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잉주 당선자는 ‘준비된 대만 총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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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하버드 법학박사 출신 국민당 요직 두루 거쳐… 깨끗한 이미지에 경제회복 기대감 높아

[친디아 리포트]마잉주 당선자는  ‘준비된 대만 총통’

대만을 찾은 것은 3월 21일. 대만 총통 선거를 하루 앞두고서였다. 타이베이 타오위안 공항에서 숙소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30대 택시기사에게 “누구를 찍겠느냐”고 했더니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고 답변했다. 이어 택시기사는 “한국이나 일본, 미국, 중국 대륙마저 국민당 마잉주(馬英九·58) 후보를 지지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도저히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마잉주 후보가 타이베이 시장을 8년(1998년~2006년) 동안 하면서 교통 체증이 오히려 심각해졌고, 기사들의 돈벌이는 더욱 어려워졌다”고 덧붙였다. 그보다 앞서 타이베이 시장을 했던 천수이볜 총통의 행정 수행 능력보다 떨어진다는 설명이다. 그는 “마잉주 후보가 말을 자주 바꾸고 영 믿음이 가지는 않는데, 여성 유권자들은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여성 유권자들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타이베이역 앞에서 만난 20대 직장 여성은 마잉주 후보가 잘 생기고,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줄 알고, 청렴결백하다는 데 높은 점수를 주었다. 기자가 “능력에 문제가 있다는 말도 있다”고 하자 그녀는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는 (총통을) 시켜주고 나서 평가해도 늦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홍콩 출생 사실 선거 내내 시달려
대만 총통 선거 결과는 마잉주 후보의 압승으로 끝났다. 국민당이 8년 집권의 민진당을 제치고 정권교체에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총통이 되기까지 수많은 고비를 넘겨야 했다. 그의 가장 큰 약점은 홍콩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선거 기간 중 여당인 민진당 셰창팅 후보는 그가 대만 사람이 아니라 홍콩 사람이라는 점을 집중적으로 부각시켰다. 마잉주의 아버지(마허링·1920~2005)는 마오쩌둥 주석과 같은 고향인 후난성 샹탄현 출신이다. 국민당 핵심 당원으로 장제스 총통의 경호원을 지냈고, 대만에 건너와서는 국민당 타이베이시당 부위원장을 지낸 당 간부였다. 모친(친허우슈)은 아버지와 쓰촨성 정치학교(정치대학의 전신) 통계학과 동기동창으로, 대만에 건너와서는 국방부 총정전국 통계관(중령)과 스먼댐 관리국 등에서 일했다.

그가 홍콩에서 태어난 사연은 이렇다. 부인, 맏딸과 함께 1948년 대만에 건너온 그의 부친은 대륙의 공산정권 수립 이후 정치학교 동기생들과 대륙을 수복하기 위해 버마와 윈난성 국경지대에서 지하공작 활동을 벌였으나 실패하고 홍콩에 머물렀다. 대륙에 있던 모친(마잉주의 할머니)을 대만으로 데려가기 위해서였다. 그때 마잉주 모친이 대만에서 홍콩으로 건너가면서 그는 1950년 7월 홍콩에서 태어났다. 1951년 부모가 홍콩 생활을 정리하고 대만으로 가면서 그의 짧은 홍콩과의 인연은 끝이 났다.

마잉주 총통 당선자가 지난 3월 23일 당선 이튿날 외신 기자들을 상대로 타이베이 청소년 교육센터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마잉주 총통 당선자가 지난 3월 23일 당선 이튿날 외신 기자들을 상대로 타이베이 청소년 교육센터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그러나 정치인 마잉주에게는 늘 홍콩 출신이라는 낙인이 따라다녔다. 이번 총통 선거 때도 대만 중앙선관위가 그의 영국 국적 여부를 조사하기까지 했다. 민진당 측은 그의 이름(英九)이 (홍콩을 다스렸던) 영국의 ‘영’과 (출생지인) 홍콩 구룡반도의 ‘구’를 땄다고 주장하면서 그를 괴롭혔다.

국민당 간부였던 그의 부친은 4녀 1남의 독자인 마잉주가 어렸을 때부터 중화민국 총통으로 만들자고 마음먹었다. 마잉주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초등학교시절부터 논어·맹자·당시 등 각종 고전을 두루 섭렵하고, 붓글씨도 고교 때까지 익혔다. 그가 대만 최고 명문 대만대 법대에 진학한 것이나, 미국 하버드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은 것은 부친의 뜻이었다.

