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문화하는 국민청원, 누구 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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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 계류 310건 자동폐기 수순… 의원들 재선 도움 안돼 ‘소홀’

"사실 2006년 12월에 다른 의원을 통해 제출하려고 했어요. 이런저런 사정으로 미루다 이번에 윤원호 의원이 전격적으로 소개해줘 청원을 냈습니다.” 노병호 김치협회 이사의 말이다. 협회를 대표해서 그는 국가기념일로 ‘김치의 날’을 제정하자는 청원을 지난 2월 29일 냈다.

협회가 제안한 ‘김치의 날’은 11월 22일. “원래는 식품으로 국제규격이 나온 7월 5일로 하려고 했는데, 그때는 너무 더워서…. 보통 김치를 담그는 것이 11월 7, 8일쯤 입동 전후인데, 지구온난화로 요즘엔 11월 말에서 12월 초에 담급니다. 11가지 재료로 22가지의 맛을 낼 수 있다는 뜻으로 날짜를 정했습니다.”

이변이 없는 한 노씨가 낸 청원은 17대 국회에 제출한 마지막 청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는 “17대 국회에서 혹 채택이 안 되더라도 여야를 막론하고 반대할 명분이 없으므로 18대 국회에서 다시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427건 청원 중 채택된 건 단 2건
3월 7일 현재 국회에 제출한 청원 건수는 427개. 이 중 채택된 건은 ‘인천내항만재개발과 영종도 준설토 투기장 항만재개발 기본계획 철회’와 ‘어업용 면세유류 낚시어선공급’ 2건에 불과하다. 115건이 철회되거나 ‘본회의 불부의’(본회의에 올리지 않음) 처리되었다. 310건은 계류 중이다. 각종 입법안과 함께 17대 국회회기가 끝나면 이들 청원도 자동 폐기된다. 청원을 위한 그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셈이다.

국회편람에서 청원은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다. ‘국민이 국회에 일정한 의견 또는 희망을 표시하거나 일정한 권리 또는 이익이 침해되었을 때 그 피해를 구제해줄 것을 호소하는 것.’ 청원은 반드시 국회의원 1인 이상의 소개가 있어야 한다. 위원회와 본의회는 가부 여부만 결정하고 수정할 수 없다. 국민의 청원권은 헌법 26조에 보장돼 있다. 청원법 9조 4항에 따르면 국가는 처리 결과를 청원인에게 통지할 의무가 있다. 현재 계류 중인 청원들은 아직 청원인들에게 관련 통지가 이뤄지지 않은 것들이다. 보는 입장에 따라서 ‘국가기관 혹은 국회의원의 직무유기’로 볼 수도 있다.

흔히 ‘○○○법 개정청원을 위한 100만 서명운동’과 같은 거리캠페인에서 서명과 함께 지장 혹은 도장을 찍게 하거나 주민번호 등을 적게 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청원 관련 규정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 사진은 본문에서 언급한 특정 사실과 관련 없습니다.

흔히 ‘○○○법 개정청원을 위한 100만 서명운동’과 같은 거리캠페인에서 서명과 함께 지장 혹은 도장을 찍게 하거나 주민번호 등을 적게 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청원 관련 규정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 사진은 본문에서 언급한 특정 사실과 관련 없습니다.

국회 의사국 의안과 청원 담당자는 “‘진정’의 경우 국회 회기와 관계없이 계속되지만 청원은 의안에 준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동 폐기되는 것이 맞다”며 “일반인 참여 서명부가 있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정해진 양식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고 말한다. 흔히 ‘○○○법 개정청원을 위한 100만 서명운동’과 같은 거리캠페인에서 서명과 함께 지장 혹은 도장을 찍게 하거나 주민번호 등을 적게 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청원 관련 규정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이 담당자는 “청원은 소개 의원만 있으면 성립하기 때문에 서명부에 참여한 사람이 실제 참여했는지 등의 검증은 따로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청원 중 상당수는 지역민원이 차지한다.

아직도 국회 국방위원회에 계류 중인 ‘SEC연구소 이전’ 청원이 대표적이다. SEC연구소는 경북 경산시에 소재한 군부대다. 이 청원에는 관련 대책위 대표를 맡은 하광태·황승위씨 외에 23만8179명이 참여했다. 소개한 의원 역시 같은 지역의 최경환 의원이다. 경산시 인구가 25만여 명인 것을 감안한다면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거의 대부분 시민이 참여한 셈이다. 경산시 관계자는 “외지에 나간 출향민들이나 인근 대구지역 대학생들도 참여했다”고 밝혔다. 공동대표를 맡았던 황승위씨는 “경산시가 발전하려면 현 군부대 지역 쪽으로 뻗어나가야 하는데 시 중심부의 2㎞를 차지하며 가로막고 있어 걸림돌이 되고 있다”며 “경산시민에게는 벌써 20년 가까이 된 숙원”이라고 말했다. 최경환 의원실 관계자는 “예산을 어떻게 마련하느냐가 핵심”이라며 “국방부가 국방 예산으로는 어렵다고 하니 지자체와 협의해 민간이 개발, 군부대 이전지를 마련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 국방부나 국민고충처리위원회 등 다른 요처에도 다 진정을 넣어뒀기 때문에 청원 내용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했다.

왜 대부분 청원이 계류 상태로 남아 있는 걸까. 이지현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 팀장은 “(국회의원들이 국민청원에 대해) 소홀한 정도가 아니라 거의 신경을 안 쓰기 때문”이라고 비판한다. 그는 “채택 건수가 적은 것도 문제지만, 현안일 때 제때 논의·검토하지 않는 것 역시 심각한 문제”라고 말한다. 그나마 처리된 경우도 시한에 밀려 가까스로 처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 참여연대도 17대 국회에만 임종대 현 대표와 박상증 전 대표 명의로 30여 건의 청원을 냈다. 일부는 법에서 반영됐지만 전체적으로 처리된 건은 10건이 안 된다고 이 팀장은 밝혔다. 그는 “단체든 개인이든 청원 취지를 충분히 이해하고 소개하려는 의원을 찾기 어려운 것도 문제”라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17대 국회에서 가장 소개를 많이 한 의원은 누구일까. 본지는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올라온 정보를 바탕으로 조사했다. 김원웅 통합민주당 의원이 21개로 가장 많았다. 2위를 차지한 의원들(11개)보다 월등히 많았다. 김원웅 의원실 관계자는 “14대 때부터 의원을 하면서 독립운동가나 역사문제 등을 주로 제기하다 보니 그와 관련된 민원이 많이 올라왔고, 지역민원도 있었다”며 “국민적 관심사로 청원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국회 의정활동에서 밀리는 면이 있다”고 말한다. 법안이나 예산심사소위에 비해 의원 관심도가 낮다 보니 다른 소위가 열 번 열릴 때 한 번 열릴까 말까 한다는 것.

청원의 공공성 문제도 되짚어야
청원의 공공성 문제도 되짚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강원택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청원 건수만 볼 것이 아니라 청원 내용이 어느 정도 공공성이 있는지 분석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당 입장과 청원을 제기하는 의원 입장이 다른 경우도 많은데, 대부분 면피용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고 비판했다. 청원에 대한 의원 관심도가 떨어지는 이유는 재선 여부 등 ‘정치적 생명’에 청원이 위협적 요인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강 교수는 “의원 개개인이 독립적인 입법기관이기 때문에 국가나 사회 입장에서 청원을 대해야 하는데, 사소한 이익을 대표하는 경우 비난을 피할 수 없다”며 “현행 선거제도에서는 향후에도 그런 문제가 계속 남아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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