 동시에 강기갑의 당선은 그의 정치적 역동성을 과소평가한 이방호의 ‘전략적 경솔함’이 빚은 참사이기도 했다.

1953년 사천에서 태어난 그는 1971년 사천농고를 졸업하고, 공무원을 하라는 아버지와 형의 권유를 뿌리치고 젖소와 과수를 기르며 농민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1976년 한국가톨릭농민회에 가입하면서 농민운동의 길에 들어섰다. 1982년부터 약 5년간, 그는 인천의 한 수도원에서 신부가 되기 위해 영적 수련을 쌓은 적이 있다. 하지만 격정적인 성격 탓에 ‘순명’이라는 수도원의 규칙을 고분고분 따르지 못했다고 한다.

1987년부터 1991년까지 가톨릭농민회 경남연합회 회장을 맡았던 그는 고향 사천에서는 농민회를 만들었다. 지역 농민회를 이끌던 그는 2000년 전국농민회총연맹(이하 전농)의 결성과 함께 전농 부의장, 경남도연맹 의장, 농가부채대책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각종 농민운동을 주도한다.

“혼신의 힘을 다해 섬김의 정치로 보답”
그가 털보가 된 사연도 농민운동과 연관이 깊다. 1989년 전국의 농민 대표들은 농산물 수입 개방을 반대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당시 농촌의 핫 이슈는 수입개방 문제와 함께 농촌 총각의 결혼 문제였다. 경찰서에 연행된 노총각들이 유치장 안에서 농촌 총각 결혼 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그는 대책위 위원장을 맡으면서 “농촌 총각의 첫 번째 결혼을 주선할 때까지 머리카락과 수염에 손을 대지 않겠다”는 비장한 결의를 다졌다. 대책위 활동은 100여 쌍의 결합 실적으로 이어졌고 강 당선자 역시 부인 박영옥씨를 이 운동 과정에서 만났으니 얼굴의 수염은 귀중한 상징으로 여겨졌을 법하다.

2001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경남도청을 방문해 도민 초청 오찬간담회를 열었을 때의 일화가 유명하다. 전국농민회 경남도연맹 의장 자격으로 참석한 그는 행사 도중 갑자기 벌떡 일어나 “농사꾼으로서 대통령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라고 했다가 그대로 경호원들에게 끌려나간 적이 있다.

그가 국회의원이 된 과정도 정치적 야망이나 전략과는 거리가 멀다. 2004년 17대 총선 후보 등록 3일을 앞두고 그는 전농으로부터 농민 대표로서 민주노동당 후보로 출마하라는 제안을 받았다. 총선에서 민노당이 13%가 넘는 정당 지지율을 얻은 것은 지금도 놀라운 ‘정치적 위업’으로 기억되고 있다. 총 8명의 비례대표 의원을 당선시키면서 그는 사상 최초의 ‘농민 국회의원’으로 국회에 입성한다.

국회의원이 되고 난 후에도 그는 농민이란 천직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젖소 90마리를 키우고, 밤과 단감 농사를 짓는 평범한 농민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그가 농민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는 것에는 이런 ‘신분적 배경’이 크게 작용한다. 국회의원이기 전에 농민이라는 것이 그의 정체성 고백이다. 의원직을 유지한 채 전농 부의장으로 활동했고 홍콩으로 미국으로, 국제적인 농민투쟁의 조직을 꾸리고 투쟁했다.

그는 의원의 직분에도 충실했다. 매년 언론이나 각종 단체에서 선정하는 우수 국회의원 명단에서 강 당선자의 이름은 항상 오르내렸다. 최근 민노당이 분당 사태로 심각한 내홍을 겪을 때도 홀로 한·미 FTA 비준 동의안을 막기 위해 국회 본회의장 입구에서 단식농성을 벌였다. 강기갑 하면 단식투쟁이 떠오르는 것도 그의 물불 가리지 않는 행동주의 의정 활동의 결과로 볼 수 있다.

강 당선자는 “사천도 놀라고, 대한민국도 놀랐다. 온 국민이 감탄한 사천 시민의 위대한 선택에 저 역시 벅찬 감동을 누를 길이 없다”며 감격의 눈물을 쏟았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어머니의 마음과 같이 지역민을 진정 보살필 줄 아는 ‘섬김의 정치’로 보답하겠다”고 당선 소감을 밝혔다.

<한기홍 편집위원 glutton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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