마잉주 당선자는 학창시절 성적은 상위권이었지만 공부만 하는 모범생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무협소설을 부모 몰래 탐독했다.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무협소설을 집필하기까지 했다. 고교 1학년부터는 춤에 미쳐 여학생들과 사교춤을 배우는 데 정신이 없었다. 고교 때는 호기심에서 담배에 손을 댔다. 대학에 진학해서는 기타를 즐겼다.

당초 이공계로 진학하려던 그의 진로는 부친의 고집에 따라 법대로 바뀌었다. 그의 아버지는 중국이 낙후한 것은 과학기술이 미흡한 점도 있지만 근본적인 것은 법과 제도가 제대로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그를 설득했다. 그는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1968년 대만대 법대에 진학했다.

유학시절 우익 유학생 단체와 어울려
대학에 들어가서도 그는 공부보다 독서모임을 만들고 웅변클럽에 들어가는 등 과외활동을 더 열심히 했다. 대학 1학년 때 교내 웅변대회에 나가 2년 선배인 셰창팅 현 민진당 총통 후보와 겨루기도 했다. 1972년 대학을 졸업하고 해병대 입대를 기다릴 즈음, 일본이 중국과 수교하기 위해 대만과 단교했다. 그는 대만 주재 일본대사관을 찾아가 일본 측의 처사를 비난하는 내용의 혈서를 썼다.

그가 인생의 전기를 마련한 것은 미국 유학이었다. 그는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법학 석사를, 나중에는 하버드대학으로 옮겨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도교수는 제롬 코헨 교수였다. 뉴욕대에서 공부할 때는 저우메이칭 여사를 만나 결혼했다. 그는 하버드대에서 공부할 때 하루에 샌드위치 9개를 싸가지고 가서 세 끼 식사를 해결할 정도로 열심이었다고 한다.

그는 하버드대에서 일은 열심히, 꼼꼼히 하라는 것을 배웠다고 술회했다. 교수들은 조그만 일을 허투루 하면 큰일을 그르친다면서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가 매사에 빈틈없이 일을 처리하려고 하는 완벽주의자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하버드대에서 익힌 습관 때문이다. 요즘도 모르는 영어 단어가 나오면 그는 꼭 사전을 찾아 뜻을 확인하고 있다.

미국에 있으면서도 그는 국민당 우익 유학생 단체들과 꾸준한 교분을 가졌다. 뉴욕대를 졸업한 해인 1977년, 그는 아르바이트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미국 영주권(그린카드)을 신청했다. 그가 그린카드를 받았다는 사실은 민진당의 집중 표적이 돼 선거 막판까지 그는 이를 해명하느라 진을 뺐다.

1981년 미국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한 그는 총통부 제1국 부국장을 맡아 장징궈 총통의 영어 통역을 맡았다. 불과 31세의 나이였다. 이후 국민당 여러 요직을 거치면서 비상계엄령 해제 등의 실무작업을 도맡았다. 그가 정계 입문을 위해 결정적인 기회를 잡은 것은 1993년, 43세의 젊은 나이에 법무부장(법무장관)이 된 것이다. 대만대 은사인 롄잔 당시 행정원장(총리)이 적극 천거한 덕분이었다. 1996년까지 법무부장 재직 3년 동안 그는 범죄와의 전쟁을 치렀다. 이는 그의 청렴한 이미지를 높이는 데는 결정적인 기회였지만 국민당의 지지세력인 지방 토호들까지 마구 손을 대면서 결국은 리덩후이 당시 총통의 결단으로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법무부장 재직시절 ‘범죄와의 전쟁’
정치대 교수로 옮기면서 정계와는 인연이 멀어지는 듯했던 그에게 뜻밖에 정계 복귀의 기회가 빨리 찾아왔다. 1998년 타이베이 시장 선거였다. 민진당 소속 천수이볜 당시 타이베이 시장이 연임에 도전하는 선거판에 마땅한 대항마를 찾지 못한 국민당이 ‘마잉주 카드’에 주목했던 것이다. 200여 차례 당 인사들의 권유에도 출마하지 않겠다고 버티던 그도 부친이 직접 나서서 출마를 종용하자 마침내 선거판에 뛰어들었다.

천수이볜 당시 시장은 선거에 관한한 백전노장이었던 반면 마잉주 교수는 선거 한 번 제대로 치르지 못한 정치 신인에 불과했다. 그러나 마잉주 후보는 5% 득표차로 천수이볜 현직 시장을 물리쳤다. 그의 깨끗한 이미지가 유권자들에게 먹힌 것이다. 타이베이 시장 시절은 파벌이 전혀 없이, 이미지만 갖춘 정치인이던 마잉주 후보에게 자기 사람을 키우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는 2005년에는 당내 거물인 왕진핑 입법원장(국회의장)을 제치고 국민당 주석을 차지해 총통 후보로서 입지를 확실하게 쌓았다.

