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초중등 일제고사는 ‘성적 몰입교육?’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폐지 10년 만에 부활, “학생들 학력 줄세우기” 논란 불러

지난 11일 서울 종로구 청운초등학교에서 부정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칸막이를 친 상태에서 아이들이 시험을 치르고 있다. <님호진 기자>

지난 11일 서울 종로구 청운초등학교에서 부정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칸막이를 친 상태에서 아이들이 시험을 치르고 있다. <님호진 기자>

개학한 지 2주를 넘긴 전국 초·중학교에 바람이 거세다. 이 계절의 여느 바람과 다르게 이 바람은 학생과 학부모의 얼굴을 잔뜩 찌푸리게 만들고 있다.

얼마 전 전국 중학교 1학년 교실과 초등학교 4~6학년 교실에서는 전국의 모든 해당 학년 학생들이 똑같은 시험지를 놓고 문제를 풀이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올해 입학한 중학교 1학년 학생들은 지난 6일 중1 진단 평가를 치렀다. 이는 지난해 전국 시·도 교육감 협의회(회장 공정택 서울시 교육감)가 올해부터 중1 진단 평가를 도입하기로 합의한 데 따른 것이다. 11일에는 초등학교 4~6학년 학생들이 교육부가 주관한 초등학교 진단 평가를 치렀다. 이처럼 특정 학년 학생들이 같은 날 동일한 시험을 치른 것은 10년 전 일제고사가 사라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일제고사 형태의 학력 평가는 과열경쟁을 조장하고 인성 교육을 실종시키는 등 각종 부작용을 낳았다는 비판을 받고 폐지됐다.

시험 반대 교사 감독서 제외시켜
교육부와 시·도 교육감 협의회는 이번 진단 평가가 학생들의 학력을 정확하게 측정하여 학습 부진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를 높이는 데 활용하기 위한 자료라고 밝히고 있지만, 학부모와 교사들은 전국 단위 시험 결과는 언제든 학생들을 성적순으로 줄세우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번에 시험을 치른 중학교 1학년 학생 자녀를 둔 인천 지역의 한 어머니는 “중학교에 들어가서 처음 보는 시험이라 아이가 많이 긴장했다”며 “시험 자체보다 초등학교 때는 없던 등수가 나온다는 데 대해 아이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2월에 치른 배치고사에서 이미 초등학교 과정 문제로 시험을 봤는데 왜 똑같은 내용의 시험을 또 보는지 모르겠다고 아이가 말하더라. 전체 10개 과목 가운데 이런 식으로 5개 과목만 시험을 보면 다른 교과는 소홀해질 텐데 여러 과목을 골고루 배울 기회가 없을까 봐 걱정이다.”

일부 학교에서는 시험에 반대하는 교사를 시험 감독에서 제외시키는 일이 벌어졌다. 서울 옥정중학교 1학년 영어 교사 강수정씨는 “교직원 회의 때 원하는 아이들만 시험을 치게 하자는 발언을 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시험 당일에 가보니 1학년 시험 감독에서 빠졌다”고 밝혔다. “아이들이 불쌍하다. 내가 왜 교사를 하는지 가슴 속에 납덩어리가 얹힌 느낌이다. 이런 식의 시험은 교사의 평가권을 박탈하고 아이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이다.”

학부모와 교사 사이에 충돌이 벌어지기도 했다. 지난 10일 서울 영등포구의 한 중학교에서는 학부모 10여 명이 6일 치른 진단 평가 답안지 제출을 거부하는 교사를 찾아가 집단으로 항의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교사는 진단 평가가 서열화를 조장한다며 자신이 시험을 감독한 반 학생 31명의 답안지를 받지 않았다. 이 교사는 자신의 신념에 따른 진단 평가 거부가 학부모와 교사 사이의 갈등으로 비화하는 것을 우려하여 결국 교육청에 답안지를 제출했다.

