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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밀화 작가 정태련, 자연을 벗 삼아 자연을 그리는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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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인]세밀화 작가 정태련, 자연을 벗 삼아 자연을 그리는 화가

이외수 작가의 ‘여자는 여자를 모른다’(해냄)가 독자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톡톡 튀는 글이 좋다는 독자도 있지만, 책 속에 들어간 아기자기한 세밀화가 더 좋다는 이도 있다. 바로 정태련 작가의 그림이다. 독자의 호응에 힘입어 세밀화 에세이 ‘하악하악’(이외수 글·정태련 그림)이 얼마 전 출간됐다. 이번 책에는 정태련 작가의 민물고기 세밀화가 260개의 우화와 함께 아름답게 어우러졌다. 참종개, 버들붕어, 동사리 등 민물고기의 세밀화를 보면서 살아움직이는 생동감과 따뜻함을 함께 느끼게 된다. 두 권의 책만으로도 이외수·정태련 작가는 마치 오래전부터 함께 작업해온 듀엣처럼 잘 어울린다. 작업을 같이 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인연을 맺은 지 벌써 30년 가까이 된다.

“미술대학(서울대 서양화과) 초년생 시절 이대 앞에 있는 옥탑방에 작은 화실을 꾸려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입시생을 가르치고 난 뒤 밤 늦게 혼자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누군가 화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무서울 법도 한데 그날은 스스럼없이 그를 맞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이외수였다.”

이외수 작가의 행색은 남루했고 거의 행려병자 수준의 몰골이었다. 이 작가는 갑자기 죽고 싶다는 생각으로 헤매고 다니다 야심한 시각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를 만나면 생각이 바뀔 것 같아서 찾아왔단다. 이 작가 역시 한때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정 작가는 남루한 차림새와 달리 유창하고 진솔한 사내의 말솜씨에 놀랐다. 아직 이외수라는 이름이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 하지만 정태련 작가는 퍼뜩 그가 이외수라는 것을 알았다. 그 즉시 두 사람은 ‘호형호제’ 하면서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왔고, 작업까지 함께 하게 되었다. 정 작가는 “다음 작업도 이외수 작가와 함께 자연과 생명의 존엄함을 알리는 것이 될 것이다”고 말한다.

세밀화는 말 그대로 세밀(細密)한 묘사로 대상을 정밀하게 그린 그림이다. 정 작가가 세밀화에 뛰어든 계기는 그림책 작가로 일하고 있는 아내의 권유 때문이다. 처음 활동할 때는 ‘세밀화’라는 단어조차 낯설었던 시절이었으나 시골에서 자라서 자연이 그리웠기 때문에 아내의 권유가 반가웠다. 세밀화 작가가 대단한 대접을 받지 못하지만, 유달리 자연을 좋아하는 성품과 지나치게(?) 느긋한 천성 덕분에 지금까지 세밀화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세밀화는 학문으로 따지면 기초 학문과 다름없다. 기초 학문이 튼튼해야 학문이 발전하는 것처럼, 그에겐 회화의 뿌리인 세밀화를 널리 보급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다. 그런 사명감이 남달랐던지 그는 많은 수상의 영예를 안으며 세밀화 작가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정 작가가 참여한 ‘세밀화로 그린 보리 어린이 식물도감’ ‘세밀화로 그린 보리 어린이 동물도감’은 한국어린이도서상과 한국 과학문화재단 선정 우수 과학도서로 선정됐다. ‘세밀화로 그린 보리 아기그림책’은 제16회 한국 어린이 도서상에 뽑히기도 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생명이 깃들어 사는 강’(우리교육) ‘콩달이에게 집을 주세요’(대교출판) 등 그의 세밀화는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다. 그의 그림 속에서 과거와 고향에 대한 추억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세밀화에는 어떤 기막힌 사진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점이 있다. 대상인 자연과 작가가 충분한 교감이 있으면 자연의 기쁨과 슬픔의 감성도 드러나게 할 수 있다. 사진의 섬세함을 세밀화가 따라가기 힘들다. 그렇기에 똑같이 그리기보다 자연이 뿜어내는 아름다운 감성을 드러내도록 애써야 한다.”

그는 동창인 아내와 함께 제2의 고향인 춘천에 정착해서 살고 있다. 남들은 다 부러워하는 방송국을 그만두고 아내와 함께 춘천으로 들어간 것은 이외수 작가를 만나기 위해 제집처럼 다녔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연을 벗삼아 작업을 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얼마 후에는 세밀화에 변화가 오겠지만, 자연을 그리는 화가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자연을 섬기고 그리는 이의 자긍심이 느껴진다.

<최영진 기자 c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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