그가 총통에 당선한 뒤 대만 주식시장의 주가가 폭등했다. 경제가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감 덕분이다. 그러나 양안관계 개선 등 그가 앞으로 해결해야 할 일은 산적해 있다. 믿음이 가지 않을 정도로 경솔하다거나 말이 가볍다는 점도 그의 약점이다. 그가 5월 20일 그의 총통 취임 이후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얼마나 능력을 발휘할지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대만 차기 ‘제일부인’ 저우메이칭 여사

마잉주 대만 총통 당선자의 부인 저우메이칭 여사와 두 딸의 모습.

마잉주 대만 총통 당선자의 부인 저우메이칭 여사와 두 딸의 모습.

‘제일부인’은 국가 지도자의 부인인 퍼스트레이디를 말한다. 국가 지도자의 가정은 중국말로 ‘제일가정’이다. 중국의 제일부인은 후진타오(66) 주석의 부인 류융칭(67) 여사다. 류 여사는 후 주석의 칭화대 수리공학과 동기동창으로, 베이징시에서 중견 공무원을 지내다 지금은 은퇴했다. 국빈 방문을 제외하고는 공식 행사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중국의 차기 제일부인은 시진핑(55) 국가부주석의 부인은 펑리위안(46)이다. 시진핑 부주석이 예정대로 2012년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되면 그녀가 제일부인이 된다. 펑리위안은 중국 사람이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국민가수다.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가무단 소속 장군(소장)이다.

대만의 차기 제일부인은 저우메이칭(56) 여사다. 그녀는 뉴욕주립대 법대 석사 출신으로 현재 대만 자오펑은행 법무실 주임이다. 대만 정치대 법대를 졸업해 1974년 뉴욕주립대 유학 시절 마잉주 총통 당선자와 수업을 같이 들으면서 사랑에 빠졌다. 마잉주 당선자 여동생이 그녀의 여고 한반 친구였지만 대만에 있을 때는 그저 말로만 듣던 사이였다. 그들은 1977년 뉴욕에서 결혼했다. 남편이 하버드대로 옮겨 박사 과정을 밟는 동안 본인은 공부를 하면서 틈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비를 보탰다.

그녀는 남편의 타이베이 시장 시절 공식행사에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마잉주 당선자의 모친은 시장이 된 아들이 대견스러워 시장 집무실을 찾은 적이 있지만 그녀는 8년 시장 재임 시절 단 한 번도 찾아간 적이 없다. 늘 청바지 차림에다 시내버스를 타고 출근했다. 평생 귀걸이를 한 적이 없는 수수하면서 소박한 스타일이다. 마잉주 당선자가 ‘나보다 더 남성적’이라고 말할 정도다.

남편이 총통에 당선한 뒤 첫 출근길에도 여전히 청바지 차림에 시내버스를 타고 출근했다. 그녀는 언론의 관심이 쏠리자 다른 승객들에게 불편을 끼친다며 시내버스로 출근하는 것을 포기했다. 지난달 23일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딸 2명이 총통 선거 투표를 하고 귀국할 때도 공항 측이 귀빈 통로로 출국 수속을 밟도록 했으나 그녀는 완곡하게 거절한 채 딸들을 일반 사람들과 같이 50분 동안 줄을 서서 들어가게 했다.

2003년 사스가 발생하여 대만에 비상이 걸렸을 때, 당시 타이베이 시장으로 있던 마잉주 당선자는 42일 동안 집에 들어가지 않고 집무실에서 사태 해결을 진두지휘했다. 한번은 그가 전화를 걸어 “집에 들어가겠다”고 말하자 그녀는 “사태가 끝날 때까지는 집에 들어올 생각을 하지 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앞으로 그녀가 제일부인이 될 경우 1981년부터 28년째 몸담은 은행에서 물러날지 현지 여론은 분분하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55%가 그녀가 계속 일을 해야 한다고 밝혔다. 마잉주 총통 당선자도 “아내가 계속해서 일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대만 언론은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 부인인 셰리여사가 남편 총리 취임 이후에도 변호사로 계속 활동했음을 들어 일을 계속할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그녀가 제일부인의 역할을 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둘 가능성도 큰 것으로 관측된다.


홍인표<경향신문 베이징 특파원·중문학 박사>ipho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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