이번 초등학교 및 중학교 진단 평가의 가장 큰 논란거리는 성적 공개 여부다. 중1 진단 평가의 경우 애초 시·도 교육감 협의회는 지난해 11월 계획안을 만들 때만 하더라도 학생 개인별 석차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방침이었으나, 서울·부산·경기 등 교육청들은 지역 내 석차백분율이나 전교 석차 등을 성적표에 표기하기로 했다. 광주·대전·울산시 교육청은 학생들의 점수를 9등급으로 매길 예정이다. 이렇게 될 경우 학생들의 상대적인 성적을 따질 수 있게 된다. 초등학교 진단 평가의 경우 시험을 치른 학생들 중 1%에 대해서만 점수를 내고 개인 성적표도 따로 공개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간 학교에서 자체적으로 치르던 진단 평가를 전국 초등학생으로 확대한데다, 울산시교육청이 초등학교 진단 평가에 대해서도 9개 등급으로 나눠 학생과 학부모에게 공개하기로 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게다가 학기 중에는 시험을 보지 않는 영어 과목을 평가에 포함시켜, 영어 공교육 강화라는 새 정부 교육방침에 맞춘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경기 남양주 풍양초등학교 6학년 담임 김선정씨는 “표집 학교만 점수를 낸다고는 하지만 벌써부터 학교에서는 학생들 실력을 올려야 한다며 긴장하고 있다”며 일선 학교의 분위기를 전했다. 김 교사의 말은 표집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학교에서도 전국 단위 진단 평가의 후폭풍이 학생과 교사들에게 성적 위주 교육을 강조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런 가운데 이번 진단 평가에 출제된 문제들 중 상당수가 서울시교육청(교육감 공정택)이 시험을 앞두고 서울 지역 학생들에게 나워준 예상문제집에 나온 문제와 정답까지 일치하는 것으로 드러나 객관적인 학력 진단이라는 애초 취지가 무색해졌다. 서울시교육청은 지난해 12월 말 중1 진단 평가를 앞둔 서울시내 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에게 ‘내 실력 스스로 점검해요’라는 제목의 32쪽짜리 문제집을 배부했다. 전교조 서울지부가 11일 공개한 ‘중1 전국연합 진단 평가 문항분석 결과’를 보면 국어 10문항, 사회 15문항, 수학 10문항, 과학 12문항 등이 예상문제집에 실린 문항들과 유사했다. 이는 전체 문항 중 거의 20%에 육박하는 수치다. 물론 예상문제집의 적중률이 높다는 것 자체는 별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번 진단 평가 문제 출제를 서울시교육청이 전담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전교조 현인철 대변인은 “공 교육감이 7월 교육감 선거를 앞두고 학부모들에게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주기 위해 무리수를 둔 것”이라고 비판했다.

“창의성 평가 고민 없는 획일적 평가”
홍익대 교육학과 이윤미 교수는 교육부와 시·도교육청이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논의해왔던 교육의 틀을 뒤집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진단 평가가 교육적으로 타당한가라는 문제와 교육계의 논의를 거쳤는가라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논의와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 특정 모델을 지지하는 그룹이 도입한 시험이 학업 성취도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획일적인 선다형 지필 고사로 학력을 평가하겠다는 것은 창의성 평가에 대한 고민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회귀이고, 무책임한 일이다.”

시험이 끝난 후 많은 학생이 자신들의 블로그나 커뮤니티에 진단 평가 후기를 올렸다. 어떤 학생들은 시험지를 통째로 찍어서 올리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 중 많은 수가 시험 도중 낙서를 하는 등 ‘딴짓’을 한 흔적들을 공개했다는 점이다. 누가 뭐라건 아이들에게 시험은 귀찮고 피하고 싶은 의무일 뿐이다. 아이들의 자발적인 학습 의욕을 끌어내려는 고민 없이, 단순히 시험만으로 아이들의 학습 능력 향상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기는 요원해 보인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바로가기

주간경향 댓글 정책에 따라
이 기사에서는 댓글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